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교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를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간결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대게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라는 적확성과 그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들이 어거스틴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터키의 갑바도기아 라는 지역에 살았던 세 교부입니다. 그 세 교부의 이름은 바실 더 그레이트, 위대한 바실이라는 사람과 그레고리 오브 니사, 그레고리 나지안주스, 두 명의 그레고리입니다. 그레고리 니사는 바실의 동생이기 때문에 형제 간, 바실과 그레고리 니사, 그레고리 나지안주스, 이 세 사람이 삼위일체교리를 집대성했는데, 이 분들의 핵심은 하나님이 세 하나님이라는 것, 일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삼위를 강조했습니다. 삼위를 강조했기 때문에 삼신론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위격이 다릅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구별되는 위격입니다. 그다음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오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신다, 성령을 받으라, 이런 말을 분명히 했는데 요한복음 14-16장이 삼위일체교리의 대 언약, 요한복음 14-16장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파송했습니다. 파송하신 그 아들은 성령의 끊임없는 감화 감동을 받아가면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아들은 마침내 원래 자기 있던 곳으로 돌아가십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신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해서 이제 모든 신자에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 모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결단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우편 보좌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요청해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주시기로 한 그 성령이 오셨습니다. 이 과정이 요한복음 14-16장에서 너무 설명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없지만 삼위일체 교리가 있는 곳은 어디냐고 물을 때 요한복음 14-16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의 이름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왜? 내 이름으로 오신 예수니까, 내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과 성령은 같습니까? 다릅니다. 그래서 삼위, 위격이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다르듯이, 아버지와 아들이 다른 것은 쉽게 이해가 되죠?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말하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는데, 예수님 이름으로 오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를 또 증거합니다. 이런 겁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이렇게 일종의 종격연대를 형성합니다. 종격연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파송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요청해서 성령을 파송하니까
일종의 종격연대가 분명히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이런 종격연대가 있는데, 이 종격연대 외에 횡적연대가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이란 횡적연대가 있는데, 이것은 세 분이 세 하나님이 태초부터 함께 계신 하나님이란 진술 때문에 파송개념을 빼면 원래 함께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 본문은 요한복음 17장 5절에 나옵니다. 이건 약간 어려울 수 있으니까 이해되는 만큼 아십시오. 함부로 이해하다가 이단 되는 것보다 그냥 가만히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게 나아요. 내가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영화를 내게 주십시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이게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문제는 이런 삼위일체교리가 우리에게 별로 상관없는 교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입니다. 삼위든 사위든 상관없으니 구원만 주십시오. 우리는 구원실용주의적 입장에 있기 때문에 내가 구원만 받으면 되지, 삼위일체든 오위일체든 상관없다, 이런 생각을 하기 쉬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해보면 하나님이 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는지 그 논리적 필연성, 그 내적 필연성을 다 이해하면서 예수를 믿는 겁니다. 삼위일체 개념을 모르면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창조하시고, 어느 날 갑자기 죄를 지었다고 인간을 심판하시고, 어느 날 갑자기 또 우리를 용서하기로 작정하시고 이런 모든 하나님의 일련의 행동을 삼위일체를 모르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러면 뭡니까? 하나님이 죄 지은 인간을 어떻게 죄를 해소하시고, 원상복귀 또는 원상복귀보다 더 나은 상태로 우리를 재창조하셨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필요한 겁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것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한때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한때 벌하시고 벌하셨던 그분이 왜 우리를 용서하셨는가, 이걸 일련의 설명, intelligible하게 설명하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 구원을 받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 구원 역사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해서 삼위일체교리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겁니다. 