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름이 능력입니다! (행 3:1-10)
요즘 사람들은 피땀 흘려 노력하기보다는 한방에 대박을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개미가 여름 내내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가득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베짱이는 여름 내내 노래 부르고 유람하고 놀다가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배가 고픈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서 구걸을 합니다. ▶그 우화를 가지고 우리때에는 학생들에게 우리도 개미처럼 부지런해야 하고 개미처럼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훈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신판 개미와 베짱이가 나왔답니다. 개미가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가득 준비해서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개미가 놀지도 않고 너무 일을 열심히 해서 이제는 양식이 있고 쉴 때가 되었지만 신경통이 생겨서 관절염과 어깨 통증으로 전신이 쑤시고 아파서 이 개미의 몸이 망가져 입맛도 잃어버리고 그 쌓아 놓았던 양식도 맛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노래만 부르고 놀던 베짱이는 음반을 하나 내었는데 이것이 히트를 해서 백만 장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개미가 성공한 베짱이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속이 상해서 어떻게 그렇게 되었냐고 비법을 물어보았더니 그 베짱이가 하는 말이 '너 보기에는 내가 노는 것 같았지만 그때 나는 히트 칠 노래를 준비하고 있었단다. 요즘은 너처럼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노동해서는 별 볼일 없을걸' 비웃더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판 우화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풍자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대박을 원하십니까? 예수만 잘 믿어보십시오! 예수 안에 모든 축복이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 세례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주면서 사는 부자가 있고, 남의 것을 얻어먹고 사는 거지도 있습니다. 또 자기 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인색한 부자가 있는가 하면,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많이 가졌다고 부자는 아닙니다. 또 가진 것이 없다고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은데 일생동안 남에게 베푼 것이 없는 가지고도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살면서도 많은 것을 주고 간 부자도 있습니다. 우리도 많은 사람들에게 줍시다. 여러분! 줄 것이 없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걷고 뛰게 만든 기적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팔자나 운명이란 말을 하지 많습니다.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들고, 고난까지 축복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능력과 치유함이 있습니다. 참 만족이 있습니다. 참 소망이 있습니다. 참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함과 구원이 있습니다. 골3:11절 "그리스도는 만유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상 사람들이 운명이라고 체념해 버린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꿔 놓는 말씀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전 문에 앉아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벌려 구걸하면서 하루를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때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도 돈 몇 푼 받기 위해 손을 내밀 때,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이 "내게 은과 금은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서 성전으로 들어가 함께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이 말은 불신자들이 말하는 운명입니다.
이 운명을 무엇으로 바꿔 놓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꿔 놓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어떤 장애물이 있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팔자니, 운명이라고 말하기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바다에도 길을 만드셨고, 광야에서도 만나를 내려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1. 본문 속에 네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①앉은뱅이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4:22절에 보면 40세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40년간 ▶육신적 장애을 가진 잡니다. ▶또 경제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걸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온통 구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잘먹고 잘사는 것도 아닙니다. ●운명이니 팔자니 하며 살던 이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
②그 친구들입니다. 그를 언제나 성전 미문에 매어 놓는 자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보다 귀한 분들이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사업가입니다. 그들은 왜 성전 미문을 택했을까? 그나마 약자에게 관심이 많은 종교인들의 마음에 동정을 원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왜 그를 메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까? 정작 그 앉은뱅이가 만나야할 분은 하나님인데 이것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오늘날도 사회사업가형의 성도가 많습니다. 이웃과 인간관계를 잘합니다. 구제하고 자선하는 일에도 힘씁니다. 어려운 자들의 아품에도 동참하고 동정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을 심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③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대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구별되게 사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생명이 없는 실상은 죽은 자들입니다. 이 땅위에 생명 없이 죽은 종교인들이 많습니다.
④예수 이름을 증거하는 사도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난 자들입니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한 믿는 예수 생명의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 생명을 증거하여 죽은 영혼을 살리는 자들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자들이며, 예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조명해 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2. 예수의 이름의 능력이 어디에서 아옵니까?
①능력은 기도하는 자에게 옵니다(1). "제 9시 기도시간에"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온 국민이 모이는 국민 성전입니다. 이 성전에서는 하루에 세 번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제 9시는 지금의 오후 3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3시(09시), 제6시(12시),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제9시(15시)입니다. 제9시에는 공적 예배가 드려지는 시간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성전 미문 앞에는 거지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고넬료는 제9시 기도시간에 기도했다고 행10:3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다니엘도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면서까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단6: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윗도 시55:17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절, 하반절의 '올라갈 세'라는 말씀은 반복적인 습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하루에 세 번씩 반복해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정시 기도를 합시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면 삼시 육시 구시에 누구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 때부터 일어난 운동입니다. 다니엘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때에도 정한 시간에 어김없이 기도했습니다. 작정한 정시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합심 기도를 합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마18:19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한 사람이 천을 좇으면 두 사람이 만을 좇습니다. 이것이 합심 기도의 위력입니다.
