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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10-18(주일 1부예배설교)

by 【고동엽】 2022. 1.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가시철조망으로 겹겹이 쌓여 적대적인 원수의 마을 속으로 들어가시기 위하여 가시에 찔리고 중상과 비방에 시달리면서도 화해의 길을 여시고자 분투하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주님, 대림절입니다. 주님께서 가시철조망 쳐진 인간의 마을로 내려오셔서 인간의 폭력의 사정권에 자기를 지니시고 화해 악수를 요청하신 대림절에 우리의 원수를 생각합니다. 가시철조망이 겹겹이 쌓여 있는 원수의 마을로 들어가 입을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고, 뚜벅뚜벅 철조망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원수를 끌어안고 원수에게 폭력을 당하며 가학을 당하며 죽임을 당할지라도 이 화해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과 전 세계 만민들 사이의 적개심의 철책선을 다시 걷어주시고 우리 주님이 다스리시는 온 세상이 주님 나라의 지방자치정부가 될 수 잇도록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말씀으로 은혜 주시길 바라옵고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영어단어에 보면, municipal가 있습니다. 이런 단어는 무니피키아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단 설명이 돼 있고, 우리나라 영어사전에는 무니피키아라고 하면 지방자치단체라고 돼 있습니다. 그 무니피키아는 라틴어로 원래 무장해제된 적성국가 라는 뜻입니다. 한때는 나와 대결했던 원수 나라였는데, 이제 로마가 정복해서 로마가 정복한 적성도시국가를 무장해제시키고, 비무장 로마의 지방정부, 로마의 지방자치단체로 만드는 겁니다. 지방자치단체라는 municipal 이라는 말은 한때는 무장해서 도시국가를 이뤘지만 지금은 비무장 자치단체로 로마의 일부가 된, 이런 뜻입니다. 전 세계가 각자의 상비군을 가지고 각자 영토적 주권성을 가지고 경계선을 쳐놨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15절에 따라 보면 전 세계는 우리 주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온 세상은 전부 다 우리 주님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지방자치단체가 됩니다. 비무장 지방자치단체가 됩니다. 지금은 여러분께서 모든 나라가 군사무장을 하면서 영토의 온전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 이게 너무 당연해보이죠? 그런데 하나님 성령의 기다림에서 보면 이게 당연한 게 아니라 영토적 보전을 하기 위해서 각 국가가 무장한 이 상태는 잠시 우리를 혼동케 하는 하나의 어둠의 질서이고, 모든 세계는 군대가 없어집니다. 우리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군대가 없어집니다. ? 로마제국이 다스렸던, 로마 제국의 한때는 도시국가였던 에트루리아는 지금의 나폴리 부근이고, 움베리아는 이탈리아 도시국가 로마보다 더 위에 있는 라벤나 지역입니다. 이 두 지역은 한때 적성국가였습니다. 로마제국 안에 들어와서는 군사무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 로마제국이라는 큰 나라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도시국가로써 무장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온 세계가 지금은 서로 불신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군사적 무장상태를 통해서 평화를 유지합니다. 군사적 무장상태가 전쟁을 방지합니다. 너무 역설적이죠? 그런데 앞으로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 모든 지방정부, 모든 민족국가들은 무장을 다 풀게 됩니다. 비무장, 무장해제의 첫 출발에 대림절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의 엄청난 군대를 부릴 수 있는 사령관입니다. 인간의 모든 폭력들을 일시에 죄로 만들 수 있는 폭력장치, 군대를 순식간에 무로 돌릴 수 있는 천상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군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비무장으로 혈혈단신, 가장 약한 어린아이가 돼 오셨습니다. 가장 약한 어린아이가 되어 오셔서 이 세상의 모든 가장 강한 자들을 무장해제하게 합니다. 연약한 자가 강한 자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 이게 성탄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도적인 연약함, 자기 겸비, 이것을 통하여 폭력으로 무장한 우리 인간의 마을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폭력의 사정권 내에 당신의 몸을 드러내놓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기 비움의 실체이시고 화신이시고요.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당신은 완전히 비무장으로 들어오십니다. 여러분 방학 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읽어보세요. 만화책 같이 읽힙니다. 이번에 제가 <복음과 상황> 12월호에 그 독후감을 실어놨으니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BC 44315일에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당했거든요. 