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 대신에 기도하세요! (빌 4:4-9)
옛날에 어떤 할머니가 한평생 염려를 하며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는 날이 더우면 군고구마 장사를 하는 큰아들 때문에 염려를 하고, 날이 추우면 부채 장사를 하는 둘째 아들 때문에 염려를 하고, 비가 오면 짚신 장사를 하는 셋째아들 때문에 염려를 하고, 또 날이 맑으면 우신 장사를 하는 막내아들 때문에 염려와 걱정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다가 끝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죽는 순간까지도 '오늘 날씨가 어떠냐?'고 물어보고는 한숨을 푹 쉬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염려와 걱정을 하면서 살다가 죽어갑니다.
▶염려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건강 때문에, 물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또 가정 문제, 자녀 문제, 노후 문제, 사업 문제 등등' 여러 가지로 염려하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100일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염려하며 한숨을 쉽니다. '이 아이를 앞으로 무슨 대학을 보낼까?' 미리 가불해서 염려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마치 염려가 보물단지인 양 마음에 품고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염려를 강력하게 금하고 계십니다.
마6: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염려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므로 신경이 쇠약해지고 마음에 병이 생겨서 나중에는 큰 병으로까지 번지는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조지 뮬러' 목사는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 염려와 근심은 끝나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 신앙은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마6: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무슨 말씀인가? '새를 누가 먹이느냐? 들에 핀 백합화에게 누가 거름을 주느냐? 그런데도 잘 먹고 잘 자라고 있지 않느냐?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들은 공중에 새들보다 들의 백합화보다 엄청나게 존귀한 자가 아니냐? 내가 다 책임져 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음성입니다. /믿/
염려는 '쪼갠다.'라는 말과 '마음'이라는 말의 복합어로서 '마음을 쪼개는 것'을 말합니다. 당대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은 그의 잠17:22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심령의 근심'은 '깨어진 영'을 의미하는데 '깨어진 영'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뼈는 온 몸을 지탱하게 하고 신경과 근육과 함께 운동하고, 골수에서는 혈구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뼈가 마른다는 것은 만병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서 근심하고 염려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염려하지 말고 염려 대신에 기도하라'고 본문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제목소개!▶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바른 자세를 몇 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삶의 자세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 학생이 공부하는 자세,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자세,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며 이 땅을 바르게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군인의 자세가 있고, 학생의 자세가 있고, 신앙인의 자세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자세는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신앙의 자세 몇 가지가 나옵니다.
1. 기뻐하며 살라!(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기에서 '기뻐하라'고 두 번이나 말한 것은 '강조법'입니다. 그만큼 기뻐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처럼 기쁘게 살 수 있고 즐겁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문제는 이 세상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염려와 근심이 가득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항상 웃으며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 의미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살라'는 것은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고, 낙관적인 자세, 소망 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불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기쁨, 신앙적인 기쁨입니다. '항상'은 상황에 관계없이 주안에 있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연속적인 기쁨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던지 기뻐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①'주안에서' 사는 사람과 '주 없이 사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주안에서 사는 사람의 특징은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주안에서 사는 사람은 '같은 환경, 같은 시대, 같은 조건'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같은 사업, 같은 일'을 하면서도 목적이 다릅니다. 바울은 '살던지, 죽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안에 살면 '같은 돈을 벌면서도 목적이 달라집니다. 같은 공부를 하면서도 추구하는 목적이 다릅니다. 같은 예술을 하면서도 뜻하는 바가 다릅니다. 같은 음악을 하면서도 그 목적이 다릅니다.'
세상에서 주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삽니다.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삽니다. 자기의 명성을 높이기 위하여 삽니다. 모든 영광을 자기가 받으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하는 모든 것은 오직 자기 영광에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며, 이름을 날리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다릅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도 다릅니다. 예술을 하는 목적도 다릅니다. 음악을 하는 목적도 다릅니다.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위하여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들어내기 위하여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합니다. 그러기에 육신의 양식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영의 양식을 먹고삽니다. /할/
▶오래 전에 한남동에 어느 돈 많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주머니를 가정부로 두고 있었는데 이 부자 사모님은 돈 문제도 있었지만, 가정문제도 복잡했습니다. 항상 큰 소리로 다투고 싸우다가 주먹이 날라 가고 밥상이 엎어지고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 그 사모님은 세상을 온통 염려와 근심 속에 살면서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고, 술을 마셔야 잠을 자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부 아주머니는 언제나 편안하였고, 늘 찬양하며 명랑했습니다. 안방은 지옥이고 골방은 천국이었습니다. 가정부는 평안 가운데 살고, 주인은 항상 염려와 근심 가운데 삽니다. 주인은 술에 살고, 가정부는 찬송에 삽니다.