●성전 기도에 힘씁시다. 구시 기도 시간은 하루 중에 가장 어중간은 시간입니다. 우리의 시간으로 하면 오후 세시입니다. 이 시간은 하루 일과를 마치기도 다시 시작하기도 어중간은 시간입니다. 어려운 시간에 성전을 찾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G 캔들러'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의지력도 나약했습니다. 주위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금주 선언을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그는 벼락같은 마음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결단하고 끊으라!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캔들러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내는 바로 그 시간에 캔들러의 '금주'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부부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고, 캔들러는 아내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기도의 능력으로 술을 끊은 것입니다. 캔들러는 그때부터 수입의 10%를 철저히 헌금했습니다. '코카콜라' 회사는 창업주의 금주 선언 이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엄청난 일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자만 체험하는 것이요, 기도해 본 사람만 누리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불란서 농민 작가 밀레의 '만종' 이라는 그림을 보면 일을 하다 잠시 멈추고 고개 숙여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단순히 참 경건하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뒤쪽으로 멀리 종탑이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제대로 그림을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가 질 무렵 들녘에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땡하고 종소리가 울릴 때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손을 멈추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을 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쉐이브'라는 사람은 미국의 큰 강철회사에, 처음에는 청소부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던지, 주위에서 다 인정해 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청소를 너무 기가 막히게 잘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합니다. 청소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1등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통하여 예수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 있지 않아 청소부장이 되었습니다. 청소부장이 되면, 좀 감독이나 하고, 슬슬해도 될텐데, 혹시 청소부원 중에서 아픈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청소를 다 해줍니다. 이러니, 일꾼들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는 무엇이 되었느냐? 계장으로! 과장으로! 계속 올라갔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이 나중에는 '카네기'의 비서실장이 되었습니다. 결국, 카네기가 은퇴하는 때가 왔습니다. 세계의 메스콤이 온통 그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가? 여기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카네기는 깜짝 놀랄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바로 자기 비서실장인 쉐이브를 세웠습니다. 이때, 쉐이브는 "사장님, 지금까지 제가 회장님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지마는 이번만은 거절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회사만은 제가 맡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장님 밑에는 좋은 박사들도 많고, 가족들 중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이 막중한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이것만은 못합니다. 저는 그저 이 비서에 만족하겠습니다!"
이때 카네기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과학자가 필요하면, 과학자를 불러다가 쓰고, 돈을 주라! 경제인이 필요하면, 경제인을 불러다가 일시키고 돈을 주라! 수학이 필요하면 계산 잘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쓰고, 돈을 주라! 내가 자네를 선택한 것은 자네에게는 가장 좋은 무기가 있기 때문이라네!" 하면서, "자네 속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있지 아니한가? 나는 그것을 보고 자네를 이 회사를 맡긴다네!" 이래서 전 세계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할/
●성도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는 것은 아주 귀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세 번씩은 못한다 할지라도 하루 한 번은 꼭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벽 기도회가 제일로 귀한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막1:35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가 봤더니 기도를 통해서 얻어진 능력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량이 장성해집니다.
②능력은 성전 예배를 통해서 옵니다. '성전에 올라갈새'
세상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 가느냐에 따라 인생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왜 성전중심이 이토록 중요합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전중심으로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요,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취임을 한 후 첫 주일에 가족과 보좌관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TV와 신문 등 모든 매스컴은 대통령의 주일예배 드리는 모습을 세계뉴스로 내보냈습니다. 이것은 미국적인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단순히 개인이 예배를 드렸다는 차원이 아니라 미국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나라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라는 신앙고백을 온 세계 만방에 보여준 일입니다. 대통령이 주일에 예배드리는 모습을 세계뉴스로 다루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미국은 크리스챤 대통령이 취임을 하고 나면 첫 주일 예배 드리는 것을 뉴스의 초점으로 삼고 그것을 온 세계 앞에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통치자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예배행위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시29:1절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우리는 행복한 예배자로 살아야 됩니다. 또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히브리 시적으로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고 돌릴지어다'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예배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영광을 돌리고 돌릴지어다를 우리말로 적용을 하면 '예배하고 또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한번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한을 정해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지속적입니다. 계속 예배하는 것입니다.
