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 (눅 18:9-14)
이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습니다. 가기가 편한 길이 있고 가기가 어려운 길이 있습니다. 밝은 길이 있고 어두운 길이 있습니다. 또 의의 길이 있고 불의의 길이 있고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고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 없이 가는 길이 있고 생각해야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경건한 길이 있고 쾌락의 길이 있고 높은 길이 있고 낮은 길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왜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는가 하면 우리 앞에 이렇게 길이 두 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데 길이 하나밖에 없다면 고민도 없고 갈등도 없을 것입니다. 길과 방법이 하나밖에 없는데 무슨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이 두 길이 있어서 고민이 주어지고 갈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두 길이 있습니다. 인본주의가 있고 신본주의가 있습니다. 예배에도 바른 예배가 있고 형식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느 신앙인 부자간에 오랜 여행을 하던 중 하루는 외진 산골에서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해는 지고 하는 수 없이 민박을 해야 할 형편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게는 많은 돈이 있었으므로 혹 자다가 집 주인에게 도난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과 의논 끝에 군대 불침번식으로 번갈아 가며 지키기로 했습니다. 먼저 아들이 짐을 지키게 되었고, 아버지는 금세 녹아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마구 흔들어 깨웁니다.
'아버지! 우리가 잠 안자고 짐을 지킬 필요가 없어요! 내가 앉아 있는 동안 주인집 아저씨가 성경 말씀을 부인에게 읽어 드리고 같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분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간절히 기도했으며, 또한 놀란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어요! 아버지도 그 기도소리를 들으셨다면 아마 큰 감동을 받았을 겁니다.'
이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한 동안 말이 없이 생각하다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남을 의심하고 특히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지 않고 기도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자간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곧 바로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할/
본문에 바리세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기도이고 세리의 기도는 인정하시는 기도입니다. 오늘 두 사람의 기도를 연구해 보고 우리 모두 바른 기도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제목소개!▶
1. 본문의 배경을 보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두 비유로 기도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초반에는 강권하는 기도를 가르치시고 본문에서는 의로운 기도를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1-3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이 재판관은 선한 재판관이나 명성이 높은 좋은 재판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억울한 소원을 풀어 달라고 강청하는 과부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 끝에 주님께서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택함 받은 성도들의 계속적인 기도를 주께서 반듯이 들어주신다는 약속의 비유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 끝에 이런 말들을 합니다.
'나도 이 과부 못지 않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도 했고, 호소도 했고, 내 마음을 진실로 토해냈는데 왜 도대체 나에게는 아직까지 응답이 없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바로 오늘 본문의 비유를 잘 배워야 합니다.
본문은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바리새인도 기도했고 세리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내리신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응답 받는 기도가 되었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응답과는 거리가 먼 기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①여기서 왜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까?
비유란 어떤 진리를 쉽고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들을 사용하여 진리를 전달하는 문학방법입니다. 이 비유를 연구할 때는 항상 중요한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비유의 동기이며, 또 하나는 비유의 내용이며, 세 번째는 그 비유의 결론입니다.
⑴본문의 비유의 동기는 무엇인가? 이 동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누구에게' 이 비유를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⑵비유의 내용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세인들이 누구인가? 사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의해 가장 많이 책망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이 다 책망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고 율법이 미세한 부분까지 지키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분리'되었다는 '파라스'라는 말로 성경에 바리새인들이 많이 나옵니다만 그 중에 사도 바울도 니고데모도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점령국가인 로마 정부를 위하여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로마 정부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세금을 받는 세리를 뽑아 고용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창녀들과 함께 이방인과 죄인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당시 종교 지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세리는 당시 죄인의 대표적인 인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극과 극에 인물들을 대조시켜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시고 계십니다.
⑶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내려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주신 후에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시지 않고,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의롭다 하심'은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稱義)라고 하는데 '하나님 나라나 구원'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적인 특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핵심적인 교훈은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잠12:28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의로운 사람에게는 생명의 역사, 복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②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막강한 무기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그분이 깨닫는 기도의 깊이만큼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깊이 기도한 사람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동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강하게 붙든 사람들은 그만큼 기도가 강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잠들고 있는 첫째 이유는 기도를 졸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12명의 제자를 택해 많은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제일 강하게 가르친 진리는 기도의 진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배운다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1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도, 기도도 배우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의 기도는 무엇인가?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바리새인은 자기를 어떻게 믿었습니까?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의롭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는 한마디로 자기 주제를 파악 목하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혀 의롭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①바리새인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은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는 엄격한 계급사회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특권으로 말미암아 교만에 가득 찬 생활을 했고 자신들이 최고로 율법을 잘 지키며 의로운 자라고 자부하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⑴11절의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그들의 위선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⑵'서서 따로 기도하며' 성경에는 여러 가지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서서 기도할 수도 있고, 앉아서 하기도 하고, 무릎 꿇고 하기도 하고, 엎드려서 하기고 하고, 길을 오가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 서서 하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찬양의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오늘 그의 기도의 자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또 '따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남들 속에 섞이지 않고 구별되어 주님과 따로 만나기를 원하면서 했다는 것, 이것도 참으로 귀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언뜻 보면 기도하는 것 같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형편없이 깎아 내리는 행위입니다. 그러한 기도와 그러한 감사를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도덕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토색한 일이 없습니다. 도적질한 일도 없습니다. 불의를 범한 일도 없습니다.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저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지금 어떤 도덕적인 계명을 범하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이유에서 자신이 의로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책망하기를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눅11:39)고 했습니다.
