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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본 받는 성도가 되자! (빌 3:17-21)

by 【고동엽】 2022. 2. 4.

바울을 본 받는 성도가 되자! (빌 3:17-21)

 

기독교 2천년 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능력이 많았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나를 본 받아라'고 하십니다. 여기뿐이 아니고 고전11:1절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본받으라는 말은 모방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본 받느냐에 따라서 인생길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 내 풍속으로 보면 이 말은 좀 교만한 말 같기도 하고, 좀 지나친 과신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을 주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나를 본받으라는 식의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사도 바울의 심정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옥중(감옥)에서 밖(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지금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회적으로 굉장한 혼돈이 있었고, 신앙적으로는 이단들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때였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풍조가 교회까지 파고 들어오고 있었으며, 성도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생활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흔들림 없이 신앙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지침을 내려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제시해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하게 된 말이 '나를 본 받으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이 혼탁한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혼신을 다해서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으니 '그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말씀을 권면하면서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는 것은, ▶그의 권면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가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으며, ▶그의 애타는 심정을 나타낸 말로, 그 권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권면은 비단 그 당시 빌립보 성도들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믿/ ◀제목소개!▶

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아라!(17)

 

모든 동물 중에 흉내를 가장 잘 내는 동물이 있습니다. 원숭입니다.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잘 낸답니다.
밀림에서는 원숭이 사냥이 성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원숭이 사냥을 아주 쉽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
원숭이들이 잘 노는 나무 그늘아래 사냥꾼들이 둘러앉아 술을 나누어 먹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원숭이들 눈에 그렇게 재미스럽게 보인답니다. 원숭이들은 이 모습을 나뭇잎 사이에서 훔쳐본답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취한 척 비틀거리며 흩어집니다. 이 때 원숭이들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술좌석으로 우르르 모여듭니다. 방금 전에 본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주거니 받거니 영락없는 흉내를 낸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함정입니다. 독한 술을 의좋게 나누어 먹은 원숭이들은 단번에 취해 버리고 맙니다. 손발에 힘이 풀리고 기운을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때 여기 저기 숨어서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사냥꾼들이 나타납니다.
원숭이들은 무서운 사냥꾼들을 보고 나무 가지를 타고 달아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때문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얼씨구나 콧노래를 부르며 생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원숭이 사냥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물 중에는 원숭이보다 훨씬 흉내를 잘 내는 고등동물이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흉내를 내는데는 천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모방이라고 말합니다.
인류문화의 조류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 것도 그런 모방성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위대한 모방성을 갖고 있지만, 그 모방성이 모두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을 모방하느냐에 따라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 위대한 모방성으로 아담을 모방한다면 아담과 같은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훌륭한 모방성을 십분 발휘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모방하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 모방성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 성도들이 이 모방성을 최대한 이용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그 무궁한 약속의 보장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였습니다. 여기서 모방은 예수를 본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잘 따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가장 훌륭하게 모방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누구보다도 가장 훌륭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잘 모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한 바울은 17절 '나를 본 받아라'고 장담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에, 인간 바울을 먼저 따르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잘 모방하였으니 또 자신을 모방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잘 따랐기 때문에 모방의 훌륭한 모범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이요 세속적인 명예를 버린 사람입니다. 학벌과 문벌 그리고 자기 것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린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분 토와 같이 여긴 사람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런 세속적인 것들을 버리는데 모범이 된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인간적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달음질하고있는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한 것은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전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어떤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①바울의 예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본 받자!
우리도 이 신앙은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부활에다 신앙의 중심을 두었습니다.
고전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6:14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바울 사도는 십자가만 ▶믿고 ▶알고 ▶전하고 ▶자랑한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고, 능력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믿/