로마원로원 300명 중에서 14명이 시저를 찔렀는데 칼로 23방을 찔렀습니다. 칼에 찔리는 그 날이 315일 오전 830분경 출근하기 전에 찔렸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무슨일이 있었느냐면 로마원로원 300명을 모아 놓고 종신독재관인 시저가 선서를 받았습니다. 이제 종신독재관인 율리어스 카이사르를 절대 개인적으로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그 전에 카이사르는 튼튼한 게르만 사병 경호대를 14명 데리고 다녔습니다. 종신독재관 황제는 14명의 호위를 받으며 다니거든요. 14명의 호위를 받으면 공격을 못하겠죠? 그런데 그 전날 선서를 받았습니다. 카시오스 브루투스, 세네카의 졸병들 14명이 집합해, 우리도 율리어스 카이사르를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거든요. 다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14명의 호위병을 무장해제하고 철수시키고 로마황제가 호위병이 없이 로마거리를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의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다가 그만 830분에 찔린 거예요. 14명이 와서 23방을 찔렀는데, 한 방이 심장에 들어가서 죽었거든요. 그런데 이 율리어스 시저가 로마원로원 자기 적대자들이 득실거리는 그곳에 비무장으로 들어가는 그 행위가 매우 위험한 행위였거든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일구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폭력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화염병을 집어 던지는 순간 더 큰 국가의 폭력을 초래합니다. 폭력에 조금이라도 의존하게 되면 폭력을 합법적으로 가지는 헌법적인 폭력기관인 국가와 경찰에게 당합니다. 우리가 데모할 때 폭력은 일시적으로라도 쓰면 안 됩니다.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에 짓이김 당하면서 피 흘리면서 끌려가야 경찰서가 무서워하지, 폭력에 폭력으로 덤벼들면 안 됩니다. 우리 성탄절은 비폭력, 무저항, 원수마을 진입하기입니다. 나에게 철책선이 쳐진 집에 심방하는 것, 나에게 철책선을 치고 냉기를 흘린 사람에게 문자 보내서 화해를 요청하는 것, 이게 성탄절에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누가복음 951-52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절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예수님의 사정을 알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갈릴리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지나서 예루살렘 가는 것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싫어한단 말이에요. ? 사마리아 사람들이 BC 125년에 누구에게 공격받았어요? 예루살렘 유다 사람들한테 공격받은 거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사마리아가 목적지라면 괜찮은데,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중요합니다. 54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요한과 야고보 상당히 대담합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이 말 뒤에 중세 사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고 구원하려 왔노라, 이런 말이 있어요. 예수님의 유머가 작렬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정신없는 말을 하면 예수님도 가끔은 이렇게 답변했는데,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고 구원하려 왔노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예수님이 사마리아에 들어갔을 때 환영 일색이 아니라 냉랭한 거절과 배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간 거죠. 여러분 우리가 화해를 하려고 할 때는 환영일색의 첫 반응이 없더라도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화해하려고 마음먹으면 굴욕을 무릅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했는데 첫 프러포즈를 거절당했다가 두 번째 세 번째에 성공한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보통 부부사이의 인연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대개 A라는 일방이 타방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결혼이 성사된 커플들은 그 모든 굴욕과 불편과 불친절과 냉대를 경험하고 끝까지 만남을 무릅쓰고 마침내 마음을 얻어서 극적인 결혼에 이르지, 한 번 거절당했다고 불을 내려 주소서, 저주를 퍼부으면 안 되는 거죠. 친구끼리도 마찬가지에요. 친구가 친구를 속상해하고 화해를 할 때 친구가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화해를 마음먹은 당사자는 굴욕을 무릅쓰고 냉대와 푸대접, 철책선 같은 냉대와 공격을 받는 것, 그래야 화해가 일어나는 거죠. 그래야겠죠? 