한 사람 아담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와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졌습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풀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한 사람 아담이 지은 죄가 모든 사람에게 퍼져서 죄와 죽음이 온 인류에게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 예수가 오셔서 아담이 지었던 모든 죄를 상쇄하고 그 죄 갚음을 하시므로 말미암아 아담이 죄 짓기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를 창조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을 둘째 아담의 순종으로 만회했다고 말함으로써 결국은 천국을 만들 때 인간은 구원받은 수혜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천국을 만드는 데 인간의 순종이 굉장히 중요한 coagent가 된다, 천국을 만들 때 우리 인간이 단순히 초청만 받고 그걸 누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어떤 사람들 중 일부는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독생자급 순종으로 바치는 사람으로 부름심을 받고, 독생자급 순종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천국이 창조가 잘 된다, 이런 실천적인 함의를 우리에게 주기 위하여 삼위일체교리가 필요한 겁니다. 삼위일체교리는 이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왜 죄 많은 인간을 무슨 논리로 용서하셨는가, 그걸 설명하는 교리임과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우리 인간은 받기만 하고 아무런 역할도 못하는가? 아니다, 인간의 결정적인 순종이 필요한데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순종이 인간 모두에게 엄청난 의미를 주었듯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하고 독생자급 순종을 바치기만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창조자의 동참자가 된다, 천국을 창조하는데 cocreator가 된다, 빌립보서 2장 5-11절, 삼위일체 본문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교리가 없다면 이런 본문은 도저히 나올 수 없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우리가 모방해야 할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괄호하고 지금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각주가 붙었습니다. 그 아래 6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하면서 각주가 붙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때 취할 것, 아래 주를 보시면 강탈할 그 무엇, 이렇게 돼 있죠? 강탈할 것,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할 그 무엇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제까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반역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누구를 중심으로 다시 진압하십니까? 누구를 기점으로 반역의 근거를 없앴어요? 하나님 아들의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고 반역을 다 진압한 거예요. 우리가 드라큘라 어떻게 진압해요? 드라큘라 어떻게 잡죠? 드라큘라 영화에 드라큘라가 뭘 무서워하죠? 드라큘라가 무엇인가를 알죠? 목에서 피를 빨아 먹는 것, 남의 피를 빨아 먹고 무시무시한 검은 옷을 입고 벤츠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그런데 남의 피를 빨아 먹어야만 사는 것이 드라큘라의 슬픈 운명입니다. 그걸 슬프다고 해야 할지, 드라큘라가 피를 빨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드라큘라가 십자가와 마늘, 마늘이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십자가를 보는 순간 드라큘라가 자기의 악마성을 잃어버리고 도망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대한 순종 때문에 모든 악마적 불순종은 존재소멸을 선고받은 거예요. 존재소멸, 근거 없다, 모든 악마적 불순종, 오만과 탐욕과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아들의 완전한 순종, 그 한 번 행위 때문에 전부 다 존재 소멸을 선고 받았어요. 무효가 된 거에요. 이런 삼위일체교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모든 악마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이 원리가 삼위일체의 실천적 함의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또한 우리 시대의 독생성자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드려서 우리 시대에 활약하는 모든 드라큘라와 뱀파이어 이런 악마들을 존재 소멸시키는데 우리 온몸을 드리자, 이런 함의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론은 우리 인간도 하나님을 모방할 수 있게 만들어줘요. 즉 하나님 아들 독생자를 모방할 수 있게 만들어줌으로써 우주의 구원드라마가 우리 하나님의 모노드라마가 아니라 인간과 피조물이 동참하는 공동드라마라는 거죠. 이 공동드라마가 바로 삼위일체교리에요. 삼위일체교리가 없다면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진술자체가 불가능한 거예요. 이건 너무 삼위일체적 교리인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구원해줄게, 라고 한 게 아니라 너희 중에서 독생성자급 순종을 바치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천국을 건설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 초청하는 거예요. 단순히 구원만 받아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이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의 특수한 일부를 뽑아서 구원에 공동창조자로 우리를 불러주시기 위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이렇게 강조해주시는 거예요. 우리를 또한 그리스도 예수처럼 불러주시는 초청이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잘 이해하면 예수 그리스도적 순종을 모방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삼위일체교리는 너무나 의미가 깊은 거예요. 