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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을 잠재우신 예수님! (막 4:35-41)

by 【고동엽】 2022. 2. 6.

풍랑을 잠재우신 예수님! (막 4:35-41)

 

신앙에는 삼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받는 단계'입니다.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이 단계는 '주시옵소서!' 달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둘째 단계는 '감사의 단계'입니다. 받은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단계입니다.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주신 은혜와 축복에 감사해서 '주님 감사합니다!' 기도하게 되고 찬양하게 됩니다.
셋째 단계는 '드리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감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단계입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생명을 드리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물질을 드립니다. 이 단계까지 와야 축복을 더 받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드릴 때 축복을 더 받기 때문입니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할/ ◀제목소개!▶

 

갈릴리 바다에는 예측할 수 없이 큰 광풍이 휘몰아쳐 올 때가 많습니다. 이 풍랑은 바다가 지중해 수면보다 약 200m아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헬몬산에서 요르단 계곡 쪽으로 이상 기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이 바람이 광풍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바다를 세상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도 역시 큰 광풍이 있습니다. 전쟁의 풍랑이, 기근과 재난의 풍랑이 있습니다. 질병의 풍랑과 파산의 풍랑도 있습니다. 우리는 6.25라는 민족의 풍랑을 만나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민족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풍랑이 지나가고 또 휘몰아쳐 옵니다. 성경 속에도 어려운 풍랑이 사람들에게 찾아온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욥기 서에 보면 욥의 가정에 뜻하지 않은 큰 풍랑이 찾아왔습니다. 열 자식이 하루아침에 떼죽음을 당했고, 재산은 하루아침에 약탈당했고, 건강하던 몸에는 악창이 생겨 잿더미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일생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죄 없이 노예로 팔려갔고, 죄 없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다윗 역시 뜻하지 않게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풍랑을 겪어 본 사람들은 풍파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것인지를 잘 압니다. 병상에 누워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건강의 귀중함을 알고,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에 큰 풍랑을 겪으며 온갖 처절한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안정된 생활이 얼마나 귀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 안정을 원합니다. '가정의 안정, 사업의 안정, 경제적인 안정, 나아가서 정치적인 안정, 세계적인 안정'도 바라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오래 전에 MBC에서 <엄마의 바다>라는 드라마를 했었습니다. 행복했던 한 가정에 남편이 죽자마자 회사가 부도가 나고, 대궐같이 큰집이 경매를 당해 자식들을 대리고 남의 집 셋방으로 들어가고,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 어머니가 세상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이야기를 다뤘던 이야기입니다.
세상 바다에도 수 없이 많은 광풍이 몰아쳐 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일생동안 한 번도 인생의 풍랑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90: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고백했으며, 시인 '칼봇제'는 <저 산 넘어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아 님 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 왔네> 그렇습니다. 마치 바다의 풍랑이 그칠 날이 없듯이 우리들의 인생의 바다에도 풍랑이 끊임없이 휘몰아칩니다. 그래서 '세상은 고해'라고 합니다.
문제하나를 해결하고 보면 어느새 다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갈수록 태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참 평안을 맛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이 세상에는 참다운 평안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 평안은 어디에 있을까요? 참 평안은 인생 바다 폭풍 속에서도 예수가 주는 평안히 참 평안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얻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평안이요, 믿음으로 얻는 은총입니다.
요14:27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 본문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35절부터 시작합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이 날은 어떤 날입니까? 예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날이요,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한 날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마지막에 결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고, 하나님나라의 비유에서는 작은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쉬는 나무가 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다 마치신 후 때는 저녁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36절에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배에 타고 계십니다. 그런데 37절 보시면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38절,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고물이란 배의 뒷부분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주무셨다는 표현은 여기만 나옵니다. 몹시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인 제자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방법과 수단을 총동원해서 그 풍랑과 싸워 봤지만 더 이상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배가 물 속에 가라앉을 절대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때는 캄캄한 밤중에 돌풍이 휘몰아 왔으니 제자들은 이제 절망적 환경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놀란 제자들이 잠자는 예수님을 황급하게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다른 복음서에는 "어찌 믿음이 적으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향한 책망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향하는 책망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 바다를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광풍을 만났을 때, 절망하고, 탄식하고,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모와 형제와 이웃을 얼마나 원망했습니까? 그런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왜 믿음이 없느냐?"고 나무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날 갈릴리 바다에는 풍랑이 일어나서는 안 될 조건들이 있습니다.