예수님이 참 고독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때 사마리아 사람들을 원망했다기보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더 문제의식을 많이 느끼지 않았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가 사마리아를 에워쌌거든요. 사마리아를 왕따 시킨 거예요. 누가요?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람들이요. 그런데 강력한 대예루살렘과 갈릴리의 결속, 사마리아를 향한 적대적 결속의 분열을 가져왔어요.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인데 사마리아를 우정과 화해의 이름으로 다시 끌어들이려고 해요. 예수님 머릿속에는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가 항상 마음속에 있던 거죠. 우리가 북한 동포를 배제하고, 96천 평방킬로미터에 만족하는 남한 같은 사람이 될지, 아니면 북한 동포를 항상 머릿속에 생각하면서 제가 설교를 하더라도, 제가 글을 쓰더라도 북한동포를 고려하고 대언할 것인지, 북한 동포는 없는 자처럼 여길 것인지, 북한 동포는 아예 버린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말을 하고 설교를 하고 논문을 쓸 것인지, 이건 굉장히 중요하죠. 내 마음속에 이미 통일이 됐고, 내 마음속에 북으로 가는 분단의 철책선이 걷어치워진 사람이라면 내 마음속에는 북한동포가 여기 앉아 있는 걸 전제하고 설교하는 것이죠. 문익환 목사님하고 똑같은 일을 한 겁니다. 문익환 목사가 처음 북한에 갔을 때 얼마나 남한에서 충격을 받았습니까? 남한에서 북한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어요? 임수경 문익환 목사가 갔을 때, 그런데 세계사에서 앞으로 분단의 극복이 일어나고 통일이 됐을 때는 89년의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아마 굉장히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결국 1976년의 동베를린 사건, 동맹사건 이런 것이 윤이상 씨가 관여된 사건입니다. 프랑스에 있는 작가 화가 이영로, 동베를린에 있는 윤이상 등이 북한 공작원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와 70년대는 북한이 우리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습니다. 75년까지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기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김일성은 지금 말하면 완전히 스타였습니다. 1975년에 북한 사진, 평양사진은 화보집이 돼서 유럽 유학생들에 쫙 깔렸는데, 그때 유럽 유학생이 평양의 사진을 보고 극동의 비엔나라는 극찬을 하면서 평양에 대한 사모열정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동베를린 유학생들은 북한 화보집과 북한이 사회주의로 성공을 해서 소득이 굉장히 높고, 전 인민이 엄청 잘 사는 걸 듣고 북한을 사모하는 열정이 많아져서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공작원과 접촉을 했습니다. 그게 동베를린 사건입니다. 동베를린 사건이 그렇게 국가의 체제를 뒤흔드는 사건이라기보다는 20대 청춘의 모험심입니다. 내가 북한을 칭찬한다 하더라도 그게 뭐가 대수겠느냐,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사건이 엄청난 국가 체제를 전복하는 사건으로 둔갑이 돼서 유학생들이 일망타진됩니다. 참 돌이켜보면 우리가 얼마나 자신이 없었으면 유학생들이 북한 몇 명 갔다고 고문을 해서 사람을 죽이는 이런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르는가 싶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들어가는 것은 동베를린 사건의 당사자 피해자들, 윤이상 같은 젊은 유학생들이 북한에 가는 것과 똑같이 너무 무모한 일이었고, 거기 가는 일 자체가 북한에 대한 찬양이고 거기 가는 것 자체가 북한에 대한 긍정이고 남한에 대한 부정이다, 이런 식의 양단논법을 구사합니다. 예수님이 들어갑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이 당시 탈무드 기록에 보면 얼굴을 내밀고 외간 남자와 대화하는 여자는 간음입니다. 얼굴을 바짝 내미는 것을 아랍사회에서는 성적인 유혹이라고 봤습니다. 얼굴을 왜 가렸느냐면 아랍사회에서는 고대 베두인 족속들이 텐트에 살았기 때문에, 주택에 살지 않고 바짝 붙어 있는 텐트에 살았기 때문에 얼굴을 내미는 순간 성적 아이덴티티를 공개하는 것으로 봤고, 일종의 잠재적 유혹행위로 봤기 때문에 얼굴을 내자마자 난교가 벌어졌습니다. 베두인족속안에서는요. 지금 이 사람들은 베두인 족속, 사마리아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성의 얼굴을 내미는 것은 성적 정체성의 공개를 의미했고, 남성을 잠재적으로 유혹하는 행위로 봤기 때문에 얼굴을 전신 가리게 만들었습니다. 여성의 성적 아이덴티티를 가리는 것은 여성억압의 일원이 아니라 결혼의 신성성을 나름대로 보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얼굴을 활짝 편 채 외간남자와 대화하는 것은 정상적인 남편의 아내라면 그것이 이혼사유가 됩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남편이 없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용해서 갑자기 찌릿찌릿한 계시가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네가 말하는 이 여자는 남편이 없단다다다, 이렇게 계시가 온 게 아니에요. 