⑶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또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의로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바리새인들이 바로 월요일과 목요일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금식은 굉장히 중요한 기도입니다. 금식은 육을 죽이고, 영을 맑게 해 줍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때로는 큰 유익을 주는 아주 좋은 방법이 금식기도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금식을 통하여 자신의 깊은 죄를 깨닫기도 합니다. 금식을 통해서 평소에 보지 못한 진리의 오묘한 도를 깨닫게도 합니다. 금식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고 암 덩어리가 떨어지며 귀신이 쫓겨가고 술 담배도 끊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금식은 이처럼 신앙 상 큰 유익을 주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 바리새인의 금식기도는 전국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에 모이는 장날에만 금식을 하며 얼굴에 회칠을 하고 어수선한 옷차림도 하고 머리를 풀어 제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건을 보이려고 자랑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드리는 금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행위를 보이기 위한 방편입니다.
⑷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자랑의 기도를 합니다. 십일조는 한마디로 믿음의 씨앗이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은 율법의 말씀대로 모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모든 성도는 우리의 모든 소득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십일조는 믿음이 아니면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재물의 복을 주십니다.
말3: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 중에 두 마디가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다' /할/ 십일조 이야기는 '돈 이야기'가 아니라 '축복 이야기'입니다.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설교가 아니라 신나는 설교입니다. /아멘!/
그런데 본문의 바리새인이 드린 십일조는 믿음의 행위로써 드린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기 위해 드린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②바리새인의 잘못된 기도를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⑴그들의 기도 속에는 자기만 있었지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11절에서도 '나는' 12절에서도 '나는'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 어떤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나입니까? 자기라는 나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틀 속에 가둬 놓아버렸습니다. '하나님' 한번 불러 놓고는 '나는 또 나는 계속 나만' 내세웁니다.
하나님이 귀 있으면 내 행위를 들어보라는 교만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는 저 그늘진 곳에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나는 토색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불의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과 다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는 이 교회를 위해서 중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나는 십일조를 했습니다. 금식을 했습니다. 모든 행사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고 '내가 했습니다. 내가 했습니다.'하는 이런 사람들과는 함께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분은 은밀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⑵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진정한 보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지식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압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어 주었으므로 이 사실을 모르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는 참회의 기도가 없습니다. 또 고백이 없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자기를 내세우며 자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 수단이 좋아서, 방법이 좋아서, 발이 넓어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서 도와주고 열어주고, 풀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성도들은 그런 사람 한 사람도 없는 줄 믿습니다. /할/
오늘 바리새인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중요합니다. 체험한 신앙은 절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체험한 신앙은 절대로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만나야 합니까? 간절히 찾고 또 찾으면 만나주십니다. 렘29:13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할/
눅5장을 보면 어느 여름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고 있었던 베드로는 밤새워 자기의 기술을 다 쏟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날이 밝았습니다. 그의 허탈한 심정을 아무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낯선 사람이 다가옵니다. 그는 어부 출신이 아닌 목수 출신입니다. 이 낯선 사나이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어떤 큰 힘에 항거할 수 없는 위력 앞에 굴복하면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때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옆에 동료를 불러 간신히 배 위에 올린 베드로는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낯선 분에게서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고기 때의 방향을 알고 계신 저분! 한 번도 바다를 접촉해 보지 않았는데 바다 깊은 곳을 보시는 저분,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시는 저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그분이 하나님임을 깨닫자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마침내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리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죄인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교도소에 다니며 교목을 보신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결론은 '교도소에는 죄인이 한사람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람마다 붙들고 그 사연을 들어보면 '모두가 다 억울하게 들어왔고, 재수 없어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죄수가 모인 것이 교도소인데 그곳엔 진짜 죄가 없다고 항변하더랍니다.
