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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잘 살았던 여인 다비다! (행 9:36-43)

by 【고동엽】 2022. 2. 4.

인생을 잘 살았던 여인 다비다! (행 9:36-43)

 

어떤 사람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지자 가짜 승려로 변장을 하고 집집마다 가게를 돌며 시주를 하고 있습니다. 승복도 사 입고 목탁도 구입을 했는데 문제는 시주할 때 외우는 주문이었습니다. 궁리 끝에 외울 주문도 만들었습니다.
어느 집 문간에서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주인 여자가 시주를 주기 위해 나와 보니 행색이며 외우는 주문이 가짜였습니다. 그래서 맞장구를 대꾸했습니다. "주나바라 주나바라" 주인 여자의 태도를 눈치챈 가짜중이 대꾸합니다. "가나바라 가나바라".
어느 유모어 책에서 빼낸 이야기입니다. 확실치 않은 믿음은 고백도 증언도 희미합니다. /믿음은 확실해야 합니다/
▶성경 고전2:14절 이하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 곧 '자연인':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자기 육의 탐욕을 위해서 살고 또 자기 육적인 것만 찾아서 구하고 그것 밖에 모르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 곧 성령이 없는 그리스도인: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교회에 나오고, 세례도 받고, 집사 직분까지 받은 경우인데 그 직분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날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나중에 알아보면 설악산에 가고, 어느 주일에 또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알아보면 제주도에, 그런가하면 어느 주일날은 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어떻게 보면 안 믿는 것 같고, 안 믿는 것 같은데 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쉽게 말씀드리면 믿기는 믿는 것 같은데 제 멋대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신령한 사람': 신령한 사람은 첫 번째로 말한 육에 속한 사람과 정 반대가 되는 사람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가르쳐 신령한 사람이라고 바울 사도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입니다. 다비다는 아주 신령한 성도로서 살아간 사람인데 그가 그만 죽고 맙니다. 그런데 그 죽은 다비다가 살아나는 기적이 본문에서 일어납니다.
40절 "베드로가-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할/

'기적'이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신기한 일을 말합니다.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엿새동안 천지만물과 인간들을 창조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기적 가운데 제일 큰 기적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은 것도 기적입니다. 100세의 남자와 90세의 여인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때 홍해 바다를 가르고 그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 또한 큰 기적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낮에는 구름이 덮히게 하여 불볕을 막아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을 세워 맹수들의 침노를 막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식량으로 만나를 주셨고 메추라기를 보내어 먹도록 하셨습니다. 반석을 쳐서 생수를 솟아나게도 하셨습니다.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기적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외에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선지자들의 삶 자체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도 기적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인간들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40일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주님 부활을 우리들의 지식과 상식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중에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셨고, 소경을 보게 하셨으며, 중풍병자를 걷게도 하셨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신 것 외에도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바람 부는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으며 물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에는 이와 같은 기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2,000년 기독교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와 같은 기적이 계속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계속 살아 계셔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불치병이 치료되는 것만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는 우리의 행위나 지식이나 경험이 하나도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이처럼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아 구원받게 되었으니 기적 가운데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도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에 우리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을 봅니다. ◀제목소개!▶