그런 모르소 기호가 온 게 아니라 얼굴을 바짝 대고 자유롭게 대화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정상적인 부부관계의 속박에 있는 분이 아닌 것을 안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남편을 데려오라고 한 것이고, 그 당시의 관습을 이해하면 이 자유롭고 대담한 대화의 상황이 얼마나 이 자매님이 대단한 자매님이고 그 시대의 제약을 넘으려고 했는가를 알 수 있죠. 아마 이 분은 대담했고 시대의 제약을 넘으려고 했던 잔 다르크 같은 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남자가 말을 걸면 차도르와 부르카를 찬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하면 안 됩니다. 이 분은 낮 12시에 물을 뜨러 온 것도 좀 이상하지만, 대개 오전 6시 오후 6시에 물 뜨러오는 상황에 정오에 물 뜨러 온 것도 이상하지만 예수님께 담박 대화를 받아서 예수님 수작을 되받는 것 자체가 대담함의 극치입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벌써 여자와 남자의 사이에 있는 깊은 간격과 철책선을 아는 겁니다. 여자인 나에게이중적인 철책,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철책을 당신은 넘었고, 사마리아인와 유대인 사이에 있는 철책을 넘었다, 어찌하여 당신은 이중철책을 사뿐히 넘어버리느냐,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암시하는 말을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영생입니다.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예수님은 말을 복잡하게 하시죠? 내가, 라고 하지 않고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예수님은 분위기를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합니다. 지금 물을 안 주니 짜증이 나셨는지 어쨌든 간에 물도 안 주고 자꾸 이런 말을 하니까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이렇게 말함으로써 여인이 예수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순식간에 전환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배가 고프시고 목이 말라 오셔서 대화를 하는데 물을 안 주니까, 네가 오히려 나에게 간청하는 상황으로 역전됐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마 이때 10절과 11절 사이에 지문이 있었다면 이런 지문이 있었을 겁니다. 여자 이때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예수에게 주다, 이렇게 지문이 있었을 텐데요. ‘여자가 이르되 주여처음으로 주여입니다. 당신이 아니라 주여입니다.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우리가 우물이 깊다는 걸 알죠. 옛날 마을에 우물이 얼마나 깊어요? 10미터 이상 팠는데,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자매님은 생수를 샘근처에서 바로 솟아오르는 그 물로 이해한 겁니다. 미네랄과 마그네슘이 많이 녹아있죠? 샘 근처에서 바로 솟아오르고 용솟음치는 그 물이 이분이 이해하기에는 생수입니다. 물이 깊고 그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저 밑까지 바가지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어떻게 두레박도 없는데 그 물을 길어낼 수 있습니까? 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이 우물보다 더 멋진 우물을 당신이 팔 수 있습니까? 이 여자가 서서히 성경실력과 구원사 실력과 신앙에 조예 깊은 역량을 드러냅니다. 이 사람이 사마리아의 대표적인 지성인임을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마리아 입장에서 철저하게 말하거든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야곱의 우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마신 사람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이 사람이 물을 메타포로 이해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볼 때 이 물은 하나의 메타포, 은유거든요. 여자는 이 물에 관한 대화를 여전히 문자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즉 한번 마시면 영생하도록 스스로 솟아나는 샘물, 한 번 물을 마셨는데 마시자마자 다시 물 길러 오지도 않고 수고할 필요도 없는 일상의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매우 신비한 그 물을 나에게 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물은 성령을 가리키거든요. 하나님의 선물도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준다는 그 말을 물을 준다는 말,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이 자매님이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예언서의 기록을 몰라요. 사마리아인들은 예언서를 읽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말은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요엘서에 나오는 말인데, 이런 예언서들을 읽지 않고 사마리아 오경이라는 모세오경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시대에 대한 예언이 없는 겁니다. 사마리아와 유대와 예루살렘 등 모든 섹터들, 적대적인 그룹들이 화해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선물을 받아 마시면서 하나가 된다는 그런 시대를 예언하는 걸 모릅니다.