②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 생활을 본 받자!
롬14: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고전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③바울은 날마다 십자가 아래에서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전15: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날마다 죽어야 할 옛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면 그리스도가 죽고,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가 살고, 또 육을 죽여야 영이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도 날마다 십자가 아래서 죽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④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본 받자!
마16:24절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바울도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였습니다.
딤전1:15절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으며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자신을 부인하는 고백들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⑤남을 나보다 높게 여기는 것을 본 받자!
빌2:2-3절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형제들을 나보다 낫게 여김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⑥모든 사람의 종으로 살았던 것을 본 받자!
고전9: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누가 바울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의 지식, 그의 능력, 그의 믿음을 누가 따라갈 수 있습니까? 굉장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입니다. 한마디로 전도해서 생명을 살리겠다는 포부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⑦바울의 충성심을 본 받자.
충성이란, 시종여일하게 잘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변함 없이 끝까지 죽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바울은 일편단심 충성했습니다. 죽어도 살아도 주의 것으로 충성했습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 충성했습니다. 고전4:2절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⑧바울은 그의 사역에 성령이 나타나지 않을까 봐 심히 떨었습니다.
고전2:3-4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기독교 2천년 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도는 바울입니다. 바울을 빼놓고는 기독교를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신학노선을 따라가야 합니다. 바울의 과거는 우리의 현재요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 위대한 사도가 심히 떨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떤 이유는 무엇이었나? 바울은 그의 사역에 성령의 나타나심이 없을 까봐 떨었습니다. 설교하는 일에도 성령임이 나타나 주셔야 합니다. 심방하는 일에도, 기도하는 일에도, 전도하는 일에도, 그 어떠한 하나님의 일에도 성령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떨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떨어야 합니다. 내가 드리는 이 예배에 성령이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예배뿐만 아니라 기도도, 찬양도, 봉사도, 헌신도 성령이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은 지정의에 영이십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대하지 아니하면 떠나가시고 맙니다. 성령임을 모셔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요즘 신앙생활 속에 성령의 나타나심이 없어도 떨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싸움, 지식다툼, 권력다툼, 사상 논쟁이 심합니다. 그 결과 인간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불안과 공포와 초조입니다. 평안히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뗍니까? 돈 때문입니까? 권력 때문입니까? 안됩니다. 성령이 나타나지 않을까 봐 거룩한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덩어리였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고(마1:18-20),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날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고 요1:32절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 날을 말씀하셨습니다(행1:1-8). 그 날은 성령세례를 받던 날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3년 반 동안 배웠고, 부활 후에도 40일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그들에게 임한 성령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구원받는 성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날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날이 오순절(행2:1-4) 성령의 불 세례를 받던 날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구원받는 세례이고, 그 날에 성령 불 세례는 사역세례입니다.
이 불을 받아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바울이 이 불이 임하지 않을까 봐 심히 떨었습니다. 바울이 떨었다면 우리는 더 많이 떨어야 할 줄 믿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 무디의 이야깁니다. 그는 전도 받고 너무나 구원에 은혜에 감사해서 어린 생명들을 전도하고 성경학교를 열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담임목사는 예배당을 빌려주지 아니했지만 이웃교회 목사님이 빌려줘서 그곳에서 엄청난 주일학교를 부흥시켰습니다. 그는 능력의 전도자가 되어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만 명을 모아놓고 집회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무디 선생, 사도행전 2장을 아는가?" "알지요" "아는 것말고 경험해 보았는가?" 충격을 받은 무디는 그 날부터 "하나님 나에도 그 날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게도 그 날을 주시옵소서!' 드디어 어느 날 마차를 타고 가면서 기도하던 중 성령의 세례가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는 너무 뜨거워서 마차에서 뛰어 내려 가까운 친구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뒹굴면서 외쳤습니다. "주여 그만 주시옵소서 내 육체가 탈 까 하나이다"
▶성령의 불 세례는 ▶말씀을 들을 때(행10장) 옵니다. ▶안수 받을 때(행8장/19장) 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행1:14) 임합니다. /믿/

 

2. 십자가의 원수를 삼가라!(18-19)

 

바울은 18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 너희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만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9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①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라!
여기서 배란 `코일리아'라는 말로서 `식욕, 정욕, 음욕, 물욕이 다 여기서 나옵니다. 이것을 위주로 살면 곧, 이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만을 위주로 합니다. 먹는 것 때문에 하나님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롬16:18절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롬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이 말은 지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사는 목적이 배(먹는 것)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도 다음이고, 하나님도 다음이고, 오직 관심은 먹고 즐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그 당시의 세상 풍조입니다.
어느 시대나 이 배가 문제입니다. 배를 채우는 문제,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급의 문제가 이 배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순전히 배를 채우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만 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모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앉아서 이야기를 합니다. "야, 6.25때는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아느냐?" 그랬더니 손자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배가 고프면 빵을 먹지요." "야 이놈아, 밥도 없는데 빵이 어디 있어 먹니" 손자가 또 말을 합니다. "빵이 없으면 라면을 먹으면 되지 않아요"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화가 나서 "보리밥 한 그릇 없는 판국인데 라면은 무슨 라면이냐"하고 큰 소리를 치십니다. 그랬더니 어린 손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우리 할아버지는 참 한심해, 라면이 없으면 우유를 마시면 되잖아요."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어찌 배고픔을 알겠습니까? 배가 고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일입니다.
▶로마 제국의 가장 큰 문제가 먹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먹는 일로 소일했습니다.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먹고 마시는 일로 즐기며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이 일이 더 심해져서 실토록 먹고 약을 먹고 토해 내고 또 싫도록 먹고 마시고 약을 먹고는 토해냅니다. 그래서 하수구에 흐르는 물이 파란색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로마의 멸망은 저 하수구의 파란 색깔에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사람은 먹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면 그것이 곧 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배의 신앙입니다. 하나님보다 배를 더 중시하고, 신앙보다 먹는 문제에 더 우선하고, 예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면 그것은 모두 배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로마의 교황이 일본을 방문해서 대학에 가서 젊은이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궁극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듣던 대학생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오늘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이 철없는 청년의 말에 교황이 의미 있는 말 한마디를 했습니다. "사람은 배만 부르다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또 다른 양식 즉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②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19)
19절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여기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죄)을 도리어 영광으로 알고 자랑하며 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서 낯이 붉어지는 일들을 예사로이 입에 올리며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양심이 마비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 있으면 죄를 범하고 부끄러워하며 송구스럽게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내가 젊었을 때는 죄를 짓는 일이 장쾌한 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큰 죄를 지을수록 남자답게 인식되었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것을 부러워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새사람이 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세태를 가만히 보십시오. 오늘날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을 할 그 당시에 가장 큰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피큐리어니즘'이라고 하는 정신적 쾌락주의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만 깨끗하면 되지 육신은 마구 뒹굴려도 죄가 안 된다고 우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습게 살았습니다.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은 통 속에서 쪼그리고 살았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평안하면 생활은 어떻게 해도 괜찮다고 하며 무질서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개같이 사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개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견유학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질서도 없고, 정돈되지 않은 삶은 무질서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질서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이 영광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경고하게 된 것입니다. "너희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지 말라." 이것이 눈물로써 당부한 두 번째 부탁입니다.