어느 날 주인은 '나는 내 집에 살아도 기쁨이 없는데, 아주머니는 남의 집에 살면서 늘 기쁘니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 안에 살기 때문에 늘 기쁩니다.' /할/
주안에 사는 사람은 남의 집 가정부로 있어도 늘 행복합니다. 기쁘게 사는 비결이 바로 주안에 사는 비결입니다. /믿/
우리가 사실 자신을 바라보거나 나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을 바라보면 기뻐하기보다는 한숨만 나올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주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가 우리들의 삶의 일 번지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 번지가 어디입니까? '주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곳은 '주님의 승리가 있는 곳, 주께서 이미 확보해 놓으신 영광의 고지'입니다. /믿어지면 아멘!/ 그분은 능력이 무한하신 엘로힘의 하나님이십니다.
②믿음의 사람들은 생각이 중요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움직이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움직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항상 좋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 나는 천국 간다.' 어디 그뿐입니까? ▶주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지금 안 되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갑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
▶또 주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막9:23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그렇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기뻐해도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일이 잘 안 되어도 기뻐하고, 일이 잘 되어도 기뻐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지금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곳은 차가운 감옥 속입니다. 그런데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상황이 좋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비결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지금 감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감옥 문을 열었습니다. /할/
그리스도인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을 열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하박국 선지자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합3:17-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안에 있는 자의 고백입니다.
③우리가 누구인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후6:10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기뻐하는 생활은 주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뻐하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④그리스도인에게 몇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⑴회개의 의무가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⑵성결의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⑶봉사의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봉사하라" ⑷사랑의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⑸기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라" ⑹전파의 의무가 있습니다.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는 '항상 기뻐하라'고 했으니 기뻐할 의무가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 맨 밑바닥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안내하는 사람의 말이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했습니다.
⑤왜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까?
잠17: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기쁨은 좋은 약입니다. 인삼, 녹용도 좋지만 기뻐하는 마음은 몸에 유익합니다. 값비싼 보약 잡수시는 것보다 기뻐하는 것이 몸에 더 좋습니다. 마음이 기쁘면 소화도 잘 되고 혈액 순환도 잘된다고 합니다. 요샛말로 마음이 기쁘면 우리 몸 안에 엔돌핀이 많이 생겨서 몸의 웬만한 병이 저절로 낫게 됩니다.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주부가 기쁜 마음을 가지면 살림을 잘 합니다. 학생의 마음이 기쁘면 공부가 잘됩니다. 교사의 마음이 기쁘면 가르치기를 잘합니다. 군인의 마음이 기쁘면 국토방위를 잘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기쁘면 전도를 잘합니다. 봉사도 잘하게 됩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2. 관용을 베풀며 살아가라! 그래야 기쁨이 넘칩니다(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너그럽게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알고, 용서해 줄줄 아는 것이 관용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귀한 덕목입니다. /믿/
그런데 용서란 강한 자 만이 할 수 있고, 이긴 자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원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본인에게 손해입니다. 미움은 독약과 같아서 속에 품고 있으면 결국 자기가 죽습니다. 여러분, 지금 행여나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관용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잘해주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말합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도, 내게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도, 심지어 독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눅6:27-28절에서 본문보다도 훨씬 높은 차원의 용서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는 말씀보다도 훨씬 구체적이고 차원이 높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건, 내 맘에 들지 않은 사람이건, 관계없이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의 사랑을 확인해 봐야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마6:15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 남을 미워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며 삽시다. 이것이 관용의 삶입니다. /아멘!/
3. 염려대신 기도하며 삽시다(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 '아무것도'라는 말은 '단 한 가지조차도'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이 단 한 가지라도 염려하거나 근심하거나 초조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입니다.
①염려는 헬라어로는 '메릿 네오'이고, 영어로는 '워리'입니다. 몇 가지 뜻이 잇습니다.
