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 /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책은 이 책입니다. 랍 벨 목사님이 쓴 <사랑이 이긴다>, 포이에마에서 출판한 책인데 편집자가 저에게 이 책의 추천사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추천사를 쓸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여러 사람 추천을 받았는데 리처드 마우 김민웅 권연경 양희송 김영봉 목사님 등이 추천사를 썼습니다. 이 책의 핵심은 장로교 신학의 이중예정, 어떤 사람은 심판으로 예정돼 있고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예정돼 있다는 이중예정을 감리교전통의 신학으로 철두철미하게 반박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전체주제는 요한복음 3장 16절과 디모데전서 2장 4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람이 강조한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까지 입니다. 그 뒤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이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심판과 구원으로 인간의 운명이 갈린다는 것, 이건 굉장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상과 다르다고 봅니다. 이 책의 대부분이 제가 평소에 주장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저자는 성경주장보다 더 마음씨가 좋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운명을 갈라내는 심판을 많이 약화시키거나 희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맥락은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느냐면 심판을 소위 믿음 좋다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안 나오는 얄미운 사람들을 향해서 심판의 언어를 가지고 자꾸 공격을 하니까 그 공격으로부터 막아내려고 하는 것, 그건 좋습니다. 그런데 히틀러나 희대의 살인마들마저도 지옥 같은 심판을 받는다는 사상들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성경보다 더 나갑니다. 그런데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중에서 심판복음을 맹렬하게 펼친 사람들은 1929년 이전에 프린스턴신학교 교수들이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교 교수, 1711년의 제1대 알렉산더 아치 볼트 교수, 벤저민 웨필드, 알렉산더 하지, 찰스 하지, 이런 사람들이 프린스턴의 교수를 하면서 1712년부터 1929년까지 약 130년간 미국 보수주의 신학을 집대성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보수주의 신학을 집대성한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출신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잔 낙스의 후계자인데, 잔 낙스는 누구의 후계자입니까? 칼빈의 후계자입니다. 잔 낙스는 칼빈에게서 이중예정을 배웠고,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세운 도시가 프린스턴이란 도시입니다. 그런데 프린스턴 잔 낙스보다 이중예정론이 더 강한 곳이 네덜란드 개혁교회입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칼빈의 2차적 후계자들입니다. 정식으로 칼빈에게 배운 사람들이 아니라 칼빈에게 배운 사람들에게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세운 학교가 미국의 칼빈 칼리지, 칼빈 세미나리입니다. 이 네덜란드 계통의 교수가 게르하르트 보스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읽고 있는 <성경신학>의 저자인 게르하르트 보스가 네덜란드 사람들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신학이 더해지니까 더 견고한 이중예정론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싹을 틔웠고 이것이 미국 신학을 지배했고, 미국 장로교를 쭉 지배했다고 보면 됩니다. 1929년까지 한경직 목사님이 공부하던 이때까지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 이중예정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는데, 1929년에 이중예정론을 완화시키는 신정통주의 신학이 들어왔습니다. 이 신정통주의 신학은 칼 바라트라는 사람이 주창한 신학입니다. 칼 바르트의 이중예정론은 쉽게 말해서 이중예정론을 현대인의 감수성에 맞게 완화했는데, 사랑의 예정은 영원하지만 비대칭적인 예정입니다. 사랑의 예정은 영원한 예정이지만 심판 받기로 한 이 예정은 심판받을만한 몸에 많은 책임이 있다, 이런 식으로 봤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운명이 수메르의 운명토판에 나온 것처럼 영원히 심판 받도록 예정된 사람, 그런 것을 믿었던 네덜란드 개혁 장로교회와 프린스턴에 왔던 일련의 경직된 이중예정론과는 달리 어떤 사람을 영혼이 태어나기도 전에 운명이 결정됐다고 하는 이런 사상이 완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랍 벨 목사가 이 책을 쓸 때는 미국 사람들이 12살 이하로 죽은 사람, 12살 보다 더 어릴 때 죽으며 다 천국 갑니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런데 13살이나 15살 때 죽으면 천국 못 간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미국 사람들 대체적으로. 그런데 어떤 사람의 15세 된 딸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 아이는 12세에 죽지 않고 15세에 죽어서 불행을 당한 겁니다. 기독교인이 와서 물었습니다. 예수 믿었나요? 아니오, 제 딸은 평소에 무신론자를 자청하고 다녔다는데요. 그러면 희망이 없군요. 쯧쯧,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 책에는 안 나옵니다. <복음과 상황>의 이종연 자매라는 기자가 있는데, 경북 영천의 장례식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4남 1녀의 아버지였습니다. 좋은 남편이었고 성실한 아버지였습니다. 