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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자! (사 53:1-9)

by 【고동엽】 2022. 2. 7.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자! (사 53:1-9)

 

요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처음처럼'이란 말이 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들의 뜻은 '옛날의 감격, 떨림, 순수함, 감동을 되찾자'라는 말입니다. 지금 많이 변하고 퇴색하고 오염되고 식어졌다는 말이고 고백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변하고 식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감동도 시간이 지나면 다 식어집니다. 그렇게 뜨겁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밋밋해집니다. 아름다움도 시간이 지나면 변해 버립니다. 그래서 얼굴의 아름다움은 3일 가고 몸매의 아름다움은 3년 가고 마음의 아름다움은 30년 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집니다. 처음 신앙 체험했을 때 그 감동, 감격, 뜨거움, 신선함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새로웠습니까? 그런데 다 식어지고 변한다 할지라도 신앙이 변하거나 식어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롬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라 함은 거룩한 백성이란 뜻으로, '구별된 자, 하나님의 자녀'란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사는 세계가 다르고, 사는 맛이 다룹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세상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신령한 세계를 맛보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하나님을 있다고 믿고 삽니다.
또 보이지 않은 천국을 보이는 내 집처럼 여기고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죽어서 무덤으로 끝난다고 슬퍼하지만 우리는 죽음이 천국 가는 길로 믿고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는 목적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고, 가는 코스가 다르고,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이 다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이북에서 월남한 자매가 남대문에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남대문시장에서 포목상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고, 언니는 그런대로 조그마한 가게를 하며 버는 대로 주님의 일에 봉사하면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언니가 건강을 잃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죽어갑니다. 그때 동생은 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언니를 부둥켜안고 탄식의 말로, '1.4 후퇴 때 죽음을 무릎 쓰고 3.8선을 넘어 잘 살아보려고 애쓴 언니가 이렇게 고생만 하다가 죽으니 예수 믿고 잘 산 것이 무엇이며, 예수 믿고 덕본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때 언니는 조용하게 동생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 울지 마. 사람이 한번 났다가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인데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어, 내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라, 나는 천국으로 간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어!'
이 말을 마치자 언니는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때 동생은 언니의 말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날마다 싸우면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여겨졌습니다. 언니한테 인색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 언니가 자랑스럽게 보였습니다.
동생은 언니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이별을 했습니다. '언니 편히 가세요! 언니는 참으로 바로 살았어요! 이제 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언니 뒤를 따라가겠어요!' 깊이 회개했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죽음 앞에도 담대합니다. /할/