저는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확신을 교리 때문에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타나시우스의 긴 헬라어로 된 책을 읽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보한 게 아닙니다. 저는 성경을 많이 읽다가 완전히 납득됐습니다. 완전히 납득되고 설복되면서 저는 삼위일체론자가 됐습니다.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세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일단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면 예수님을 유대인의 예언자로 보는 에비온파라고 하는 초대교회 한 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고 선지자로 보았던 지금 말하면 마틴 부버 같은 사람,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같은 사람, 유대인 중에서 양심적인 유대인들이 바라보는 입장이 예수는 불운한 선지자다, 엘리야 같이 왔지만 홀로 분투하다가 아무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 속에 찬란히 타들어간 유성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에비온파입니다. 그다음 아리우스파가 있습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 신, 하나님,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성을 하나님 아버지와는 다른 의미로 하나님 아버지보다는 덜 신적인 의미로써 신이라고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보다는 덜 신적이라는 말은 영어로 less co eternal, 이 말은 한때 아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니케아 신앙고백 때 많이 나오는데 교회사에서나 세계사에서 많이 나오는 논쟁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피조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이건 지금 더 논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금 여호와 증인입니다. 여호와증인과 몰몬교는 이런 신관인데, 몰몬교와 여호와 증인의 책을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 다 고백합니다. 그런데 특히 여호와증인을 보면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리우스파적인 의미, 좀 덜된 하나님이라고 보는 그런 입장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몰몬교는 약간 진화론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화가 돼서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 세 번째 입장은 우리가 정통교리라고 하는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태초부터 함께 있었다고 믿는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근거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이죠? 이사야 55장 10-11절 볼까요?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윤택하게하고 초목을 결시케 하고 돌아가듯이 우리 하나님 입에서 나간 말씀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목적한 바를 성취하고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순간 하나님 말씀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한 이상 하나님이 말씀 없이 멍하게 지성 없는 하나님, 감정 없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한 번 설정돼야만 예수님의 나이가 하나님보다 어린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존재한 순간 우리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계실 때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말씀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존재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말이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정통교리인 아타나시우스 교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똑같은 하나님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일 아타나시우스파와 달리 아리우스파처럼 한때 아들이 계시지 않았다, 한때 말씀이 계시지 않는 때가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은 계시는데 하나님 말씀은 안 계시는 때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정신적으로 진공상태의 하나님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을 설정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은 항상 co eternal 하다, 영원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교리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세계에서 삼위일체교리가 가장 좋은 것은 삼위일체교리는 제게 헨델의 메시아를 MP3로 꼽고 늘 들으면서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헨델의 메시아는 어떤 최악의 무신론적 상태에서도 기분이 나빠도 기분 나빠진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헨델의 메시아를 듣기 시작하면 처음부터 끝가지 놀랍게 우리가 이 잔혹한 세상에 대해서 포기해버리고, 그다음 빈정대고 야유를 퍼붓던 그 세상에 대해서 갑자기 내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만들어 주는 음악의 치료의 힘이 있어요. 그게 왜 그런지 몰라요.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부분적으로 효과는 있어요. 공부하기 싫은데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한 세 번 듣고 나면 공부가 잘 되는 그런 경우가 있었거든요.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우울증을 치료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건 몹시 기분 나쁘고 정말 한국교회 한국사회 이 모든 나쁜 세상에 대해서 내가 20대 때 만사가 귀찮고 내가 자폭하고 싶을 만큼 괴로울 일이 많을 때도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면 너무 살아나는 걸 깨닫거든요. 