⑴'걱정한다, 근심한다, 마음이 찢어진다. 나누어지다, 길옆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⑵'물어뜯는다.'는 무서운 의미도 있습니다. 또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는 가공할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질식하게 하고 숨을 못 쉬게 하는 것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 놓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⑶염려란 또 '마음이 나누어지다'는 뜻도 있습니다. 약1:8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염려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마음에 평안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감정을 나눔으로 감정으로 하여금 안정을 잃게 합니다. 염려는 이해를 나눕니다. 확신이 없이 흔들립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판단의 기준이 나누어집니다. 결심의 가능을 나누어 놓습니다. 그러다가 염려가 누적되면 '정신파탄에, 생활파탄, 인생파탄'으로 이어집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또 염려는 각종 질병을 유발시킵니다. 고혈압, 심장병, 신경통, 위궤양, 소화불량 등등,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 염려는 육신 적인 것이라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염려는 영혼의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지나치면 기도가 끊기고, 찬양이 멈추어집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풍비박산이 됩니다. 그러면 누가 손해입니까? 우리가 손해입니다. 믿음이 풍비박산이 나면 누가 좋아합니까? 사단마귀가 좋아합니다. /믿/
노벨의학상을 받은 '카렌'박사는 '염려와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고 했습니다.
②그렇다면 염려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벧전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할/ '맡겨 버리라'는 말은 '던져버리라'는 말입니다. '권고'는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성경학자는 신구약 전체를 연구하다가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는 말씀이 366회나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연구하다가 "아하 1년이 365일이니까 1년 내내 하루같이 근심하지 말고 살라"는 말씀이구나 생각했는데, 왜 366번을 말씀하셨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생각하고 연구하다가 전광석화처럼 깨달음이 왔습니다. '4년마다 하루가 더해지는 윤년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그 하루까지도 너희 믿는 자여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구나.' /할/ 얼마나 큰 관심이요, 돌보심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시는 분이십니다. /믿/아멘!/
③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1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주석가 헨드릭슨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는 것을 그만 두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주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지 말 것과 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깊게 보면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명령이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만약 근심하지 말라는 명령만 있고, 다음 명령인 나를 믿으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별로 의미가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면 근심이 없어진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생애 속에 보면 근심하는 자들에게 안심을 주신 사건들이 많습니다. 마14:27절을 보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고생하며 근심하던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이 일어나자 파도보다 더 많은 근심과 불안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로서는 파도 그 자체보다 불안과 걱정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그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여기서도 '안심하라'고만 말씀하셨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위로의 말씀 정도로 밖에 생각이 안 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니 두려워 말라!'는 즉 '나다! 내가 해결한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막5:36절 이하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슬픔과 절망 속에 빠진 야이로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두려워 말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만, '믿기만 하면 네 딸이 살게 된다.'는 말은 창조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믿/
④여러분, 근심 걱정 염려와 낙심과 절망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을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믿는다는 것은 맡긴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맡긴다는 것을 설명한다면, 목적지를 위해서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비행기나 배를 탄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비행기 안에 배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배가 항구를 떠나는 순간부터 나는 비행기나 배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비행기나 배가 가는 곳에 나의 목적지에 가게 되고 나 자신의 방법은 유보되고 조종사나 선장에 의해 가게 됩니다. '나를 맡기는 것' 이것이 바로 근심에서, 절망에서, 낙심에서 일어서는 비결입니다. /믿/
▶6절에서 '염려대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 같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들이 처해 있는 환경을 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단순히 형식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식도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역사 하는 힘이 있습니다. /믿/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큰 문제를 만나고, 어려움에 닥쳐도 염려 대신에 먼저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
세상 사람들은 큰 문제와 어려움이 닥치면 먼저 염려부터 시작합니다. 걱정하고, 근심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수단을 동원하다가 안 되면 실망하다가 자살까지 강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문제라도 먼저 기도하면서 기도로 행동하고, 기도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라도, 어떤 사건이라도 그 문제의 근원과 과정과 결말까지 다 아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로 보고하고, 기도로 의논하고,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시편에 보면 '날마다 우리 짐을 져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고, 마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시55: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할/
▶우리 모두 세상 염려 근심 걱정 우수사려도 주님께 맡기십시다. 쓰레기를 제때 안 치우면 어떻게 알았는지 똥파리들이 윙 윙 하면서 날아와 들 끊게 됩니다. 게다가 구데기 선생까지 까놓습니다. 그래서 더욱 지저분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염려와 근심의 쓰레기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 속에 그냥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똥파리 같은 사단 마귀가 달려들어 속을 썩이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어서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바알세블'이라는 우상 귀신의 이름이 나오는데 바알세블의 원어는 '똥파리'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염려를 맡기는 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봉투에, 은혜의 봉투에, 걱정과 염려의 쓰레기를 담아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맡길 때, 기쁘게 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이 염려의 쓰레기 맡기를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맡기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도하되 간구로 하라'고 말합니다. '간구'라는 말은 '간절하게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되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큰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주님 앞에 간절하게 매달렸던 사람들입니다. 미지근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매달렸고, 뜨거운 믿음으로 매달렸습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시며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할/
그 다음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큰 문제 큰 사건을 만나도 염려대신에 감사로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감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은 사단의 마음을 움직이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것에 감사합시다. 천국백성 된 것에 감사합시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속에 산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하십니까? 큰 오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축복 자입니다.