5남매, 4남 1녀를 키웠기 때문에 이미 엄청나게 애국시민의 역할을 다한 겁니다. 큰 범죄를 짓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예수를 영접하거나 교회를 다닌 적은 없습니다. 지옥 갔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가 내려갔을 때, 목사님 우리 아버지 어디 가셨습니까? 묻길래 당신 아버지는 지옥은 최소한 일단 안 갔습니다, 지옥가려면 매우 복잡한 자격이 필요한데 지옥은 아닙니다,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이 맞습니다. 다윗도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요시아도 죽어서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으면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구약의 표현입니다. 열조란 말은 우리가 죽었을 때 다시 씨족공동체로 일렬종대로 모인다는 겁니다. 그런 기록만 있고, 아버지는 아마 지옥은 절대 안 갔을 거니까 일단 걱정은 마시고 대한민국보다 더 나쁜 곳은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이 자매님이 신학자인 제가 이 말을 하니까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위로를 받는 겁니다. 지옥 안 갔다는 말 때문에, 저도 모르죠. 모르는데 지옥 갔다는 그 확신은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을 제가 한 겁니다. 저는 지옥 갔다는 확신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한 거죠.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죽어서 천당 갈 것인지 지옥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종의 영지, 신령한 지식을 전파하는 곳으로 교회를 생각하기 때문에 진짜 이 땅의 지옥에 살고 있는 사람을 끄집어낼 생각보다는 죽어서 지옥 갈 것이냐 천국 갈 것이냐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 책이 비판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정통기독교에서 너무 이탈한 사람들입니다. 이 책은 8, 90% 다 수긍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여러분이 조심해서 읽어야 할 부분은 심판과 구원이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처리될 만큼 성경에서 부차적인가? 그걸 생각할 때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성경의 증언이 현대인의 감수성과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볼 때 매우 원시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심판과 구원의 두 길을 뚜렷이 제시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심판의 사상을 대체로 완화시키는 것은 독일신학자들입니다. 독일은 이미 2차 세계대전 때 지옥을 경험했고 불심판을 경험했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말을 하면 파르르 떨면서 집단 악몽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심판이라는 말, 지옥이라는 말을 점점 독일신학자들은 뺐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직까지 그런 지옥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옥교리가 나오면 엄청 미국 신학자들이 독일 신학자들에 비해서 힘을 내면서 크게 용기를 냅니다. 진정 지옥을 맛보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미국에서 나온 신학들은 죽어서 지옥 갈 것인가 천국 갈 것인가를 확연하게 구분해주려고 하는 judgment한 심판적 언어, 정죄적 언어가 지배하는 신학이 미국 보수주의 신학이고, 미국 앨라배마 미시시피, 쉽게 말해서 bible belt 주라고 일컬어지는 미국 남부의 무조건 공화당 찍자식의 공화당 주, 그걸 bible belt state라고 합니다. 그 bible belt 사람들은 전부 다 아직도 천당과 지옥으로 그렇게 나눕니다. 그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는 이 책이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 책이 모든 악인에 대해서 일어날 심판마저도 완화시키거나 심판 자체가 사랑에 의해서 극복될 거라는 믿음을 보편적으로 교조적으로 전달한다면 그건 지나친 해석이라는 게 제 입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에 글을 쓰진 않았습니다. 제가 이걸 추천사를 쓰면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시리즈가 매우 힘들어지고, 일단은 판매량이 떨어집니다. 김회권 지옥 없다더라, 이런 말이 나가면 큰일 납니다. 그러면 가향교회도 힘들어지고 모든 게 힘들어지기 때문에 저는 그 논란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전파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때 세상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 공동체를 가리키지 온 세상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일차적인 맥락은 하나님이 자기를 배척하는 타락한 백성마저도 사랑하사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심판의 와중에 있는 그런 녀석들도 사랑하사 놋뱀 되시는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놋뱀과 불뱀으로 변증법적인 교차를 하면서 이어져왔던 구속사, 우리 하나님이 만일 사랑을 베푸시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역사에는 놋뱀의 역사는 없고 불뱀의 역사만 계속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도 개인적으로 잘 보십시오. 불뱀의 역사도 있는 반면에 불뱀에 물려서 심장의 파열을 겪는 고통의 순간도 있는 반면에 놋뱀을 보고 쳐다보는 우발적 은혜의 역사도 많았을 겁니다. 놋뱀을 보고 쳐다보는 것은 우발적 은혜입니다. 