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호 11:1-4)
우리는 또 다시 2006년도의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캐럴과 함께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 희망과 즐거움을 주는 명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트리, 카드, 산타클로스, 선물', 이런 것들은 모두 성탄절을 상징하는 것들로서 어른들은 물론이고 세계의 많은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꿈을 심어주고, 기쁨을 주고, 사랑을 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을 우리들이 크리스마스라고 부르는데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원래 영어로 Christ와 Mass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Christ라는 말은 물론 그리스도라는 말이고, Mass라는 말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미사'라는 말인데 이 말은 원래 '만남'이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래서 Christmas라는 말은 '예수와의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과 만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하늘과 땅과 인간과 인간의 시간을 서로 연결하고 이어주는 하나님의 입체적이고도 구속사적인 섭리가 들어 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이 지니는 신비입니다.
▶한마디로 성탄절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서 가장 큰 은혜는 당신의 독생자 외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건인데 이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기적이고 신비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그 큰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이 없고, 대가가 없는 무상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인간에게 베푸신 사랑의 극치'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과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인 '에로스'적인 사랑에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⑴예쁘고 가치 있는 것만을 사랑합니다. ⑵자기만족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⑶자기 성공과 자기 성취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적인 사랑에도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⑴예쁘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⑵자기만족이나 행복이 아닌 상대방의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랑합니다. ⑶상대방 속에 아름다움과 가치를 만들어 내면서 사랑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할 때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⑴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어디서든지 신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곳에 신이 머문다.'고 했습니다.
요일4: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느니라."
⑵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요일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또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께서 사랑을 베푼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일4:8절'하'반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공의, 거룩, 영원성, 불변성, 자존성' 등이 있는데 사랑도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제목소개!▶
1. 성경을 자세히 보면 도도하게 흐르는 몇 가지의 사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⑴경신사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웃어른을 공경하는 경장사상'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가정에서도 부모를 공경하고, 사회에서는 나이 많으신 분을 공경하고, 센머리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스승을 존경하고, 선배를 대우하는 이런 것이 다 '경신사상'에서 오는 정신입니다.
⑵애린사상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사상이 결여되면 종교는 거추장스러운 사치품이 되고 맙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정치, 경제, 봉사 그 어떤 것도 가치를 상실합니다.
특히 남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은 '애린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애린사상이 결여되면 의사와 환자는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운수업자는 사람을 짐짝 취급합니다. 요식업자는 돈을 벌기 위해 먹는 음식에 인체에 해로운 물질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⑶보은사상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일괄해서 흐르는 사상이 바로 이 '보은사상'입니다. 보은사상은 '은혜에 보답하고,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 오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께 순종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사상입니다. 이와 같이 '경신사상, 애린사상, 보은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이요, 도덕의 기준이 됩니다.
2. 그런데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이 사상을 버렸습니다(1-2).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은혜를 배신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압박과 설음 속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또 어린아이로 말하면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로 안아주고, 사랑의 줄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이 부를수록 멀리멀리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를수록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저와 여러분을 가리킴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여러분, 배신은 누가 합니까? 은혜를 입고, 사랑을 입은 사람이 배신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은혜를 베풀고 도와주었는데 그가 배신했다'고 절규합니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배신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믿는 사람이 배신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배신을 합니다.
로마의 시저가 '부르트스'에게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때 시저의 마지막 말이 '오 부르트스! 네가! 네가! 나를' 이것이 시저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합니다.
'부르트스'는 시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자입니다. 그런 자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치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믿/
①오늘 본문을 또 자세히 보면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신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여러 가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은 아내로, 하나님은 목자로 이스라엘은 양떼로, 하나님은 창조자로 이스라엘은 피조물로, 하나님은 주인으로 이스라엘은 종으로 혹은 그의 백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 1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스라엘은 사랑하는 아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한 구절 속에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신하지만 하나님은 넘치는 애정으로 이스라엘을 부르고 있습니다. '내 아들'이란 뜻은 '큰아들, 장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출4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애굽으로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는 말씀이었고, 또 하나는 지팡이였습니다.
본래 모세가 손에 들고 다니는 지팡이는 양을 치는 지팡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고 난 후부터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양을 치고 사는,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았던 가장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부터는 모세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능력과 재능과 시간과 소유들이 하나님의 것이 된 것처럼 우리 모두의 생명도 재능도 시간도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애굽으로 들어가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지팡이 외에 가서 해야 할 말씀도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요점은 ⑴애굽에 있는 이스라엘백성에게 가서 '그들이 너를 보고 하나님이 누구냐?'고 묻거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호12:5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표현은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나 역사가 우연이나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손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시며 '그의 기념칭호'라고 하였습니다.