 

2. 풍랑이 일어나서는 안 될 조건이 무엇입니까?

①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 풍랑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명하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고 건너가다가 풍랑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 명령의 반대방향으로 가던 길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는 길인데도 풍랑이 온 것입니다.
구약의 요나처럼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는 '건너편으로 함께 가자'는 말씀에 순종하고 떠났는데 시련이 닥쳐온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 인들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잘 믿는데 시련이 오고, 실패가 옵니까? 왜 고통과 슬픔을 당해야 합니까? 왜 말씀대로 살고 주의 뜻에 따르려는 사람들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합니까? 왜 예수 믿는데 일이 잘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불교는 그것은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어떤 원인 때문에 오늘 당면한 결과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한 이 고난과 시련은 묵묵히 감내하고 참노라면 먼 훗날 다시 환생할 때 보다 나은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시련과 고통, 슬픔과 절망과 좌절, 실패의 쓰라림 속에는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이 분명히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숙명이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포자기하며 인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당면한 고통과 실패와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을 발견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기도로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왜 시련이 오고, 풍랑이 오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각 개인의 형편과 믿음과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메투헨리'는 '하나님의 전통에는 여러 가지의 화살이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그릇된 길을 막아 주시기 위하여, 때론 잘못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신앙이 자라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나타내십니다.
그 뜻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한마디로 축복을 받게 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뜻을 모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신앙의 손해를 보게 됩니다.
시119:67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욥은 고난 뒤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42: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②안전하게 배를 타고 갔는데 풍랑이 왔습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들입니다. 노를 젓는 일에도 배타랑 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가 그다지 겁나는 곳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저들이 주름잡고, 지배하던 바다 앞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배를 탔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아무 걱정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잡담을 나누며 노를 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풍랑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노 젓는 기술은 자신의 능력을 의미하고, 배는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세상적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도 망하는 사람 부지기수입니다. 제 친구 중 한 사람은 건강을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와서 병원에 진찰을 받았는데 온 몸에 암세포가 꽉 찼다고 합니다. ▶믿었던 건강에 이상이 온 것입니다. 믿었던 사업이 금이 갑니다. 의지했던 그 어떤 것들이 기초부터 흔들립니다.
여러분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던 제자들이 그들의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노를 젓고 달려갔지만 광풍을 만나 그들은 두 손 번쩍 들었습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엄밀히 자기 자신도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못됩니다.