내 공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내 인생의 도상에 나타난 은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나의 분투와 나의 노력과 나의 도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간신히 우리가 맛보는 구원을 주시지 않고, 값없고 예기치 않은 구원을 주셔서 우리의 불뱀, 우리 인생의 고통 문제를 해결해주실 때가 너무 많은 겁니다. 그래서 개인의 인생도 죄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불뱀에게 물리는 시간과 그 불뱀에게 물렸던 고통의 순간을 순식간에 무효화시키고 치료해버리는 놋뱀의 치료사건, 이것이 개인의 인생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가정도 나타나고 한 국가도 나타나고 인류 전체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범례적으로, 하나의 모범이 되어 나타난 역사가, 놋뱀과 불뱀의 역사가 이렇게 매우 모범적으로 기록된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할 때 세상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 역사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은 괄호하고, 1장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때 세상의 대상은 자기 백성, 자기 땅입니다. 2차적으로는 온 세상입니다. 왜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상을 대표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대표하여 특별하게 범례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인간의 행동을 보는 것이고, 인간이 저지른 모든 형상을 이스라엘 역사 안에 보는 것이고, 인간의 구원열망을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본다는 말이죠. 이게 범례적 역사, 이스라엘 역사가 범례적 역사라는 말입니다. 범례적 역사란 말은 매우 우호적으로 닮을 역사란 말이 아니라 모범과 비모범으로 둘 다 범례가 된다, 패러다임이 된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여전히 불뱀이 무는 상태가 계속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랍벨의 이 책이 너무 참신하고 속이 시원하면서도 여전히 해명이 안 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놋뱀, 우발적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생이 어떻게 됩니까? 여전히 불뱀에 물린 심장파열적 고통은 계속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문제입니다. 이 책이 본문으로 삼았던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 희망사항이죠. 가정법입니다. I wish I could fly. 무슨 말이에요? 가정법 과거, In fact I am not a bird. 나는 진짜 새가 아닌데 과정법 과거로 I wish I could fly. 새처럼 날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가정법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원하는 것이지 작정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신비가 있습니다. 어떤 신비가 있느냐면 이중예정론이 매우 원시적이고 잔혹한 교리이지만 그런 교리가 아니면 납득할 수 없는 교리가 너무 많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기를 작정했다면 이 세상이 이 모양으로 안 되는데, 이렇게 나쁜 운명의 일도 너무 많은데, 그러면 그 사람의 모든 불행이 그 사람이 안 믿어서 일어났나? 이렇게 말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이중예정은 잔인한 교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기대를 아직까지 남겨 놓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지금 당장 불행에 빠뜨렸지만 그 불행이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온 불행이라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푸셔야 한다는 느낌을 준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요한복음 9장,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자마자 제자들이 뭐라고 했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너무 동양적이고 한국적이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불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불구상태가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드러내는 욥과 같은 고난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중예정도 하나님보다 크진 않아요. 이중예정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중예정보다 더 크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영원성을 믿는다면 이중예정교리가 갖는 어처구니없는 모순도 참아낼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린 것처럼 보여도 우리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우리 하나님이 궁극적으로는 하실 일을 남겨둔 상태라고 믿으면 된다는 거죠. 이중예정, 지금 현재 예정 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충분히 주는 너무 불행한 사람, 광주 인하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한 그 불쌍한 농아들, 이런 불행한 사람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남아있다, 이 말은 미완성 작품이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아직 남아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만족을 아직까지 일으키지 못한 존재,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고 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라고 한 존재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기 시작한 거예요. 