⑵내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을 떠나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라. ⑶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며 내 장자'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출4:22).
이 말씀과 오늘 본문 1절의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아들이며 장자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고,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국가적으로는 나라를 세울 때부터이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철이 들기 전에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 어머니 태 중에 있을 때부터 아시고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부터 예정하시고 선택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것을 나기도 전에 벌써 하나님의 아들로 택하셨다니' 얼마나 감격적인가?
②저는 오늘 좀 더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은 먼 옛날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는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⑴애굽에서 불러냈습니다.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간이나 남의 나라 애굽에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종살이로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지나 힘으로는 해방을 생각하거나 탈출을 기대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나 질병의 문제나 절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에 보내어 어린아이와 같이 아무 힘이 없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저주에서, 질병에서 구원해 주신 것과 같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가리켜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말합니다. 애굽은 '세상, 죄악, 심판'을 상징합니다. '세상에서, 죄악에서, 심판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크게 아멘! /할/
우리가 이 사실을 알기만 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은혜 속에 살게 됩니다. /믿/ 왜 애굽에서 심판에서 불렀습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내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사랑 때문에 오늘 이곳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고,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주님께서 불려 주신 것입니다. /믿/
⑵걸음을 가르치셨습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한마디로 불러내서 새 사람 되라고 했더니 못된 짓만 되풀이하고 죄짓는 생활만 계속합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기서 '에브라임'은 유대민족을 가리킵니다. '걸음을 가르친다'는 것은 '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는 뜻이고, '팔로 안아 준다'는 것은 '용서하고, 위로하고, 보호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인내와 하나님의 인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답게 살아보라고 애굽에서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우리도 자식을 키웁니다만 자식이 못된 죄악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한번 두 번 용서해 주다가도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행위는 한마디로 괘씸죄 정도가 아니라 심판 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를 달래듯 걸음마를 가르치고 품에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여행길에 이정표는 바른 길을 인도합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은 보행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하나님이 직접 걸음마를 가르쳐 주시고 품에 안아 주신다고 합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야 제대로 배우게 됩니다. 좋은 동반자를 만나야 그의 가는 길이 행복합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우리의 인생길이 고독하지 않습니다. 또 좋은 교회를 만나야 신앙생활에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부모나, 부부나, 친구나, 형제나 교회도 다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내 걸음을 올바로 인도하시고 튼튼히 붙잡고 계시면 만사는 O K입니다. /할/
⑶고쳐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3).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은 약10개월입니다. 이 10개월 동안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다가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에 태어납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모태에 머무는 10개월 동안에 그 아이의 인격과 정서와 건강이 결정되어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태아교육이 관심분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10개월 동안 모태에 있던 생명이 세상에 태어날 때 3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⑴순산하는 경우입니다. 예정했던 날에 별 탈 없이 산모나 아이 모두 건강하게 해산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⑵난산하는 경우입니다. 수술하고 고통 끝에 해산하는 경우입니다.
⑶사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은 의학이 많이 발달해서 이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저 어렸을 때만해도 애 낳다가 산모가 죽는 일이 허다했고, 또 죽은 아이가 나온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경우는 엄청난 불행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보다 더 힘든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이 기간은 무려 20-30년이나 됩니다. 우리는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견디기 어려운 시련 등을 겪게 됩니다.
예를 들면 '실패, 사업의 부도, 이별, 질병, 사고, 죽음' 등등입니다, 저는 주위에 몇 몇 사람들의 건강 문제로 질병의 고통과 아픔을 실감해 봤습니다. 저와 같이 친했던 아저씨 되는 태용 씨도, 저의 고향친구인 대식이라는 친구도 먼저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천국에 못 갔기에 저 세상으로 간 것입니다.
여러분! 건강한 것, 그것이 큰 행복입니다. 축복입니다. 그런데 건강이란 유리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장담할 것이 못됩니다. 제 신학교 동기 하나는 '건강엔 자신 있다, 문제없다'고 큰 소리 치는 목사가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 병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건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③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저희를 고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쳐주신다는 말입니다. 즉 오늘날의 우리들을 고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고치실 때, 육체적인 질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까지도 치료해 주십니다.