사람들은 죄 이야기하면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죄는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외아들 독생자까지도 버려서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죄를 용서받는 비결은 돈을 들여서 받는 것이 아니고 어떤 선이나 행위로 속죄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없다 함을 주시고 외로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 한마디로 바리새인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⑶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도 보지 못했고, 자신도 발견하지 못했고,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죄인이래야 용서가 필요한 것이고, 용서의 필요성을 깨달아야 용서해 주시는 구세주가 필요한 것이지요. 내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 앞에 가서 겸손히 자기의 옷을 벗습니다. 수치스럽고, 부끄럽지만 자기의 모습을 노출하고 '이것이 내 질병입니다' 나를 고쳐 주십시오! 자기의 몸을 맡길 때만이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리새인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관계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대단한 의인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3.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 당시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로 찍혔습니다. 왜?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동족의 피를 파는 매국노로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까지 지탄을 받을 존재였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여리고 성에 있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유대인들이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립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세리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고 그들과 대화를 해서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①본문의 세리의 기도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⑴멀리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그는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 곳에 가까이 오지를 못합니다. 행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을 찾아갑니다. 지은 죄가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할 큰 죄인임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멀리 서서 기도하는 그의 모습 속에는 그의 겸손히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머나먼 거리가 있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기도하기 위해 자신이 서 있어야할 위치를 분명히 알고 행동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서야할 자리가 어디인지 바르게 알고 처신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의 문은 지극히 낮아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감히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⑵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⑶죄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외친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과 같이 의로운 생활도, 감사할 것도 없고, 또 거룩한 생활도 없어서 자랑거리가 없었습니다. 세리에게 오직 할 말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며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 밖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②'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에 응답 받은 사람이 세 사람이나 됩니다.
⑴마15장에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이방 여자에게 예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고 하자 그녀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믿음의 호소를 드리자 예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⑵막10장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중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때 주님이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자 '보기를 원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축복하셨습니다.
⑶그리고 본문의 죄인 세리입니다. 세리가 예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호소하자 '네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라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할/
③어떤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눈을 뜨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게 하고, 믿게 하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⑴성령이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이 눈이 열리기 전에 자신을 보면 모두 자기위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자만하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남의 흉만 보게 됩니다.
자신을 보는 눈이 아직 뜨여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뜨게 하신 눈으로 자신을 보면 자신의 무능이 보이고 무지가 보이고 죄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능하면서도 교만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전도할 때 '우리는 죄인입니다'하고 말하면 '내가 왜 죄인이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다 진정 성령의 감화로 나를 보는 눈이 뜨이면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⑵두 번째는 성령의 능력은 '남을 보게' 하십니다. 남을 보는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보는 눈이 뜨이면 동시에 남을 보는 눈도 뜨이게 됩니다. 남을 보는 눈이 뜨이면 남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 눈이 뜨인 사람이 중보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 눈이 뜨여야 신앙이 성숙해 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초월하고 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네가 보이고 너의 아픔이 보이고 너의 필요를 알게 되고 너의 영혼의 귀중함이 보이게 됩니다. 이 눈을 뜨고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성령이 이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십니다. 나 자신을 보는 것도 복입니다. 그런데 더 큰복은 남을 보고 남을 생각하는 눈이 뜨였다는 사실입니다. /할/
⑶성령의 능력 세 번째는 '깊은 곳을 보게' 하십니다. 이 눈을 뜨게 되면 평소에는 생각도 없고 개념도 없고 관심도 없던 것들이 신기하게도 눈에 보이고 눈에 들어옵니다.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보니 그것이 눈에 보입니다. 생각이 납니다. 느끼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감동으로 비추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해서 깊은 의미를 알고 깨닫고 보게 하십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창45:48절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50: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이 대목을 보면 요셉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고난을 해석하는 이 혜안이 얼마나 깊습니까? 이 대목을 해석하는 모습으로 보아서 요셉은 깊은 곳을 내려다보는 통찰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눈이 열린 눈입니다. 열려도 그냥 열린 것이 아니고 활짝 열렸습니다. 그때 요셉의 눈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형제들은 그 날 요셉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열린 눈으로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역사를 보았고 자신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먼저 보내신 이유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
성령의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바리세인은 안타깝게도 성령 충만 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세리는 성령을 모시고 환영하고 영접한 성도입니다. /믿/
▶여러분 이 보잘 것 없는 세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 주님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4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의롭다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죄의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너의 기도를 내가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의 진리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이시리라' /할/ 이 말씀은 세상에 통용되는 진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가 높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더 낮아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정반대입니다.