③주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었는데도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이유는 저들이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보다, 배를 타고 갔다는 사실보다, 저들이 어부출신이고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즉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었는데도 풍랑을 만났다는 것은 해석하기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멀리 계셨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그것도 조그만 공간 안에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이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셨다'는 단순한 행동 자체보다는 '어떻게 모셨느냐?'의 신앙 자세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한 방 안에 들어 누워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고, 같은 버스, 같은 좌석에 앉아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서울에 있고, 한 사람은 미국에 가 있어도 그리워 견딜 수가 없고 밤잠을 이룰 수가 없어 상사병이 나고 하루에 두 번씩 편지를 쓰고, 그래도 모자라서 국제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쪽이 참된 만남의 관계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남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⑴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작년에 보고 금년에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이런 정도의 인사를 나누는 만남은 10년을 만나도 겉 핥기 식의 만남입니다. 거기엔 감동도, 생명도, 정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⑵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부부의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모든 것을 서로 다 주고받는 것이 부부의 원리이고 생활인 것처럼 우리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그 분은 나에게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바울은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런 주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대문 밖에 모실 수도 있고, 현관에 모실 수도 있고, 안방에 모셔 놓고 푸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심은 제자들과 같이 풍랑을 만날 수밖에 없는 모심입니다. 그러나 제일 좋은 자리는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다스리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이것이 주님을 참으로 모신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었기에 제자들은 주님 앞에 "믿음이 적은 자여, 믿음이 없는 자여!" 꾸중을 들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림의 성도들은 주님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바로 모시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풍랑과 광풍이라도 그 속에 해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3. 풍랑은 누구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풍랑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마8:23-24절 봅시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줄 압니다. 잔잔한 인생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풍랑은 누구에게나 다 옵니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 삶 속에 풍랑이 올 때는 사정없이 옵니다.
시10:1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44:22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잊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셨나이까?"
인생의 풍랑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때로 풍랑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풍랑이란 만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풍랑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풍랑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 이것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성숙하느냐? 이것을 내가 어떤 방식으로 대항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풍랑이 내게 없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인생살이입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풍랑이 자기 인생에게 있음을 압니다. 대신 그 풍랑을 '어떻게 극복할까? 이 풍랑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줄까?'를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풍랑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 풍랑이 올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절망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아니면 인생을 저주하겠습니까? '벤쟈민 프랭크린'은 '고통은 교훈을 준다'고 했습니다. 풍랑 속에 교훈이 있고 풍랑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풍랑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풍랑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풍랑과 고통 가운데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신32:10절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할/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애굽의 궁궐이 아닙니다. 풍랑과 광풍이 몰아치는 광야였습니다. 모세는 40이 될 때까지 애굽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문과 리더쉽을 터득했습니다. 행7:22절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더라"고 증거 합니다. 그는 명성을 떨쳤습니다. 자신만만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프스'에 의하면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가 돌아올 때마다 그의 이름은 애굽 백성들 사이에서 칭송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탁월하고 유능할 때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광야 40년 동안 고난과 고통의 길, 풍랑의 길을 걷게 하신 후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광야와 풍랑을 지난 후 모세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기적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기도로 아말렉을 무찌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나타난 축복입니다. /믿/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편안함보다 성장에 있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키십니다. 고난은 반듯이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어느 권사님이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동네 건달들이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권사님을 놀려주려고 보자기에 떡을 싸서 집안에 던졌습니다. 기도하다가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마당에 무슨 보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보니까 속에 떡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권사님은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떡보자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기하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밖에서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달들이 권사님 앞에 나타나서 "그 떡은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던진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마들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도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섭리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만선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고 불행하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마저 잃고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배가 파선되어 삼부자는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뱃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을 때 갑자기 작은 불빛 하나가 보이더니 점점 커져서 불기둥처럼 솟아올랐습니다. 그들은 불기둥이 보이는 곳이 바로 육지라는 판단 아래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부인이 울먹이며 집이 몽땅 불타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이들 삼부자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육지를 찾지 못해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성장을 위해 슬픔이 필요할 때 기쁨을 보내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눈물이 필요할 때 환희를 보내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이 필요할 때 편안함이 아니라 고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산이 높을 수록 골짜기는 깊습니다. 여러분들이 큰 축복의 산에 오르도록 하나님의 깊은 골짜기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을 때입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려는데 원주민들이 큰돌을 선교사님 가슴에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무거운 돌을 머리에 이기도 하고 가슴에 안기도 하면서 강을 건넜습니다.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무거운 돌을 안고 강 중간쯤에 왔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있었습니다. 만약 큰돌이 무게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프라카 원주민들은 무거운 짐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벼운 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편안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가 무거운 짐이 있고, 고통스러운 풍랑을 만나고, 눈물을 골짜기를 지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것이 불행하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고통과 풍랑 가운데에서 여러분을 성숙시키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풍랑이 몰아닥칠 때 두려워 말고 더욱 소망 중에 주님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4. 제자들의 문제도 오늘 우리들의 문제도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자 예수께서 일어나서 명령하시기를 "바다야 잔잔하라"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지금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원래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라 나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믿음의 결단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풍랑이 왔을 때 이 순간에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왜 제자들이 믿음이 떨어졌을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보았습니다. 물려오는 풍랑을 보았습니다. 풍랑을 보았기 때문에 두렵고 당황한 것입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 베푸셨던 기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능력이 생각이 난 것이 아니라 무서운 풍랑만 생각이 났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환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대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려울 때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시146:3절 "너희들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고통을 당할 때 폭풍우를 보지 마십시오. 폭풍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폭풍이 불 때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씨앗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나무만 심어나가면 됩니다. 믿음의 날개를 펴서 날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풍랑이 일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풍랑 속에 내가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사실 본문의 제자들은 풍랑을 만났지만 두려워하고 불안에 떨 자리가 아닙니다. 왜? 주님이 그 배에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배가 파선되면 자기들만 죽는 줄 알고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도 사랑도 못 믿었습니다. 만약 그런 믿음만 있었다면 그들은 그 밤에 그런 쇼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수없이 많은 풍랑과 역경을 당했으면서도 그에게는 항상 주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졌던 바울은 롬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만사형통이 있고, 환난 중에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할/아멘!/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절망적인 환경이라도 무한한 희망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 한 마디에 갈릴리 바다의 광풍이 평안해 졌습니다.
시46:1-3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큰 믿음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10년, 20년을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한배에 모신 예수님을 형식적으로 믿었기에 그들에겐 평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환난과 풍랑이 거세게 올 때, 두 가지 반응을 하는데 하나는 어떤 문제라도 믿음으로 담대히 맞이하면서 주님께 구하고 간구하는 신앙이 있는가하면 다른 하나는 문제 앞에 기도는커녕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는 백성의 행로에 홍해가 가로 막혀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이제 죽게 되었다고 좌절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모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출14:13절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믿음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그 바닷물 속에 원수들이 수장되어 죽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풍랑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고전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욥5:18-19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할/
우리는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역사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풍랑도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두려워 할 성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사랑의 언약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주는 평안은 풍랑이 없는 평안이 아니라 그 풍랑 속에서 얻는 평안이요, 이 세상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평안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실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도 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은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요16: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승리로 보장받는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배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풍랑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함께 풍랑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풍랑의 힘도 큽니다. 그러나 광풍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힘은 더욱 큽니다. '고요하라! 잠잠하라!' 예수님이 명령하시니 미친 듯이 불어닥치던 풍랑은 고개를 숙이고 명령대로 잠잠해졌습니다.
여러분,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힘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힘의 소유잡니다. 그 위대한 힘을 믿었던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힘이 왔습니다. 그는 골리앗 앞에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이 힘이 골리앗을 넘어 드렸습니다. 이 힘은 오늘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믿/