▶마9장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친구 네 사람이 그를 들 것에 누인 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그때 주님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니 병상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모든 병의 원인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병에는 병원균이 있는 것처럼 죄는 모든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를 졌나?'라고 질문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인간세계에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롬6: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죄 사함과 고침 받는 것은 절대 불가결의 관계입니다.
⑵주님이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안심하시오'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은 고쳐 줄 수 있는 사람일 때만 가능합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뜻은 '내가 네 죄를 사해준다. 그리고 너는 새사람 되어 건강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되 전인격적인 치료를 해 주십니다. 육체는 건강한데 영혼이 병든 사람, 또 영혼은 건강한데 육체가 병든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영혼도 육체도 건강한 것이 우리들의 소망이요, 기도제목입니다. 우리 주님은 영혼도 육체도 다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믿/
▶출15:22절 이하에 보면,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광야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사흘 길을 헤맸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생명은 물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이 없다는 것은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최악의 고통입니다. 수르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은 앞으로 있을 40년 광야 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요,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토록 헤매다가 한곳에 이르러 물을 찾았습니다. 그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갈한 목을 적시기 위해서 모두가 물을 마셨으나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젠 전보다 더 큰 고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갈한 심령에 쓴 물이 들어가니 그들의 육체는 행군할 기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백성들은 탄식하고 원망하고 불평했으나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음성이 듣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령한 눈이 열이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그 나무를 던져 넣으니 마라의 쓴 물은 달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한 나무는 '마라의 인생도 치료'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은 '한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독생하신 아들이요(요3:16), 한 알의 밀알이요(요12:24), 유일한 이름입니다(행4:12). 우리의 삶 속에 이 나무가 던져지면 쓴 인생이 달아 지는 치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믿/
▶여리고의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많은 돈을 모았으나 그 심령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자신과 자기 가정에 모셨을 때 그 인생의 쓴 모든 것이 토설하게 되었고, 수가성에 다섯 남편을 거느린 여인은 세상 쾌락을 다 누렸으나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나고 쓴 물동이를 버리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 거듭나는 비밀을 깨닫고 쓴 율법의 바리새적인 삶을 버린 것입니다(요7:51).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가 들어오면 변합니다. 예수는 저와 여러분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여호와께서 어떻게 치료하십니까?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심으로 질병을 고치십니다. 말4:2절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라" 이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의 어두운 죄악을 '세상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치료하실 것을 내다본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④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고쳐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3).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기에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⑴하나님의 치료에 대한 인간의 무지입니다. 고침 받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은혜를 입고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그것은 엄청난 무지입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한 농사꾼이 시장에서 거울 하나를 사왔습니다. 이 농사꾼은 거울을 보고는 하도 신기해서 감추어 두었다가 심심하면 꺼내보고 웃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이 남편의 행동이 수상해서 장롱 속의 거울을 꺼내 보았습니다. 그러자 거울 속에는 웬 젊은 여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인은 시어머니께 달려가서 울며 말을 합니다. "어머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남편이 저 몰래 계집을 숨겨놓고는 밤마다 만나 속삭이지 않습니까?" 며느리의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거울을 받아들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방을 나서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바보 같은 녀석, 다 늙어빠진 할망구를 데려다가 무얼 하겠다고." 무지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브라우닝'은 무지를 '순수가 아닌 죄'라고 했으며, '셰익스피어'는 '무지보다 더 지독한 어두움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4: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자본이 없는 게 아니요, 기술이 없는 게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 알고 보면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생각이 부족해서 망하고, 정치적으로도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죄는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무식이다.' 알아야 될 것 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 당신에게 못을 박고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눅23:46). 다시 말하면 '저들이 그러한 악을 범하는 것은 무지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식의 소치입니다. 그런고로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엡4:18절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성경은 무지를 죄로 봅니다. 우리 모두 후히 주시고 꾸짖기 않으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⑵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고 건짐 받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상 앞에 쫓아갑니다. 한마디로 배은망덕입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이나 장로들 때문에 배신당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12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방나라인 '앗수르, 바벨론, 암몬, 애굽' 같은 나라들 때문에 걱정하시고 근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걱정거리였고, 그들 때문에 근심하셨습니다. 이유는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관심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육체의 모든 장기가 노장육부가 제대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믿/
▶사람의 위장 크기는 쌀자루나 드럼통 만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크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1500cc 정도의 용량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제한된 위장 속에다 허가도 없이 많은 음식들을 집어넣습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잠자기 전에 먹는 음식물이 몸에 아주 해롭다고 합니다. 이유는 제 주인이 주책없이 집어넣은 음식물을 소화시키느라 위장만 따로 밤새도록 노동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먹어 됩니까? 딱딱한 것, 맵고, 찬 것, 또 차갑고 뜨거운 것, 또 독한 술을 부어 넣습니다.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 일평생 계속됩니다. 그래도 그 위장이 구멍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밥 먹고, 물 마시고, 이 자리에 나온 줄로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위장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실 때, 그 위장을 지켜주시는 신비한 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육체도 치료하시고, 영혼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시103:3절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147:3절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할/ 오늘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심을 감사하십시다. /아멘!/
3. 그 큰사랑의 극치는 끝까지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여기서 우리는 이끌어 주시고 멍에를 벗겨 주시고 먹여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①끝까지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서부의 카우보이들은 야생마를 길드일 때 밧줄을 들고 다닙니다. 때로 그 밧줄은 채찍이 되기도 하고 올가미도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들고 계시는 그 줄은 사랑의 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요13: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가지 사랑하시니라."