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예언서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이 분은 원래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물 길러 오는 수고는 당연한 것이고 즐거운 일이겠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한다면 일상의 노동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은 물 길러 오는 일상의 노동과 수고를 원치 않고 도피하고 싶습니다. 이런 수고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도피주의적인 병적구원을 원합니다. 도피적이고 병적구원을 원하니까 다시 예수님께서 현실로 소환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네가 지금 이런 물을 마셔서 잠적하고 싶고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까닭은 네게 지금 참 남편, 네 영혼을 결속시킬 가정관계가 없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네 남편을 불러 오라라고 합니다. 17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오늘 남편이 없다는 말은 이 여인이 정규가정생활에서 낙오한 사람인 걸 알 수 있죠. 이 사람은 사마리아 동네 전체에서 소외된 사람입니다.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에 정상적인 여인들의 동아리에서도 탈퇴했습니다. 남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목이 마릅니다. 그는 실제로 삶이 거추장스러운 사람입니다. 물 길러 오는 일이 귀찮습니다. 출퇴근하는 일이 귀찮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갈증을 느끼는 존재, 갈증은 인간의 피조성을 상기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마시면서 내가 피조물임을 기뻐하고 찬양합니다. 물을 마실 필요도 없는 존재,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물을 먹을 필요도 없는 존재, 그건 죽는 거죠. 갈증을 안 느끼려면 죽는 거죠. 이분이 기대하는 구원은 죽음과 같은 구원, 일상의 노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구원, 그 구원을 지금 원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는 일상생활을 도피하게 만드는 구원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도피하고 수고하는 일들의 가치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도피주의적인 구원, 이 세상의 거친 세파에서 이겨가면서 돕는 구원이 아니라 그걸 회피하게 만들고 그런 수고들을 무가치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구원, 죽음의 잠과 같은 그런 구원이 있는 거거든요. 그게 민중의 아편입니다. 유물론자들이 민중의 아편이라고 기독교를 정의했을 때는 기독교가 신앙을 갖자마자 현실에 대해서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있는, 즉 이미 자기가 천국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현실에 매일 감당해야 할 일상의 노동을 감당하기도 싫어하는 사람들, 그게 바로 아편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아편을 먹은 사람들의 특징은 일상생활의 탈구입니다. 민중의 아편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이 들어가면 시민사회에서의 정치적 무관심, 이 땅에 일어나는 잘못된 문화의 대립적인 사명감, 가족관계 친구관계 등의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결속감이 와해가 됩니다. ? 무책임과 무관심과 무관여 정신 때문에요. 아편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에서 탈구시키기 때문에 아편을 많이 복용하면 기분은 몽롱하게 좋습니다. 그러나 아편의 과도복용은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유폐와 고립이 일어납니다. 이분은 아편 같은 구원을 원한 겁니다. ? 물 길러 오지도 않고 다시는 물마시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원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런 구원을 원치 않고 남편을 불러와서 이 세상의 위력을 더하는 구원, 이 세상의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적대심의 담벼락을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현실을 재구성하는 그런 구원을 우리 예수님은 주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마시지 않으면 우리의 목마름은 끝이 없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여자는 남편이라는 존재를 그냥 성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여성의 공민권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남편입니다. 