시29: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행복한 예배자입니다. 합당한 예배는 미리 준비하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예배는 생명 걸고 지키는 것입니다.
③성도의 능력은 연합할 때 나타납니다.
1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3절에도 '베드로와 요한이' 여기서 '와'는 화목을 말하고, 합심을 말하고, 일치를 말하고, 연합을 말합니다. 와의 진리가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부모와 자녀, 형제와 형제, 와는 화목의 고리입니다. 일치의 연결고리입니다. 여러분! 이 와의 연결 고리가 잘 연결될 때 행복이 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부모와 자식사이가, 형제와 형제사이가, 와의 고리가 빠져서 싸움과 갈등 속에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는 너와 내가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화목하는 곳에 하나가 되고 합심하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고 축복이 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호흡이 잘 맞는 동역자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당시 갈릴리에서 함께 고기를 잡은 동역자였으며, 그 후에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도 늘 함께 행동을 했습니다. 마17장에서 주님과 함께 변화 산에 올라갈 때도 동행을 했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 후 무덤을 찾아갔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동행했으며, 오늘 본문에서도 함께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콤비가 잘 맞는 동역자입니다.
우리가 호흡이 맞는 사람과 전도하고 봉사하면 더욱 더 신앙이 깊어갑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신앙이 깊은 분들과 대화하며 함께 기도할 때 응답 받고, 축복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④주의 종의 눈과 눈이 마주칠 때 능력이 나옵니다.
4절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은 가난한 자에게, 원하는 자에게, 목마른 자에게,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보라'는 말은 나를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눈을 맞추라는 이야기입니다. 눈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해서 눈과 눈이 서로 마주칠 때 서로 사랑의 감정이 통하게 됩니다.
여러분! 눈동자를 보면 압니다. 사랑하는 눈동자가 다르고, 미워하는 눈동자가 다르고, 의심하는 눈동자가 다릅니다.
'우리를 보라' 베드로가 소리쳤습니다. 이 불 신앙의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쳐다 볼 때 베드로의 눈에서 튀어나오는 신앙의 힘이, 즉 하나님의 능력이 그 눈 속으로 들어 간줄 믿습니다. /할/
절망의 사람이 소망으로 가득 찬 베드로의 눈동자에서 소망을 받습니다. 눈과 눈이 합쳐지는 순간 그때 벌써 기적이 싹튼 줄 믿습니다. 주의 종의 눈과 마주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배시간에 강대상에 주의 종과 눈을 마주치기를 바랍니다.
⑤뭐니뭐니해도 예수의 이름 속에 능력이 있습니다.
앉은뱅이에게 기대감을 잔뜩 불어 일으켜놓고 베드로가 그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금도 아니요, 은도 아닙니다.
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할/ 베드로가 이 앉은뱅이에게 준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슬슬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두 사도에 마음속에는 놀라운 확신의 샘이 솟아올랐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선물을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내게 금과 은은 없어도 예수님이 있지 않은가? 풍랑도 잔잔케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문둥병을 깨끗케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의 주님이 내게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에게 주님의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 능력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다! 예수님을 주자! 주님의 권능을 주자! 주님의 권능으로 저를 일으켜 세우자" 두 사도의 마음속에는 사랑과 믿음의 확신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앉은뱅이에게 필요한 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서는 것이 더 절실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불을 붙이십시오. 믿음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지금도 기적은 일어나고 역사는 나타납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앉은뱅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이 땅의 많은 앉은뱅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바쁘다는 핑계로 문제를 건성으로 보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또는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안타까운 사랑의 심령이 메말라 있습니다. 또 가진 것이 없다는 핑계로 발뺌을 하기가 일수입니다. 우리가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고 조소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불붙은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주시해 봤습니다. 하나님은 안타갑게 방법을 찾고 길을 찾는 자에게 방법을 알려주시고 문제 핵심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어떠한 길로도 통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는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에 아무런 능력과 권세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에는 위대한 능력과 권세가 따르며 그 이름을 믿을 때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서 세례를 베풀었으며 병자를 고쳤고, 죄 사함을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역사할 때 귀신이 소리치며 떠났고,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권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죄를 멸하신 권세요, 하나님의 원수된 것을 무너뜨리고 성령님과 교통하는 권세요, 저주를 속량하신 권세요, 사망권세를 무너뜨린 권세입니다. 이 귀한 권세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교회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재산입니다. 교회 안에 화려한 장식이 있어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있기에 귀한 것입니다. 롬8: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몇 푼의 돈으로 인간 사회를 구해보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교회가 진정 이 세상에 던져줄 가장 귀한 선물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사람들에게 주는 성도들이 됩시다.