여기 본문을 보면 일생을 소리 없이, 아주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내실 있게 인생을 살아간 한 여인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여인이 살아간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형편없이 헝클어진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베드로가 '룻다' 라고 하는 곳에 전도를 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순회전도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초대교회 때에는 순회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김익두, 길선주, 이성봉 같은 부흥 사들은 그때 순회전도자들이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도집회를 가졌습니다.
베드로도 지금 순회 전도 차 룻다라고 하는 곳에 가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서 약 18Km 정도 떨어진 '욥바'라고 하는 곳에서 몇 사람이 다급하게 찾아 왔습니다. 와서 하는 말이 사람이 죽었으니 빨리 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합니다.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55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해안도시로써 현재 지명은 '얍보'로 부르는 곳으로, 이곳에서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곳입니다. 욥바와 룻다의 거리는 약 18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라고 했습니다. 유대 명으로는 '다비다'였고, 헬라 이름으로는 '도르가'라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제자란 단어를 썼습니다. 그만큼 바비다는 인정을 받은 여인입니다. 사실 '여제자'란 말은 성경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칭호입니다. 그는 평범한 성도로써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주님의 말씀 따라 산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본과 덕을 세운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 그렇게 살았던 믿음의 사람 다비다가 죽었으니 빨리 가서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일행을 따라서 급히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가 보았더니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정돈해서 다락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여러 명의 과부들이 모여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고 앉아 있었습니다.
▶나라마다 보면 이 장례 법이 각각 다릅니다. 아랍국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날로 모래 사막에다 장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어서 얼굴에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혀서 입관을 하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상반신을 내 놓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무지막지하게 21마디를 묶어서 입관을 한 다음 3일 후에 가서 장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전통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하루를 넘기지 않습니다.
행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을 때 곧 바로 메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뿐만 아니고 유대 법에는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덤을 스치거나 시체를 보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정돈해서 다락방에 놓고 울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다비다를 사랑했다는 이야기고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그 보다도 사람들의 이 같은 행동에는 거기에 하나의 열망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왕상 17장을 보면,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멀리 있던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그 죽은 아이를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가서 그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그 아이가 살아납니다.
또 왕하 4장을 보면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침상에 눕혀 놓고 간절히 기도해서 또 살려냅니다. 역사를 보면 이렇게 죽었던 사람을 다락방에서 살려냈던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다비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때의 그 사례들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미 죽은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씻어서 다락방에 갖다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룻다에서 순회전도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서 빨리 모셔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와서 보니까 여러 명의 과부들이 모여서 울고 있습니다. 이 과부들은 평소 다비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비다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안타까워하며 울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정겨운 광경입니까? 그런데 요즈음은 부모가 죽어도 애곡이 없고, 눈물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었을 때 이렇게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적으로 살아간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려준다는 것은 그만큼 그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우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울긴 우는데 모두 자신의 신세가 불쌍해서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초상집에 가시거든 우는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십시오. 들어보면 모두 자기 신세가 한스러워서 웁니다. 그렇게 해서 흘리는 눈물은 값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비다의 죽음을 놓고 동네의 과부들이 다 모여서 울고 있는 것은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이 과부들의 눈물은 그런 눈물과는 질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눈물입니다.
▶벌써 몇 년이 된 것 같습니다. 코미디의 황제로 불리는 이주일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많은 국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늘진 인생들을 많이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평소 '뭔가 보여주겠다'고 장담하더니 이주일 씨는 뭔가를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국회를 떠날 때 그는 의사당에 와서 코미디 한 수 배우고 간다고 했고, 폐암 말기에는 금연운동으로 많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월드컵 때에는 병든 몸으로 운동장에 직접 나가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축구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곳에 도착한 베드로가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죽어 있는 다비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0절을 보면 "다비다야 일어나라". 이 말은 아람어로 '달리다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막5장을 보면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가서 아이에게 말씀하시기를 '달리다굼' 하십니다. 그 말은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노니 일어나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다비다굼' 합니다. 그 말은 "주님이 일으켜 세우신다, 그러니 너는 일어나라" 그런 뜻입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다비다가 일어나 앉았다(40)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 분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이 다비다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애석해 하고 슬퍼했는데 그 다비다가 결국 살아난 것입니다. 그때 그곳에 모여 있던 과부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때 그 광경을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다비다를 보면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1.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폐일언하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36절을 보면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죽었을 때 그렇게 애석해 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비다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 그를 소생시킬 수 있을까?" 해서 사람들이 18Km나 되는 거리를 급히 달려가서 베드로에게 다비다를 살려 달라고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흐뭇한 광경입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의 맛입니다. 이것이 이웃이고 우정이고 사랑입니다.
사람이 이 정도로 인생을 살았다고 하면 그 인생의 이력이 얼마나 화려했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인생은 성공한 삶입니다.
사람은 죽어 보아야 그 인생이 성공한 인생인지 실패한 인생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사람들이 와서 별의별 아첨의 소리를 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은 죽은 날에 가 보아야 평가가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의 평가는 죽은 후에 내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전에 권좌에 앉아서 부귀 영화 공명을 다 누리고 아첨의 소리를 다 들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 세인들로부터 무서운 지탄을 받고 악평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전의 삶의 모습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권세자가 생전에 받는 칭송들은 진실이 가려진 가면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생전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불화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키다가 일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가면 사람들이 별로 애석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만큼의 시간을 살다가 가는데 그 시간 동안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고 가기 위해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수 맺고 살아가면 안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거나 불화를 안겨 주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탐욕으로 그 인생을 욕되게 해서도 안됩니다.
여기 이 다비다라는 여인은 성경에 가족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그도 역시 화려했던 여인은 못 되었을 것입니다. 유독 본문에서 과부들이 모여서 울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그 여인도 역시 과부였을 것입니다.