 

5. 예수님을 우리 배에 모셔야 합니다.

 

배는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⑴예배가 하나님을 모시는 현장입니다.
⑵기도가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개입시키는 통로입니다.
⑶순종이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방편입니다.
⑷감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시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믿음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은 '바다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 꾸짖는다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꾸짖으실 때 사용하셨던 단어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꾸짖으셨는데 그 단어가 귀신을 향하여 꾸짖으셨을 때 사용한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명하십시오, '내 가정아! 고요하고 잠잠할 지어다. 내 사업아 고요하고 잠잠할 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할/ 오늘 본문 속에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주님의 명령 한마디로 잠잠해지고 고요해졌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세상 바다에도 잠잠해지고, 고요해지고 평안이 있습니다.

 

6. 성경에는 풍랑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건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⑴요나가 만난 풍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일부러 니느웨 성으로 가서 저들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라고 하였으나,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내려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풍랑은 요나 자신이 '나로 인한 풍랑'이라고 스스로 고백한 사실(요1:12)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만난 풍랑이었습니다. 대부분 우리도 이런 풍랑을 종종 만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반역의 길로 행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이유 있는 풍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불순종하거나 반역의 길로 행할 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풍랑을 일으켜 흔들어놓아서 결국 회개시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⑵바울이 만난 풍랑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 심한 풍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행27장에 보면, 14일간이나 풍랑에 휘말려 바다 위에 떠돌아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 배에 탔던 276명이 거의 다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어 살 소망이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풍랑을 만난 이유는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의 말보다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믿고 가다가 만난 풍랑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조의 말보다 세상 말을 더 따르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⑶유다 백성이 만난 풍랑도 있습니다.
겔13:13-14절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퍼붓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어리로 무너뜨리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선민 유다가 세상으로, 죄악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당한 풍랑입니다.

 

7. 풍랑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⑴환난은 주님이 계셔도 찾아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에게 환난이 있어도 결코 실패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시34: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할/
⑵자신을 바로 알고 겸손하라는 교훈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제자들도 풍랑쯤이야 자신들의 힘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감당을 못하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는 환란을 통하여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⑶환난은 성도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죽음에 직면한 제자들은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부르짖는 마지막 기대였습니다. 환난을 만난 제자들에게 기도야말로 풍랑을 이기고 승리하는 절대적 무기였습니다. 시50: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⑷환난은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것은 곧 기도의 결과입니다. 기도의 응답입니다.
⑸환난은 신앙을 검증하는 통로입니다. 요셉은 17세의 청소년 때에, 형들의 시기질투로 애굽 상인에게 팔려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곳에서 성실하게 일하여 보디발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큰 시험이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축복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으며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성실하게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감옥에서도 형통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전화위복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약5:13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이는 '깨어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기도로 승리하는 귀한 성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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