창세기 1장 31절까지는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이래로는 죄와 죽음이 들어오면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면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지금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끝나지 않은 채 나오는 장애인도 많고 불구자도 많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완전치 못하여 하나님께서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피조물이 많다는 거예요. 지금 현재는, 이런 하나님의 불만족 상태 안에서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심판하시기도 하고 구원하시기도 한단 말이에요. 어떤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하나님 마음씨가 얼마나 좋은데, 하면서 랍벨처럼 모든 사람에게 사랑만 강조하면 너무 좋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히틀러 같은 너무 악한 인간도 있단 말이에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런 사람도 하나님이 구원을 받기 원하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한다, 그렇게 말하는데 현실성이 있다면 그건 좋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심판과 구원의 운명이 갈리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행로가 뚜렷이 대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란 말이에요. 요한복음은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불뱀에 물린 자들을 살려주시는 놋뱀,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은 너무 좋은 것이 심판과 구원의 비대칭성을 강조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구원하려고 했다가 구원을 받지 않으려고 한 사람을 심판해 버려둔다, 이런 뜻으로 비대칭적입니다. 비대칭적이란 말이 무엇인지 알겠죠? 보자마자 하나님께서 구원, 심판 이렇게 한 분이 아니라 일단 모든 사람을 불러서 전부 다 구원의 복음을 받아 구원받도록 설득하셨는데 끝까지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 자체가 심판을 받은 것처럼 되는 그런 심판을 원하셨다, 이게 바로 비대칭적인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건 어떤 교리보다 낫습니까? 네덜란드 개혁장로교회, 경직된 칼빈주의자들보다 낫습니다. 경직된 칼빈주의자와 네덜란드 개혁장로회는 흑인이 저렇게 노예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다, 이것입니다. 불행한 모든 사람도 하나님의 예정인 겁니다. 네덜란드 개혁장로교회는 핏덩이 딱 보자마자 이 놈이 예정되지 못했으면 세례 줘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나쁜 예정론입니다. 그런 건 성경에서 한참 어긋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구원의 복음 즉 놋뱀을 쳐다보라고 아우성치는 하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여전히 불뱀의 효력이 역사함으로 심판 안에 여전히 머무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심판과 구원의 대등성을 말하지 않고 비대등성 비대칭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하나님이 주신 구원 즉 놋뱀으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과 화해하고자 우리를 요청하는 그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불뱀의 독에 자유할 수 없다,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유대인공동체에게 정확하게 맞는 겁니다. 유대인공동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지 않고 다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 같은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누구를 선택했는가를 아세요? 유월절 특사에 예수 대신에 누구를 원했어요? 바라바, 바라바는 누구죠? 무장강도단입니다. 무장강도단인 바라바는 유대인 백성들을 상대로 무장강도짓을 했어요? 로마제국을 상대로 무장강도짓을 했어요? 유대군중이 로마제국을 상대로 무장강도한 그 사람을 원했죠? 유대인들이 원하는 원하는 구원이 로마제국을 타격해서 정치적 해방을 도모한 그런 구원임을 알 수 있죠. 그래서 예수를 포기하고 바라바를 선택하는 이 과정은 유대인 속에 로마제국에게 타격을 입히더라도 우리에게 정치적 자유와 해방을 주는 그런 메시아를 선택하고자 하는 욕구에 노출된 겁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30년 만에 누가 이스라엘과 유대의 민심을 장악합니까? 열심당원이 장악합니다. 열심당원이 누구에요? 지금 우리의 근본문제는 로마제국의 착취구조라고 생각해서 로마제국의 군사적 지배를 몰아내고,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스키토폴리스에 있는 로마 10군단 5군단 등을 몰아내고 옛 다윗왕국 같이 유대인들 토착왕조에서 왕을 배출하는 이런 해방을 맛보아야 한다, 일종의 유대인 중심의 왕조가 로마제국보다 낫다고 믿는 지극히 근거없는 낙관론입니다. 이걸 가지고 구원을 원했어요. 그런데 결국은 유대민중이 예수님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켜서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끼리 똘똘뭉쳐서 계약공동체의 결속감을 유지하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삶을 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고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로마제국을 몰아낼 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쳤던 예수의 길 대신에 무력항쟁과 군사적 모험주의를 선동하는 그들을 선택했다는 것은 멸망입니다. 