⑤'감사함으로' 기도한다는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시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간구 기도는 많이 하면서도, 감사 기도에는 인색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⑥왜 염려대신에 기도해야 하는가?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니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란 '좋은 일, 좋은 현실, 좋은 길, 좋은 생활, 좋은 환경'입니다. 그리고 '좋은 선물, 좋은 은사, 좋은 달란트, 좋은 재능'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무기입니다.
누가 기도합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언제 구합니까? 문제가 있을 때, 필요할 때 구해야 합니다.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없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믿음도 구하고, 물질도, 건강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구한다는 말은 '간청한다, 부르짖는다.'는 말로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누구의 약속입니까? 주님의 약속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문이고, 그 다음은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찾으면 만날 것입니다.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찾으라'는 말은 잃어버린 것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추구하고 노력하라, 목표를 정하고 나가라는 말입니다. 탐구자처럼, 구도자처럼, 개척자처럼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하고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찾지 않는 사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찾는 사람이 만나지, 찾지 않는 사람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렘29;12-13절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오다가다 그냥 눈에 뜨여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힘을, 전력을 다해 본격적으로 찾아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문을 두드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구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찾는 것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닫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문이 닫혔을 때, 막 두드려야 합니다. 문은 언젠가는 반드시 열립니다. 문은 열고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 놓았습니다.
⑦그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하면'이라는 접속사는 그 약속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 대신에 기도합시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에 평강으로 채워 주십니다. /아멘!/
▶한 노교수가 어떤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제자는 '첫째가 건강이고, 둘째는 사랑이고, 셋째는 물질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재능도 있어야 되고, 권력도 있어야 되고, 명예도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노 교수는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네. 자네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없네. 마음이 평안해야 몸도 건강하고, 사랑도 할 수 있고, 물질도 쓸 수 있고, 권력도 보람되게 사용하고, 명예도 의미가 있는 거라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채우고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채우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을 '근심 충만, 걱정 충만, 미움 충만, 시기 충만'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안됩니다.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기쁨으로 채우십시오, 관용으로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평안으로 채우십시오, /할/
4.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며 삽시다(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상당히 많은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말씀입니다. 8절의 말씀의 핵심은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것들은 앞에 있는 것, 즉 사람들 앞에 진실하게 살았던 일,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았던 일(경건), 옳게 정결하게 살았던 일, 사랑을 주며 살고, 받으며 살았던 일, 그리고 덕을 세우며 산 일과 무슨 기림이라고 했는데 인간적으로 볼 때, 특별하게 뛰어난 자기의 재능을 말합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갈라집니다. /믿/
눅6:45절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내 마음속에 무엇이 가득한가에 따라서 내 말이 달라질 수도 있고, 행동이 달라질 수도 있고, 삶이 달라질 수도 있고,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좋은 일, 아름다운 말만 생각하며 살기로 결심하는 자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배운 대로 행하십시다. 받은 대로 행하십시오, 들은 대로, 본대로, 행하십시오, /할/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또 듣는 것도 중요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이요, 행하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알기는 많이 아는데 실천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대로 행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고, 복의 근원으로 세웠습니다. '복의 근원'이란 말은 '샘 줄기의 복'이란 뜻입니다.
신앙은 순종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믿/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면 어떻게 됩니까? 9절 하반 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능력자고 어떤 사람이 축복 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입니다.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더니 그의 생애가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과 함께 하였더니 그의 생애가 형통했고, 100배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염려대신에 기뻐하며 살고 관용을 베풀며 살고, 염려 대신에 기도하며 살고,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며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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