여러분 들어보세요. 오늘 퀴즈대회에서 하나도 알아맞히지 못하면 딴 교회로 가야 합니다. 담임목사님 약간 자신도 모르게 예언했습니다. 오늘 하나도 알아맞히지 못하는 사람은 인근에 있는 다른 감리교회 같은 데로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 분들이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면 딴 교회를 갈 때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겠죠? 가향교회와 함께 하기 힘들죠. 왜냐하면 3주 동안 예고하고 공부했는데 한 문제도 못 알아맞힌다? 그건 딴 교회 정도가 아니라 불교로 가야죠. 그럴 때도 헨델의 메시아가 위로가 된다는 거지, 삼위일체교리가 나에게는 헨델의 메시아와 같다, 왜? 삼위일체교리를 묵상하고 나면 우리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동행이 너무나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는 거지, 제게는 삼위일체론과 헨델의 메시아와 같다, 주가 살아나셨다, 주가 다스리신다, 그 부분과 같습니다. 본문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고 본문입니다. 3장 31절 보면요. 제가 가리킨 게 누군가 보세요.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한복음 정말 전형적으로 기분 안 좋은 본문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낙심됩니다. 어떻게 성경이 이렇게 멋없이 진술됐나 싶은데 3장 30절과 같이 연결시키면 약간 이해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위로부터 오시는 이와 땅에서 난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잘 보세요. 맥락 안에서, 위에서부터 오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땅에서 난 이는 세례요한,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집약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A, B, A' 구조로 돼 있죠?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신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신다, 똑같은 말이에요. 땅에 계신다, 세례요한이 왜 쇠하여야 하고 우리 예수님은 왜 흥하여야 하느냐면 땅의 일을 말한 계시는 하늘의 계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 대체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초등학문은 고등학문에 의해서 대체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땅의 것을 추구하는 욕망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추구하는 욕망에 의해서 대체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욕망에 투신된 삶은 필멸, 반드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욕망에 투신된 삶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욕망에 의해서 대체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말은 땅의 일을 말하는 나는 하늘의 것을 말하는 그에 의해서 대체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건 맞죠? 땅에서 말한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일시적이고 잠정적 가치만을 말하는 사람은 영원하고 보편적이고 연속적 가치를 말하는 사람에 의하여 대체돼야 한다, 이런 뜻으로 보면 돼요.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이 그는 일차적으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1장 29-34절에서 말한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32절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이때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는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요한복음 1장 30-33절에서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세례요한의 증언을 받은 자가 적었다, 그러나 세례요한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확신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이건 어려우니까 고개를 드십시오. 이건 필기도 하면 안 되고 간결하게 말합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구약성경의 하나님, 세례요한을 파송하신 하나님, 모세와 엘리야를 파송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파송하신 그 하나님이 같다는 것을 믿는 사람, 같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말이에요. 세례요한의 증언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낸 그 하나님과 구약성경의 하나님,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 역사 속에 활동하는 그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임을 확신했다는 뜻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느냐면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이미지와 구약성경의 하나님 이미지를 너무나 조화를 시키지 못해서 AD140년경에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단으로 배격됐습니다. 이걸 신학적인 용어로 마르시오니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도 구약의 하나님은 뭔가 까칠한 까도남 같은 하나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뭔가 굉장히 세련되고 웬만하면 다 자기가 뒤집어쓰려고 하는 하나님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 됐습니다. 세례요한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이 같다는 말은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예언자를 파송하시고 마침내 세례요한을 파송하신 그 하나님이 예수님을 옳다고 했어요. 바른 예수님을 증언했기 때문에 구약을 제대로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런 뜻입니다. 