사실상 66년부터 70년 동안에 유대인의 국가요원이 거의 멸망당했습니다. 80년 동안에 유대인들 중에서 유대인이라고 할만한 움직임, AD 133-135년에 제2차 유대인 반란이 일어날 때까지 유대인은 아무런 존재도 없이 지냈습니다. 왜? 이때 거의 전멸해 버렸거든요. 유대전쟁 AD 66-70년에 유대인이 멸망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메시지는 인류전체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도 있는 반면에 당면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멸망과 구원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걸 먼저 알고 나서 인류 전체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 들여야 해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 당대에 맥락 안에서 먼저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선교지에서 추상적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걸 이해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 성경 이해는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 독생자를 믿으면 유대인이 어떻게 됐을까요? 로마제국에 대한 항쟁의지보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내적정화가 많이 일어났겠죠? 내적정화가 많이 일어나면 유대인공동체 사이의 결속감이 많이 일어났겠죠? 그러면 유대인 공동체의 결속감이 많이 일어나면 로마제국의 앞잡이가 돼서 세금을 가렴주구하는 동족 중의 배반자가 안 나타났겠죠? 로마제국 내에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세리가 안 생기면 로마제국이 이스라엘과 가나안 일대를 착취하는 데 어려웠겠죠? 그러면 그때 로마제국이 어떻게 합니까? 이 나라는 식민지배가 안 되겠구나, 자치왕국을 이루시오, 그때 자치왕국을 이룰 수 있는 나라가 나오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고 이스라엘 동포끼리 사이 좋게 살고 우애롭게 살고 동포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모든 이교적인 생활 습관을 버리고 회개하여 참 언약 공동체로써 재결성하고 재구성하여 새 이스라엘 공동체로 거듭나자고 호소했던 예수님 대신, 아니 토착 왕국이 필요해, 상비국가 관료조직이 필요해, 외교가 필요해, 로마제국과 거의 똑같은 국가적 기틀을 갖춘 그런 국가를 통하여 독립하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이런 열심당 주의 함정에 빠져버려요. 결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힘숭배에 빠져버립니다. 예수님을 거절한다는 말은 힘숭배, 조직 숭배, 군사력 숭배에 빠져버립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뭐가 됩니까? 내 하나님과 화해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자유케됨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을 누리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법을 터득합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심판을 자초해서 이 심판은 AD 66-70년에 멸망으로 심판 당했습니다. 이때만 심판 당했습니까? 정확하게 70년 후에 제2차 유대인봉기가 일어납니다. 제2차 유대인봉기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일어났습니다. 133년입니다. 이때 유명한 별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바르코크바와 그를 메시아라고 불렀던 랍비 아키바, 두 사람 다 무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랍비 아키바가 별의 아들 바르코크바라는 사람 스무 살 지도자에게 당신은 메시아다, 당신은 야곱의 별이다, 이렇게 하면서 독립운동을 주창했습니다. 너무 빨리 순식간에 멸절돼서 예루살렘은 완전히 유대인들 씨가 말라버린 도시가 됐어요. 그러고나서 1948년에 예루살렘에 유대인이 새로운 국가를 세운 거예요. 1800년 만에 유대인 국가가 나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멸망해버린 거예요. 이 멸망과 심판의 경험을 당대적 맥락에서 먼저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당대적 맥락에서 먼저 메시지를 전하신 후에 이것이 2차적으로 구원의 메시지가 되도록 설정해놨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하나님이 주신 이 독생자 예수를 통해서 오는 구원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힘을 숭배하게 되고 국가를 숭배하게 되고 강한 자를 숭배하게 되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랑의 실천보다는 우리가 지금 나눌 수 있는 나눔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맛보는 귀납적이고 이런 누적되고 사소한 구원의 경험보다는 한꺼번에 왕창 오는 구원 경험, 내가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그대로 존재하는 그런 구원, 영단번에 오는 구원을 원하면 예수님을 배척하게 돼버리죠. 이것이 이차적으로 우리한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오늘 날 예수를 믿는다는 말뜻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순종하여 자기를 비우고 순종하고 남은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게 구원받은 거예요. 이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이웃 사랑하면 오는 게 구원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잘 믿고 이웃 사랑하여 오는 선물이 구원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영적으로 친밀한 사랑을 경험하고 영적 소통을 나누며 이웃과 화평을 나누는 것 자체가 구원이지, 이렇게 살면 뒤에 오는 구원이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삶, 다시 말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삶, 말씀대로 사는 삶, 다시 말해서 사랑의 계명대로 실천하고 사는 삶이 영생이고 그게 구원이라는 겁니다. 