▶어느 믿음이 좋은 집사님 댁에 세무서직원이 찾아갔습니다. 재산을 파악해서 세금자료를 쓰려고 간 것입니다. '당신의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예! 나는 아주 부자입니다. 아들 둘, 딸 하나가 있고 집은 큰집이 한 채있습니다. 굉장히 크고 아름다운 집인데 천국에 있습니다. 안방에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아내도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건강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 삶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더 감사한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필요를 채워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때 세무서 직원은 '당신은 참 부자입니다. 그러나 세금 낼 돈은 하나도 없군요!'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별세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라 함은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부활절 전 40일간을 가리키는 기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46일간으로, '재의 수요일 혹은 속죄의 수요일'에 시작돼 부활절(주일) 전날 저녁까지 주일을 뺀 40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부활절이 언제인가에 따라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 정해집니다. 그러니까 다른 절기들과 달리 부활절은 고정된 날이 없고 매년 3월22일부터 4월26일 사이에 위치하게 됩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3세기동안 해마다 부활절 일자에 대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첨예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을 음력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서는 부활절이 언제나 주일에 지켜져야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언제나 금요일에 기념돼야 한다고 굳게 주장했습니다.
결국 325년 동방과 서방의 교부들이 모인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달'과 '주중의 날'을 둘 다 인정하기로 해, 춘분(3월21일경) 다음 첫 만월 후의 첫 주일을 부활절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부활절은 보통 3월22일부터 4월26일 사이의 날에서 정해집니다. 올해의 부활절은 3월23일로 다음 주간은 고난주간이 되고, 그 다음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신 고난 절기가 다가오면 40일전부터 하루 한 끼씩 금식을 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중세기 때는 사순절기간에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고 하며, 빵에 버터를 발라먹는 것도 금지할 정도로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한국교회도 이 기간 중 금식, 구제, 헌혈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를 삼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순절의 의미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같이 동참하는데 우선 그 의미가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신 마지막 40일간의 기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는 일이 오직 십자가의 죽음 밖에 없음을 아셨기에 그 고통도, 아픔도, 고난도, 견디시고 십자가 위에서 생명을 바쳤기에 인류의 죄는 청산된 것입니다.
'나 너를 위하여 몸 버려 십자가를 졌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고난의 아픔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사순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나타나면 주변이 환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머니의 얼굴을 세상에서 그렇게 추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불에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은 흉측한 얼굴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어머니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싫어서 그는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에게 어머니를 소개하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도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락을 빠뜨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배고플 것을 걱정하여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로 갔습니다. 딸의 교실을 찾아갔습니다. 도시락을 전해 줄 때 그 여학생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누구냐?' 이 여학생은 도시락을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어머니 듣는 데서 말했습니다. '우리 집 식모야' 그리고는 도시락을 빼앗듯이 가지고는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 온 여학생은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어요? 이제는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어요.' 그 때 어머니가 울고 있는 딸 옆에 앉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딸아! 엄마 얼굴이 이렇게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연이 있단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하시고 나는 집 바깥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원인 모를 불이 났었단다. 집안에는 어린아이인 너만 있었고 내가 불이 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방은 불길에 휩싸여 이미 집은 불덩어리였었다. 그때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 가 어쩔 줄 모르고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너를 부둥켜안고 뛰쳐나왔다. 그 때 나는 심한 화상을 얼굴에 당하여 병원에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생명을 건졌다. 그래서 내 얼굴은 이 모양이 되었다'
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감격하여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흐느껴 울며 말했습니다. '엄마. 용서해주세요. 제가 너무 잘못했어요' 그 후 이 여학생은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를 누구에게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자랑하였습니다. 내가 당할 것을 어머니가 당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당할 것을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사53장은 메시아 장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700년 전부터 이사야를 통하여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예언한 장으로 유명합니다.
신학자 '켐벨 몰간'은 오늘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라고 했고, '델리취'는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력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 고난의 종교이며, 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속의 종교이며 또 죄인을 구원하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믿/
마호메트는 나이 60세에 한 여인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7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나이 80세에 음식을 잘못 먹고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플라톤도 80세까지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세에 요절하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으셨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철저한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사53장에 예언된 것과 같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질고를 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셨으며, 12가지의 형벌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케리그마요 메시지입니다. /믿/할/
본문 말씀 중에 '멸시, 질고, 슬픔, 고난, 찔림, 채찍에 맞음' 등의 예수께서 겪었던 단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장차 구원자로 오실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것과 그 메시아는 모양도, 풍채도, 아름다움도 없기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게 될 것이라도 1-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4-6절에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게 된 것은 자기의 죄책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겪어야 할 질고와 슬픔과 징벌 때문이며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9절은 그러한 고통과 징벌을 대신 받으시면 서도 침묵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는 본문 4-6절을 통해 '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 이 질문의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당하신 온갖 고통과 수단과 죽으심이 '나 때문이었구나!'하는 사실입니다. /믿/ 오늘 본문 속에서 나 때문에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본문은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재물'로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두 가지 모습을 생각할 때에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⑴구약 시대에는 죄지은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켜 자기 대신하여 짐승이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희생 제물을 드려서 그 짐승이 불에 태워짐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가 불살라 태워지고, 없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⑵구약 시대에는 1년에 한 번씩 속죄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속죄 일에 제사장은 모든 백성들 앞에서 수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어 백성들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시킨 다음 광야로 내쫓습니다. 결국 염소는 광야에서 맹수의 먹이가 되어 죽습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종교 행위의 모습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던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의 역사는 온통 죄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사망은 곧 인간을 지옥으로 이끄는 도구이며 결국은 영원한 멸망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게 된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입니다. /아멘!/

 

2. 예수님이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분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①연한 순과 같으셨습니다.

바람에 꺾이고 발에 짓밟히면 으깨지는 연한 순과도 같이 나약하고 애처로운 존재이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칼에 위협을 받아 애굽으로 피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연한 순은 마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싹이었고 줄기였습니다.
바위는 땅을 뚫고 자라지 못하지만 연한 순은 땅을 뚫고 자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그의 몸인 교회는 연한 순같이 보여서 시대마다 핍박을 받았지만 교회는 날마다 왕성해갔습니다.
로마제국이 교회는 핍박할 때 교회는 지상에서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역사를 보면 오히려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교회는 더욱 왕성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연한 순같이 연약해 보이나 실상은 여호와의 팔이기 때문에 강합니다. 1절에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②그분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습니다.
여러분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가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권세를 가진 영광의 정치적인 메시아를 대망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정치적으로 해방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오셨고, 병든 자에게 오셨고, 소외된 자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의 진리는 약한 것 같았습니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리를 동행해 주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아주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그 시대의 인물들을 보면 잘 생겼거나 풍채가 있고, 위엄이 있고, 정기가 서려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흠모하고 사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줄기가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최고 종교지도자들이, 그리고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약하게 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그는 결국 3일 만에 죽음에서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믿/
주님의 몸된 교회는 마른 땅에 줄기처럼 약하게 보이나 결국 어떤 환경에서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할/ 이 줄기는 쭉쭉 뻗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싹은 여호와의 팔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새의 줄기에서 다윗의 혈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①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1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믿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 모두가 예수님을 부인했고 오직 갈릴리 해변의 어부들과 여인들과 어린아이들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②유대인들은 예수를 멸시했습니다.