요21장에 보면,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배반입니다.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것이 모자라서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한 마디 정도는 책망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를 전혀 묻지 않으시고 현재의 상태를 물으십니다.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고, "내 양을 먹이라"고 서슴지 않고 맡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들을 그 사랑의 줄로 이끄십니다.
'베이커'는 '사랑으로 이끌면 잔인성이 물러간다.'고 했고, '버튼'은 '제아무리 강한 밧줄도 실오라기 만한 사랑의 줄을 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들을 놓지 않는 견고한 사랑의 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바벨론의 포로에서 귀환시킨 하나님,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날에 큰 도움'(시46:1)이신 하나님이 항상 그들의 성전에 계시고, 하나님의 도성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의 성역으로 믿었는데, 그러한 모든 기대가 하루아침에 모두다 깡그리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든든히 믿었던 하나님의 도성과 성전이 쑥대밭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범죄 때문에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떠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애끊는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뒤뚱거리며 걸음마를 하는 어린아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뒤따라가며 가슴 조리는 부모의 심정으로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한발, 한발 걸음에 손뼉 치며 기뻐하는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보시며 기뻐 웃기도 하시며, 고난을 보시며 안타까워하시기도 하십니다. 왜일까요? 바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의 끈은 언제까지나 놓지 않고 붙들고 있습니다. /아멘!/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끌 때 달려와야 복을 받습니다.
▶저는 수백 마리의 비단 잉어를 키우는 연못을 구경한 일이 있습니다.
비싼 것은 30-50만원이 넘는답니다. 엄청난 돈이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때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는 시간이 되어 주인이 먹이를 던지며 잉어를 부릅니다. 수백 마리의 잉어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고, 먹이를 먹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쪽 구석에서 딴전을 피우고 있는 잉어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동무들은 한참 먹이를 먹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이놈들은 그곳에서 딴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먹이를 주던 주인이 "저놈들은 굶어죽어도 싸다. 오지 않으면 자기들만 손해지 뭐" 그렇습니다. 그놈들만 손해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불러 이끌데 달려와야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②멍에를 벗겨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레26:13절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종 된 것을 면케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희 멍에 빗장 목을 깨뜨리고 너희로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430년의 종의 멍에에서 속박의 멍에를 벗기시고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멍에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요, 행동의 제한을 받습니다. 주님은 마11:29절에서 "나의 멍에를 매고 네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수고와 고통과 질병과 절망의 멍에를 가지고 와서 교환 조건 없이 가벼운 것으로 교환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멍에를 벗고 자유인이 됩시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멍에를 벗으시고 주님께로 나옵시다. /할/
③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저희 앞에 먹을 것을 주셨노라" 이스라엘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셨습니다. 특히 만나는 매일 주신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 날의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양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육의 양식은 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목말라 죽지 않고 배고파 죽지 않도록 신령한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세상 것 다 가지고 누려도 하나님이 없으면 만족이 없습니다. 허무하다고 합니다. 많은 것을 움켜쥐었는데도 그 안에는 참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참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룰 때만이 가능합니다. 먼저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면 우리 영혼이 새로워집니다.
요삼1: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유는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있어도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의 질병으로 보고도 못 먹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방배동의 한 집사님의 아들은 어떤 사고인지도 모르고 지금 몇 달째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교통사고로 2년이 넘도록 식물인간으로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건강하고, 잘 먹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생명과 소유와 건강과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 복되고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건강 우리가 관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재산 관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사업 우리가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잠16: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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