'존 번연' 목사님은 '우리가 보탤 셈을 하면 하나님은 뺄셈을 하시고, 우리가 뺄셈을 하면 하나님은 더할 셈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봉사하면 분명히 사람들 눈에는 뺄셈을 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감사를 받으시고 무궁한 하늘 보고를 여시고 더할 셈을 하십니다. 세상의 이자율이 가장 비싼 게 달라 이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자는 30, 60, 100배입니다. /믿/
▶한 교회에 두 권사가 칠십 해를 누리며 사시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때 한 권사에게 천사장이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이 있느냐?' 그는 거침없이 '예! 나는 70평생 땅에 살면서 봉사를 많이 했고, 선행도 많이 했고, 상장도 많이 받았습니다'하고 장한 보따리를 내 놓고 자랑했습니다. 그 천사장이 보따리를 열어보니 웬일입니까? 다 썩어서 악취가 나므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은 하나도 없었답니다.
또 천사장이 다른 권사에게 '너는 70년을 땅에서 살았으니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으면 내 놓으라' 그러자 그는 '아무 것도 없으나 다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감사의 눈물만을 드릴 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기쁨을 감사했습니다.
천사가 그 성도를 향하여 옷을 벗어 보라고 했습니다. 옷을 벗어보니 놀랄만한 광채가 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자국이 몸에 인 쳐 있었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귀한 면류관을 씌어 주는 줄 믿습니다. /아멘!/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할/ 우리도 세리처럼 온전히 자신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간구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 속에 하나님의 축복은 임합니다.
▶유명한 무디 목사님이 미국 큰 도시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그곳 신문 기자들이 그를 중상 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날 신문에 무디에 관한 온갖 허위선전과 악선전이 가득했습니다. 집회 담당자들이 펄쩍 뛰며 이 사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억울한 일을 당한 무디를 빙긋 웃고 걱정이 없습니다. 스텝들이 '아니 화내지 않습니까? 사실도 아닌 것을 비방하고 욕하는 저 사람들한테 할 말이 없습니까?'라고 하자 그때 무디 목사님은 '내버려두게나 저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지 나는 신문에 난 것보다 훨씬 더 악한 놈이거든'
그 날 밤 무디 목사는 집회에서 '나는 죄인이기에 하나님 품에 왔노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때 자기를 비방했던 기자들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나도 당신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겠다'고 하면서 주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었답니다. /할/
④인생을 사는 자세! 신앙 생활의 자세가 바로 되어야 복을 받습니다.
▶어느 마을에 젊을 때부터 백정노릇을 하던 지석돌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지만 백정이란 신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저자거리에서 푸줏간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젊은 선비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이 푸줏간에 들어왔습니다. 한 선비는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석돌아, 고기 한 근만 주라'고 하자 푸줏간 주인은 '알았습니다요.' 하면서 고기를 꺼내 아무렇게나 대충 잘라 주었습니다. 또 다른 선비는 '지서방, 나도 고기 한 근 주시게'라고 하자 이 푸줏간 주인은 '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하더니 고깃간에서 제일 좋은 고기의 부위를 큼지막하게 뭉텅 잘라 주었습니다.
이를 본 먼저 선비가 화가 나서 '야 이놈아, 똑같은 한 근인데 이 사람은 양이 많고 왜 내 것은 적으냐?'고 눈을 부라리며 따지자 그는 태연스레 '예 선비님의 고기는 석돌이 놈이 자른 것이고 이분의 고기는 지 서방이 자른 것이라 그렇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어떤 태도가 좋아야 합니까?
⑴예배드리는 태도가 좋아야 합니다. 시95:6-7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⑵말씀을 듣는 태도가 좋아야 합니다. 행10:33절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⑶헌금하는 태도가 좋아야 합니다. 대상29:14절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나이다."
⑷기도하는 태도가 좋아야 합니다. 본문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세리처럼 기도합시다! '하나님!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회개하며 고백하는 신앙 인들이 됩시다. 이 고백 속에는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나를 치료할 수 있으며, 나를 건지실 수 있으며, 나를 새롭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는 믿음이 깔려 잇습니다. /할/
▶무디 목사님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하시면서 그곳에서 전도 집회를 했습니다. 그 집회에 한 소녀가 참석했습니다. 이 소녀는 영혼의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를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예쁘지도 않고, 명성도 없고, 돈도 없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아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던 그 소녀가 그 집회의 마지막 날 무디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해 설교를 듣고 너무 감격해서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나오더니 이렇게 외쳤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부족한 모습 이대로 하나님 받아주세요!'
이때 달려나오는 소녀를 끌어안으면서 무디 목사님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이 딸을 이대로 받아주세요' 기도해 주었답니다. 그 날 그 소녀는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고 죄용서 하셨다는 해방감에 주 앞에 찬양과 감격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이 광경을 본 성가대에 해밀턴이라는 여자가 붓을 들고 작사를 했고, 그 옆에 무디 목사님과 평생 음악 목사로 동참했던 생키가 작곡을 붙여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그때 그 찬송가가 349장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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