3절에 '멸시를 받았다.'는 말은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인격 모독이요, 자존심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배고픔도 참을 수 있고, 고통도, 아픔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면 못 참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살인도 나고, 자존심 때문에 볼 사람도 안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멸시를 받고도 참으셨습니다. 여기 '멸시'란 문둥병자 취급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3절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구약의 문둥병자들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살았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머리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고 항상 얼굴에 보자기를 가리고 '나는 부정합니다.'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문둥이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고 외면해 버리고 침을 뱉습니다. 당시 호적법에도 문둥이는 호적에도 죽은 자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문둥이 취급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③유대인들은 예수를 싫어했습니다.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유대 군중들은 '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소리쳤습니다.
④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간고는 병든 자의 슬픔, 실패자의 낙심될 때의 마음입니다. 질고는 아이를 낳는 고통의 괴로움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을 담당하시려고 그분이 몸소 그것을 체험하신 것입니다.
⑤그런데 무지한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말하는데 육체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 심리적인 질병을 다 포함한 말입니다. 또한 슬픔이라는 것은 인생의 고난으로 인한 슬픔과 비애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질병과 고통과 슬픔을 담당하시고 병든 자, 실패한 자, 슬픔 당한 자의 고통을 다 없앴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모든 질병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할/
그런데 무지한 인간들은 주님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자신이 저지른 어떤 죄 때문에 받는 보응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본문은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중요한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질고와 슬픔과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잘못과 죄 때문에 매를 맞고 멸시를 당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본문 4-6절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무려 아홉 차례나 거듭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 때문이요, '나' 때문입니다. /믿/

 