당시의 과부는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의 대표들이었고 가난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공스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예수의 여제자"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이 "도르가" 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암사슴 또는 새끼 양, 아름다운 눈"이란 뜻입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여인! ▶어떤 여인이 아름다운 여인인가? 얼굴이 예쁘고 팔등신으로 쭉 빠진 균형잡힌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인가? 물론 이런 여인도 보기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 여인이란 맑은 얼굴을 소유한 신앙의 선행을 베푸는 그런 여인을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3:3-4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심령이 썩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 주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을 가진 여인이 바로 다비다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이름 값을 하고 죽은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우리는 영광스런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래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2차 대전 말 인도에서 근무하는 '조셉'이라는 미국인 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진 갔다가 오는 중에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는 깊은 상처와 함께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조셉은 응급처치를 한 다음 자기 차에 싣고 급히 병원에 데려다가 정성껏 치료해 주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캘커타'에 공중폭격을 하자 군중들의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조셉과 그 아내는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 돌아오던 중에 폭도의 무리를 만나게 되었는데 조셉은 성난 군중들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키 큰 한 사람이 달려와 "이 사람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소리 지르면서 조셉과 그 아내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몇 개월 전에 깊은 상처를 입고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정말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는 것입니다. 다비다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입니다.
잠22:9절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2. 사람은 '베푸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의 집에 도착을 해 보니까 여러 명의 과부들이 울면서 보여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39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죽은 다비다가 가난한 과부들의 옷을 손수 바느질해서 만들어 입혔다는 말입니다. 죽은 다비다는 가난한 과부들의 옷을 손수 만들어 입혔습니다.
이때는 옷감이 굉장히 비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자 그 옷을 서로 차지하고자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렇게 옷감이 비쌌는데도 이 다비다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 지어주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들이 지금 죽은 도르가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멋이 있고 인간다울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이때입니다. 그 때는 주는 이에게도 받는 이에게도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삶의 값이 있습니다.
사람에 평생을 살면서 베푸는 삶이 없으면 자신이 어려운 일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겹게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만 풍요하고 만족하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함께 풍족하고 함께 만족해야 그것이 진정한 만족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먼저 찾아가 주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어려울 때가 되면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이고 우정이고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람 사는 것 대단한 것 아닙니다. '인생이 뭐냐?'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몰라도 좋습니다. 좀 가진 것 있으면 나누며 살고, 없으면 신세도 지고 사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나누어주었다고 해서 대단할 것 없고 좀 신세를 졌다고 해서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있으면 나누는 것이고 없으면 신세지고 사는 것이지 그렇다고 굶어 죽을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문제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누어 줄 줄을 모르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여기 다비다라는 여인은 5백억 이니 5천억이니 하는 그런 돈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도 모르고 세상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죽은 후 그의 죽음을 정말로 안타까워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울어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마음들 때문에 다비다라는 여인은 결국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광된 인생입니까?
여러분, 사람은 소시민으로 알차게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치게 허황하고 권위적이고 황당하게 살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고 실망을 안겨주게 됩니다. 조용하게, 그리고 삶을 진지하게 꾸려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런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몇 년 전에 어느 일간지에 한국의 부자들과 미국의 부자들을 비교한 기사가 났습니다. 그들의 차이점은 돈 쓰는 법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부자들은 자신들이 많은 이익을 얻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입니다. 대학, 사회복지재단, 연구 기관 등에 헌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부자들은 자기 재산을 사회환원이나 선한 일(공헌)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덜 내고 자기 자식에게 상속을 많이 할까 혈안이 되어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베풀고 나누어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잠19: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11:24절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이스라엘에 유명한 랍비 중에 한 사람인 '마이모니데스'는 구제하는데 8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제1단계: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억지로 주거나 주고 나서 후회하는 단계입니다. 마음으로 준 것이 아니라 손으로 준 것입니다.
제2단계; 즐겁게 주었지만 고통 당하는 사람의 아픔을 달랠 수 없을 정도로 조금 준 단계입니다.
제3단계; 즐겁게 알맞게 주었지만 달라고 할 때에 준 단계입니다.
제4단계: 즐겁게 주었고 알맞게 주었고 달라고 하기 전에 주었지만 주어야 할 사람 손에 쥐어 줌으로 받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제5단계: 즐겁게 주었고 알맞게 주었고 달라고 하기 전에 주었고 누구에게 주었는지 알지 못 하게 준 단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등뒤에다 호주머니를 만들고 돈을 넣고 다니며 어려운 사람이 꺼내 가게 하였습니다.
제6단계: 준 사람은 누구에게 주었는지 알지만 받는 사람은 누가 주었는지 모르게 준 단계입니다. 그래서 어떤 구제를 좋아하는 이는 배고픈 사람이 있다고 하면 몰래 담 넘어도 양식 자루를 던져 주고 돌아 왔습니다. 이것이 6단계입니다.
제7단계: 준 사람은 누구에게 주었는지 모르고, 받은 사람은 누가 주었는지 모르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는 '침묵의 방'이라는 방이 하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그 곳에 돈을 넣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 곳에서 가서 자기가 필요한 것만큼만 꺼내옵니다. 누가 넣었는지 모르고 누가 가지고 갔는지 모르는 방이라 침묵의 방입니다. 이런 단계가 7단계입니다.
제8단계: 미리 구제함으로 이 땅에 가난한 사람이 아예 없게 하는 단계입니다. 장사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유능한 사람에게 밑천을 대주어 사업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는 단계가 가장 고차원적인 구제단계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3. '좋은 이웃으로 살아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먼 사촌 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은 그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백만 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집사는 것보다 이웃을 사기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한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은 이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눅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참 이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고, 진정한 이웃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에게 선을 베풀어주고 그의 상처를 싸매 주고 돌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원수 그 이상의 관계였습니다. 조상 때부터 대대로 서로 불신하고 증오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관계를 깨뜨리려 이웃이 되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을 만나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좋은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선별하여 사귀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좋은 사람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누구를 도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좋은 이웃을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또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리고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도 복입니다. 만남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여기 다비다라는 여인은 세상을 참 초라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 하면 속옷 한 벌과 겉옷 몇 벌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유산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이웃들에게 아주 진실한 이웃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뿐 아니고 다비다라는 여인은 죽었어도 그곳에 제 2의 다비다가 있었고 제 3의 다비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다비다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베드로를 불러들여 다비다를 살려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이웃들입니까. 그것은 죽은 다비다가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이웃이 되어주니까 모든 이웃들이 다 좋은 이웃들이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도 감동하십니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것입니다.
왜 살려 주셨는가 하면 하나님도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어떻게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복잡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싸우면서 살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힘들게 살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불화를 일으키며 살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할 수 있으면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삶의 내용이고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일이나 안 좋은 일이나 그 소식이 안 퍼지는 것이 없습니다. 다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특히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이시고,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의 생활도, 영적인 생활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를 통하여 알려지는 소식이 세상이 기뻐하는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하여 들려지는 소식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사람이 많게 하는 소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다비다의 다시 살아남의 소식은 다비다 자신이 더욱 더 유명해지거나 그를 기도를 통하여 살려 낸 베드로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더 유명해진 것입니다.