③땅의 일만 생각하지 말라!(19)
즉 이 세상일에 애착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천국 가는 발판으로만 이용할 뿐이지 거기에 애착하는 것은 십자가에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또 땅의 일이란, 육신을 좇는 자로 육신의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롬8:5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러나 참된 성도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찾는 자입니다. 골3:1-4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아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치었음이니라"
아직 세상 것에 연연하고 그것이 탐나고 그것을 취하려고 하면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인 것입니다.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신앙 생활은 눈을 들어 하늘을 처다 보는 생활입니다. 뜻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내 육신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정신과 마음과 뜻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신과 마음이 모두 이 세상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바울은 땅의 일에만 너무 골몰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④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길의 끝은 멸망(파멸)입니다(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마침이란 말은 저희의 운명이란 말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에게 정해진 운명은 멸망입니다. 멸망 뒤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롬8: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⑤거짓 스승을 쫓지 말라!
여기서 거짓 스승이란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만은 그 당시 교회 안에 침투해온 이단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3. 재림의 주를 기다리라!(20-21)

 

●주님 재림에 게으르지 말고 정신차려 준비해야 할 이유는?
①성도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20).
그리스도인은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 그 당시 세계를 제패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빌립보 감옥에 들어갔을 때, 나중에 상관들이 사도 바울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로마 사람은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감옥에 넣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행16:38).
행2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루살렘에 큰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천부장이 군사를 파견하여 때리는 사람을 말리고 사도 바울을 붙잡아 쇠사슬에 결박했습니다. 천부장이 사도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할 때, 바울이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않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자 이 말을 들은 천부 장이 깜짝 놀라 벌벌 떨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순교할 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지만 사도 바울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로마 시민권 자에게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의 형만은 내릴 수 없는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로마 시민권만 있어도 특혜를 받았는데 하물며 천국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특혜가 많겠습니까? 천국 시민권이 있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언제든지 당당하게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위로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11:16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천국시민입니다. 따라서 천국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천국 시민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항거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하게 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어떤 날 갑자기 문이 열렸습니다.
본회퍼는 직감적으로 자기가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감방에 있는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 나에게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아버지 집에서 만날 때까지 잘들 계십시오" 그리고 감방을 나와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최고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옆 사람에게 우리는 최고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인사합시다!)

②우리 모두는 구원의 주를 기다리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20).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는 날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은 이 세상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심판 받는 날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4: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시다! 먼 나라를 갔다가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청지기같이(마25:14), 또는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 있는 처녀같이(마25:1)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결한 삶으로 기다립시다! 요일3: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③재림의 그 날에 우리가 변화될 것이기에 기다려야 합니다(21).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주의 날,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의 형체와 같이 변화할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부활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그 때 우리 몸은 늙고 병들고 때리면 아프고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목마르고 죽이면 죽는 그런 몸이 아닙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으며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으로 시공을 초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영광의 몸과 똑같이 우리도 부활할 때 영광스런 몸의 형체로 변화됩니다. 그런 몸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성품도 주님의 모습을 닮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살 때,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죄악의 성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믿는 자답게 살지 못하여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에 사로잡혔던 좋지 않은 성품들이 다 없어지게 됩니다. 악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이 넘치고 희락이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눈물로서 우리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권면을 잊지 말고 생활 속에서 순종하며 사십시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바울 사도의 신앙생활을 본받아 우리도 모범이 되고, ▶거짓 스승과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좇지 말고 오직 주님만 따르고, ▶재림의 주님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04년 10월 10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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