고대 아주 잘못된 셈족의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공민권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이건 매우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공민권,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산입니까? 우리가 사람답다는 것이 우리 자신만으로는 안 되고 남편과 같은 우리의 공민권과 인권을 보장해주는 부수적인 부가장치가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오늘 날 우리가 맞이하는 무신론적인 상황이고 하나님 없는 세상의 특징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그 자신으로 우리 존엄성을 보장해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샘물을 마시면 내가 하나도 사회적 부가적 서포트가 없더라도 내가 당당한 하나님 백성이고,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성령의 선물을 마시는 사람, 이게 바로 성만찬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이죠? 성령을 마시는 것이 고린도전서 10, 성령을 선물로 마시는 이 상태는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 마시는 공동체로써 남편과 같은 존재의 지지 없이 성령을 받아 마시는 그 상태가 하나님께 결속되는, 주체적 결속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종의 영 민주주의 공동체입니다. 은사민주주의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선물로 마시는 공동체에 참여할 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강력한 결속감과 당당한 주체적 소속감을 갖게 됩니다. 우리 이 자매님은 야곱의 우물에 의존했습니다. 한때 좋았던 과거의 자기영광에 의존했습니다. 야곱에 의존했습니다. 그다음 남편을 다섯 명씩 바꿔치기하면서 남편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 선물을 알기 전까지는 그는 인간적 방편으로 자신의 존재를 구축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을 터트림으로써 이 여인의 인생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것은 야곱의 우물과 같은 구원사의 전승에 대한 회복이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 생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수를 선물로 주실 분이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읽을 때 마음속으로 한 가지 깨달아야 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마실 때까지 우리의 방황은 끝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 마실 때까지는 내가 도덕적으로 성취하고 내가 이 지상에서 얻은 모든 성취물들은 내 갈증을 심회시킬 뿐이라는 것, 내가 많이 얻을수록 내 갈증은 깊어지고, 내가 많이 가질수록 내 갈증은 깊어지고, 내가 돈을 많이 가지고 내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이 갈증이 해소되고 구원의 안도감에 도달해야 하는데, 내가 많이 가지고 성취하고 얻을수록 구원의 안도감에 도달하고 충만한 충족감에 도달하기 보다는 허기와 갈증에 계속 시달린다는 것, 그래서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1페이지에 나옵니다. 첫 장에 나와요. 당신이 우리를 만드신 그 방법이 특이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추구하기 전까지 당신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고 소유하기 전까지는 쉴 수 없게 만드셨으므로 내가 당신을 내 마음속에 모시기 전까지는 내가 안식을 누릴 수 없나이다, 그런 말을 썼어요. 어거스틴 <고백록> 1-9권까지 방학 때 읽어보십시오. 이런 독서를 많이 하는지 궁금합니다. 무슨 책을 읽는지, 이런 책을 20대 때 읽지 않고 무얼 하고 있는지, <고백록> 1-9권까지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좋습니다. <고백록> 1페이지, 다시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당신을 추구하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영혼을 사모하도록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 설계도가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여 소유할 때까지 내 방황은 끝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했거든. 오늘 우리가 주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들이키는 주일이 되길 바라고 올해가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선물을 우리 마음에 주시기 전까지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기 전까지는 우리의 방황은 끝이 없고 우리의 남편 찾기는 끝이 없고, 우리 야곱 우물에 잠기는 권위에 대한 헛된 의존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목마른 시간, 우리 인생의 허기가 극에 달한 그 시간에 우리 누추한 우물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생수를 선물로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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