구약을 제대로 읽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너무 적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언을 받고 예수님을 참 하나님이 보내신 참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이 너무 수가 적었습니다. 34절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괄호하고 일차적으로 세례요한,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 둘 다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성령은 하나님 말씀을 하도록 돕는 분이다, 성령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대리자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도록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도록 격동하고 충동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은 성령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 주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립니다. 사도행전 2장 34-38절을 보면 성령이 어떻게 오셨느냐면 아버지 하나님께 아들 하나님이 완전히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마치고, 절대순종을 마치고 지상의 모든 생애를 끝내시고 우주의 하나님 보좌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 보좌로 돌아가신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께 요청하여 보내신 분이 성령인데, 잘 보세요. 이 성령은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서 보내주시기로 약속된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이거든요.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 우편 보좌에 가서,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라는 그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 우편보좌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앉혔습니다. 앉혔을 때만 오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가셔서 처음으로 하신 일이 오순절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확신을 줄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확신하지 못합니까? 지금 우리는 거꾸로 갑니다. 만약 우리 안에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파송된 성령이 없다면 무얼 믿지 못하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있다는 걸 믿지 못하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은 것을 믿지 못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걸 믿지 못하죠.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걸 믿지 못하면 십자가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걸 믿지 못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걸 믿지 못하죠. 십자가에 죽은 걸 믿지 못하면 이 땅에 예수님이 사셔서 30년 동안 사신 걸 믿지 못하죠. 아무 것도 못 믿네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마자 이 모든 것이 연속적으로 다 믿어집니다. 첫째,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보좌에 가셨구나, 그래서 저에게 성령이 임했구나,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은 걸 보고 그가 승천하셨음이 분명하구나, 그가 승천하셨으면 그는 부활하셨음이 분명하구나,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저주를 받아 죽었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죄 용서 받았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하여 그는 부활하셨구나, 로마서 4장 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 죄가 용서받았다는 걸 확신시켜주는 방법은 우리 죄 때문에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는 길밖에 없겠죠. 이런 일련의 과정을 순식간에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고 우리에게 인을 쳐줍니다. 이게 바로 성령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게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있는 사도행전 2장 34절이 말한 그 주라고 할 수 있어요. 빌립보서 2장 11절 읽었죠? 하나님이 종의 형태를 가져서 죽기까지 복종한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입술이 주라 고백하도록 만들어놨습니다. 그 주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그 일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음을 확신시켜줍니다. 잘 보세요. 이렇게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순간 김회권의 모든 전 존재가 하나님 나라의 공탁자산이 돼버립니다. 김회권 인생이 이제 성령에 접수되자마자 그리스도의 우주적 몸으로 귀속돼버립니다. 나는 하나님의 우주적 몸의 일부가 돼서 김회권의 모든 성취, 김회권이 갖는 모든 업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공탁자산으로 기탁돼버립니다. 여러분, 성령을 꼭 받아야겠습니까? 이래도? 성령 받는 일은 참 공중에 떠오릅니다. 중력의 법칙이 잘 미치지 않습니다. 성령 받으면요. 특별히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면, 괄호하고 무섭다, 라고 써 놓으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제가 계속 꼬는 이유는, 막 꼬잖아요. 퀴즈대회하고, 여러분 인생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sanctified, 거부하게 만들어서 하나님 우주적 공적자산을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거대한 음모가 지금 진행되고 있어요. 여기서 너무 감동을 많이 받으면 항상 정신을 차려서 벌써부터 죄 짓는 데 가서 다시 또 영을 받아요. 여기서 계속 감동 받으면 안 돼요. 그러면 여러분 재산이고 뭐고 남아도는 게 없어요. 모든 게 다 우주적 공적 자산이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말을 한량없이 주셨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세요. 