4.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습니까?(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①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려고 주께서 골고다 십자가 길을 가실 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 가시관의 가시가 주님의 머리를 온통 찔러 피가 흘렸습니다. 또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으로 찔림을 받아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가 쓰는 영광의 표시입니다. 이 지상의 왕들은 머리에 면류관을 썼습니다.
면류관은 '부귀, 영화, 존귀'를 홀로 누리는 상징입니다. 세상 임금이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릴 때 백성들은 가난과 고통과 아픔을 맛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저주를 홀로 담당하신 왕으로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조롱으로 만든 가시면류관이지만 이 면류관은 이런 상징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에 찔림 때문에 우리의 허물이 용서된 것입니다.
허물은 모르고 범한 죄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모르고 짓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천국은 죄인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자라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천국 백성 삼으시려고 친히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그 찔림을 통하여 인간의 허물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②우리의 죄악은 용서해 주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죄와 죄악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뜻이 다릅니다. 잘못인줄 알면서도 인간의 의지가 약해서 할 수 없이 팔려 가는 것은 죄라고 하고, 죄 인줄 알면서도 욕심을 채우려고 계획적으로 범하는 죄를 죄악이라고 합니다.
몰라서 범한 허물이 있고, 알고도 끌려가는 죄가 있습니다. 알고도 욕심을 채우려고 계획적으로 범하는 죄악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허물과 죄악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중심적으로 살며 방탕하고 반항하려는 의지나 그 행위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불순종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물도, 죄도, 죄악도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경은 죄를 무섭게 다룹니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수렁을 만들어 놓았고, 담을 쌓았습니다. 죄를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 당당히 나갈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악을 친히 담당하실 때,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죄악의 담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1서2:2절에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고 했고 히브리 기자는 '그의 몸을 단번에 하나님께 드린 영원한 화목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나라에 음란죄가 만연하여 이를 걱정하던 왕이 온 백성에게 긴급조치 명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칠 계를 범하다가 적발이 되면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두 눈을 뽑으리라'
전국이 긴장된 상황에서 첫 번째 긴급 조치 위반자가 적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범인은 다름 아닌 왕자였습니다. 왕자는 '감히 누가 내 눈을 뽑아' 하면서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사실 신하들도 왕자 앞에서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왕이 노발대발하면서 왕자의 두 눈을 왕이 직접 뽑겠다고 나섰습니다. 넓은 광장에 형틀을 높이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왕자를 결박하여 올려 세웠습니다.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왕이 친히 형들 위로 올라갑니다. 모든 백성과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저 엄하신 대왕께서 왕자의 두 눈을 뽑아 버리면 이 나라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정말 뽑으시려나?' 모두 수군거립니다.
왕은 아들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왕자는 네 죄를 알렸다. 네 죄 때문에 너희 두 눈을 뽑을 수밖에 없다.'하고는 왕은 오른 손을 높이 들더니 어느새 번개처럼 왕자의 왼쪽 눈을 푹 찔러서 사정없이 뽑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오른쪽 눈은 사정없이 뽑아버렸습니다. 백성이 보니까 한쪽 손에는 아들의 왼쪽 눈이 뽑혀 있고, 다른 손에는 왕의 오른쪽 눈알아 뽑혀 있었습니다. 아들의 죄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오른쪽 눈 하나를 대신 뽑은 것입니다.
이윽고 왕이 입을 열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아비의 눈 하나로 아들의 눈 하나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백성이 땅에 엎드려 '성군이시여!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도 남사옵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의 죄는 용서할 수 있었고, 그 나라의 공의는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은 사하여 주옵소서!'하신 기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였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막혔던 담을 허셨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믿/
③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할/ 여러분, 이 세상의 행복은 뭐니뭐니 해도 마음의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평안이 있고, 남편이 주는 평안이 있고, 자식이 주는 평안이 있고, 돈이 주는 평안이 있고, 권력이 주는 평안이 있고, 이웃이 주는 평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한 평안입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환란 당할 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아무리 많은 고난을 당했어도 예수 그리스도만큼 고난을 당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는 그 순간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임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죄 값으로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그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난의 십자가를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 심령 속에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
④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시려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에게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그 채찍 끝에는 조그마한 납덩어리가 달려 있는 채찍이랍니다. 한번 후려치면 그 납덩어리가 사정없이 주님 몸에 박혔습니다. 그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아픔을 참으셨습니다. 왜 참았습니까? 인간의 모든 질병을 짊어지시려고 참으셨습니다. 벧전2: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할/
지금도 치료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신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5.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두 가지 진리입니다.
①우린 철없이 양처럼 그릇 행하셨고 제멋대로 살았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멋대로 죄짓고, 멋대로 놀고, 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인사 12명에게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다. 빨리 도망가라' 다음날 열두 사람의 집을 찾아가 보았더니 모두 집을 떠나 어디론가 도망갔다고 합니다.
②우리 무리의 죄악은 우리에게 담당시키지 않으시고 온통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대속의 절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주님이 인간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6. 주님의 고난은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①대속의 고난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죄나 허물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나의 허물과 나의 죄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②자청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데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요한 사도도 예수님의 고난은 스스로 당한 고난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10:17-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청하여 찔리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다. 창에 찔리셨습니다. 채찍에 찔리셨습니다. 못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찔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자청하여 상하셨습니다. 온 몸이 고난으로 몹시 상하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으로 머리가 상하셨습니다.
채찍으로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못이 박힘으로 손과 발이 상하셨습니다. 창으로 찌름으로 옆구리가 찢어져 가슴이 상하였습니다.
그가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을 위함입니다. 죄악의 원어는 원죄입니다. 나의 자범죄와 원죄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약 3시간동안 채찍에 맞으시고 약 9시간동안 피가 흘렀습니다.
③인류 역사상 최대의 고난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시시한 고난이 아닙니다. 작은 고난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최대의 고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질고,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라는 말들은 모두 극심한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최대의 고난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어떤 악인들이라 하더라도 40대 이상은 치지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칠 때에도 꼭 40에 하나 감한 매 즉 39대씩만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만은 채찍으로 칠 때에 수도세지 않고 가혹하게 쳤습니다. 더구나 빌라도는 예수를 조사했을 때 죄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도 정치가라 군중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죄수가 되었고, 성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강도 짓 한번 하지 않으시고 강도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돈 한 푼도 없으신 분이 부자의 묘에 누우셨습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위에 있기를 바라는데 예수님을 친히 낮아 지셨습니다. 사람들은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친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고난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받아야 할 고난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기뻐 감당해야 합니다.
골1: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한마디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결론은 나와 있습니다. 왜? 주님이 고난을 당했습니까? 우리 때문에, 나 때문에 이 사실은 아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빚진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 엄청난 예수님의 은혜를 늘 마음에 기억하면서 '나는 이렇게 빚진 자로서 예수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하고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믿/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후5: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이라는 뜻입니다. '산 자들로 하여금'은 '예수 믿고 살아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의 고백을 갈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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