병든 자에게 주시고, 실패와 낭패 속에 있는 자에게 주시고, 세상 쾌락 좇아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줍시다. 이 땅에 예수님을 모르고 안타깝게 사망의 골짜기로 향하여 달려가는 자들에게 우리 모두 예수님의 이름을 줍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안에 성공이 있고, 그 안에 소망이 분명히 있습니다. /믿습니까? 아멘!/
●어떻게 줄까요?
①받은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준다는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는 것이요. 은혜로 받았으니 은혜를 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받은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받음으로 살았고, 은혜로 여기까지 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기를 거저 주시고 햇빛도 거저 주십니다. 비와 이슬을 거저 주셔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편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로 멸망 받아야 할 인류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 값으로 그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아 피 흘려 죽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있었기에 우리 모두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나 영원한 영생복락을 얻었습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독생자 외아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선물을 거저 받았기에 우리도 거저 주어야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 지구상에서 찬란한 영광을 받을 사람은 그 만치 역사에 많이 주고 간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②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의 뒤를 3년이나 따라 다니면서 베드로는 줄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 얻을 것만 생각했습니다.
마19:27절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얻을 것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시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난 뒤부터 그는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 이름으로 준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주십시다. 사랑을 주십시다. 이웃을 위해 기도합시다. 복음을 증거 합시다. 없는 사람 구제하시고, 전도합시다. /아멘/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예수 이름으로 주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할/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주면서 7절을 보니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가 그를 일으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의심 없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기도한 자가 확신이 없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앉은뱅이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드디어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서게 됩니다. 여러분! 발과 발목이 힘을 얻는 다는 것은 믿음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히12:12-13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사람이 앉은뱅이가 되어 일어서 걷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걷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는 것을 겁내는 어린이는 절대로 서서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어다니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 걸음마를 시작하면 아무리 넘어져도 절대로 기어다니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는 기쁨, 걷는 기쁨, 달리는 기쁨 정정한 사람은 절대로 기어다니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서서 걸어 다니는 신앙!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 오늘 앉은뱅이처럼 일어나십시오. /할/
8절에 보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좀더 깊은 지성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 그는 구걸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앉은뱅이가 낫고 걷게 된 것은 인생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입니다. 발목과 발에 힘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완전한 구원이며 육체의 완전한 치유입니다.
40년 간의 수모와 능욕 속에서 슬픔과 탄식 속에서 그는 큰 소망의 빛을 얻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너무 감격하여 성전에 들어가 걷고 뛰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이 시간에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실패에서 일어납니다. 질병에서 일어납니다. 먼저 우리가 신앙에서 일어서기만 하면 오늘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할/
③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믿음의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복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 응답의 확신, 기적의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엡4: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것이 직분의 목표입니다.
세 번째는 고난의 가치에 대한 확신입니다. 골1:4절 "내가 이제 너희를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3. 우리도 일어서야 합니다. 뛰어야 합니다.
①로뎀나무 아래 지쳐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사람들이 생수의 떡을 먹고 일어서야 합니다.
②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다 지쳐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사60:1절). 가정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빛을 발하라!
③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5:8). 해도해도 안 된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일어나야 합니다. 때가 되면 이룹니다.
④잠자는 신앙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엡5:14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4. 베드로의 겸손을 배우자!
베드로와 요한은 이 같은 기적을 보고 놀라서 달려나온 사람들을 향해 12절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①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을 주목하지 말고, 그 사람을 쓰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난 아니다.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자기 부정, 겸손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는 베드로의 반문 속에는, 자기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님을 솔직히 고백하는 겸허함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어떤 위대한 일을 하고 나서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②믿음의 위력을 보라는 말입니다.
③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라"
5. 베드로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①회개하라! 기독교는 회개로부터 출발합니다.
②돌이키라! 회개는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개의 행위적인 돌이킴을 말합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대목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행위적인 결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③죄 없이 함을 받아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과 돌이키는 것은 내가 하지만 죄 없이 함을 받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시51:1절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32:5절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사43: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내 허물을 도말하는 자 너의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④회복의 날, 유쾌한 날이 옵니다. 주일은 회복의 날입니다. 하늘 나라의 영광과 평강으로 유쾌함을 입는 날입니다. (2004년 6월6일 대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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