성령을 약간만 주세요, 한량없이 받으면 죄악의 인력을 벗어나서 세상말로 신선이 돼 버려요. 천사 같은 성도가 되버린대도요. 삼위일체교리는 이렇게 실천적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자의 순종은 성령의 역사를 유발시키듯이 마찬가지로 성자를 모방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을 성령의 한량없는 감동을 유발시켜서 끊임없이 순종이 심화되고 끊임없이 순종의 해일이 커져서 마침내 하나님과 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된다, 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 아들의 십자가의 신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이룬 십자가 신비, 다시 말해서 자기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 높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받은 승천과 영화로워지는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생을 알지 못하고, 즉 신적 삶에 참여하지 못하고, 괄호하고 엄청 풍요롭고 풍성한 삶, 그게 영생입니다. 영생은 신적인 생명력에 동참함, 요즘 어떤 사람들은 태반주사를 맞대요. 육상선수들이 태반주사를 맞더라고요. 축구선수들이 자기 피를 뽑아놨다가 축구 하러 가기 전에 자기 냉동 피를 집어넣는대요. 그러면 헤모글로빈이 많아져서 두 시간 동안은 엄청 에너지가 많이 난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자기 피를 감식하는 장치가 발명됐다고 뉴스에 나왔어요. 그렇게 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 하지 말고, 신적인 영생, 이 영생은 지금 이 땅에서 이뤄집니다. 이 영생은 뭡니까? 어떤 거친 피조물의 악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압도적 희열과 압도적 평강이 지배하는 삶이 신적인 삶, 영생입니다. 즉 영생, 어떤 거친 세상의 악과 부조리에도 파괴되지 않는 기쁨과 희열과 생명력이 바로 영생입니다. 제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설명할게요. 너무 영생은 대단하기 때문에 영생은 에너지 충만, 기쁨 충만, 여러분이 좋아하는 능력 충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또 연애 잘 될 가능성 충만,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없다면 배우자가 생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령 충만하기 때문에 생기가 넘치잖아요. 어떻게 생기 넘치는 사람들이 녹슨 동전처럼 땅 속에 파묻혀 있겠어요. 성령이 임하면 군계일학 같은 아름다움이 꽃이 피면서 독보적인 향기가 발산되는데, 우리 형제자매들이 빛이 없어요. 예수 믿고도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성적 아름다움의 꽃이 안 핍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성령 충만하면 신적 생명인 하나님의 영생의 기운이 있기 때문에 너무 좋아져요. 제가 어제 읽었던 스캇 펙이 쓴 책이 나옵니다. <녹색선집>에 다시 실려 있어요. 망해가는 수도원에 다섯 명의 수도사가 서로 늙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면서 처량하게 수도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 암자에 랍비 한 명이 와 있습니다. 이 다섯 명의 수도사가 랍비에게, 선생님 우리 수도원을 어떻게 하면 안 망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니까 저는 답이 없습니다, 하면서 수도원장과 랍비가 토라를 읽으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늙어가기로 작정하고 쓸쓸하게 떠나갔습니다.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랍비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우리 수도원이 소멸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랍비가 한 마디 합니다. 다섯 명 중에 메시아가 있습니다, 다섯 명 중에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있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장이 누가 메시아일까를 짐작하면서 계속 네 명중에 아니면 자기도 심지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 다섯 명이 골똘히 궁리합니다. 그러다가 서로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존경심이 비상하게 발달해서 너무 존경심으로 사랑으로 똘똘 뭉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다섯 명 수도사의 얼굴에서 나는 존경과 사랑과 우애의 빛, 광채가 난다는 소문이 쫙 퍼져서 젊은 사람들이 계속 수도원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수도원에 메시아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기 추진 예언입니다. 내가 메시아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갑자기 내가 세계를 구원할 메시아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너무 숭고해지고 동료도 숭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채가 났습니다. 내가 성령 충만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을지로를 구원할 메시아다, 나는 테헤란로를 지배할 광채를 발휘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살면, 이런 실천적인 결단이 있으면 우리가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는 기쁨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오늘도 이 건조하고 메마른 세상에서 신적 생명을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건조하고 인간성을 고갈시키고 피폐케 하는 세상에서 한량없는 성령의 역사 갈망합니다. 열망합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메시아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심한 존경과 사랑과 우애로 똘똘 뭉쳤던 늙은 수도사들처럼 주님, 가향교회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섬길, 한국사회를 건질 메시아적 독생자급 인물이 있다고 믿고 서로에 대한 기대를 한껏 고조시키고 자기 기대를 고조시켜서 신적 생명에 동참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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