 

4. 이 기적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①기적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에 보면 8년 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킨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본문 34절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할/
도르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36절에 보면 '여 제자'라 했습니다. 본문 40절을 보면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 후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행3장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40세 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킨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크게 놀라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태어난 후 40년 동안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환자를 일으켰으니 소동이 날 법도 합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된 것은 우리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권능 있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권세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병자를 일으켰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②기적은 말씀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말씀은 항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경 자체입니다. 성경의 기자들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기록케 하신 66권의 성경입니다. 그 성경을 차근차근 읽으셔야 합니다. 은혜스런 구절은 줄을 치고 읽으시면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그러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또 한가지는 주의 종 목사를 통하여 들려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설교입니다. 설교는 2,000년∼3,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말씀이 오늘의 상황에서 나에게 재해석되어 들려지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통하여 오늘도 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때 은혜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설교를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면 됩니다. 아멘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쉽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쉽습니다. 어렵게 하지 마십시오. 내 지식, 경험, 명예, 학식, 연령, 상식으로 하지 마십시오. 그저 주님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그대로 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이고 또 은혜 받는 비결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사업에, 가정에, 생애에 큰 기적을 주실 줄 믿습니다. 성림교회에 이와 같은 기적이 많이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각종 병든 자가 말씀을 듣고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각종 문제를 해결 받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직장문제, 가정문제, 이웃과의 문제, 사업의 문제, 결혼문제, 자녀문제 등등 어떤 문제이든 주의 이름으로 해결 받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런 육적인 문제 뿐 아니라 영적인 문제도 해결 받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할/

③기적의 결과가 중요합니다(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애니아가 병을 고쳤을 때, 죽은 도르가가 살아났을 때 이의 결과로 전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은 전도의 기회입니다. 내게 이루어진 기적을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으셔야 합니다. 내가 체험한 기적을 간증하십시오.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 하셔서 열매를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통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을 통해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오늘과 같이 모두 허황하고 분수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이 여인의 조용하면서도 내용 있는 삶의 모습은 신선 감을 줍니다.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줍니다. 이 여인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고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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