영생과 구원은 뭡니까? 오밀조밀한 공동체에 결속되어 사는 것, 형제자매의 발을 씻기고 몸을 구부리고 하는 것, 이것이 구원이라는 겁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힌 네 마톱, 아힘 네샤프, 힌 네 마토, How sweet the brothers living together. 시편 133편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영생, 영생이라는 말은 불멸의 사랑, 절대로 소멸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공동체, 이게 영생입니다. 시간도 없고 엿가락처럼 오늘날의 일처럼 쭉 이어진 타임을 사는 것, 영생은 그게 아닙니다. 영생은 그게 아니라 불멸을 확신하는 사랑의 관계성, 우리 이 사랑은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렇게 멋진 사랑이 바로 영생, 영생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드리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는 것, 이것 자체가 영생이고 구원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살면 영생을 따로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영생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이 영생을 지금 누리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했어요? 죽어서 천국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자 청년이 그렇게 물은 게 아닙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부자청년이, 죽어서 천국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물었다면, 그건 네가 잘 죽으면 된다, 이렇게 대답했을 텐데, 지금 영생을 여기서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네 재산을 다 팔아야 지금부터 영생을 맛본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랍벨이 그걸 잘 주석하고 있어요. 결론 맺습니다. 심판과 구원은 분명히 인생의 두 행로 맞습니다. 저는 구원 받는 사람이 심판 받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심판과 구원은 운명이 아니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복음을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주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리지널 듣지 못하고, 원형을 듣지 못하고 교회만 딱 봐서 너무 악해 보이는 인간들 때문에 교회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 전부 다 지옥가는가? 그렇게만 말하면 그건 너무 과잉진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잘 모른다, 이렇게 말해야 하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그걸 무진장 강조해야 합니다. 절대로 지옥갔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간디도 지옥갔다, 이순신도 지옥갔다, 이런 말들은 성경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도 아니고 거짓확신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강조해야 할 것은 우리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돌보고자 놋뱀을 파송하신 우리 하나님의 그 집요한 사랑, 이 사랑에 모든 인간의 운명은 걸려 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당장 나에게 오지 않더라도 나는 억울하지 않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 것, 이 사랑을 알고 죽는 것이 구원이다, 이런 생각이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심판은 구원과 대등한 하나의 운명이라기보다는 구원을 거부한 자가 어쩔 수 없이 가는 운명입니다. 정답을 포기한 자는 어떻게 됩니까? 정답을 포기한 자의 운명은 오답밖에 업습니다. 그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한 가지 도덕적 설명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면 심판을 받습니까?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것 때문에 심판을 자초한다 그랬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에 이화여대에서 전국성경교사학회에서 특강을 했답니다. 그때 김진홍 목사가 대구대표로 출전해서 박정희 대통령 특강을 들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특강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는 대구 사범학교 다닐 때 대구교회에서 장로들이 싸움질 하는 걸 보고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싸움질 그만하십시오, 이런 특강을 내용으로 했답니다. 이런 박정희 대통령 같은 경우는 아주 억울한 경우입니다. 아주 질이 나쁜 장로들의 싸움판을 보고 교회 다니는 것을 그만둔 것, 그건 박정희 대통령이 교회를 안 다닌 게 아니라 교회에서 쫓김을 당한 겁니다. 퀘이크타운에서 변호사였던 간디가 백인교회로 갔습니다. 인도의 브라만계급도 아니고 크샤트리아도 아니고 바이샤 제3계급 출신 간디가 갔더니 교회 출입문을 확 닫으면서, No entry, 유색인에게는 입장이 불가하다면서 문을 꽝 닫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간디는 교회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까지 전부 다 지옥을 말하는 것은 요한복음과 관련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구원의 복음을 거절한 사람이 가는 길은 구원의 복음을 거절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 행위가 악한 사람은 빛을 택할 능력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다운 이중예정론을 설명하는 데 더 좋습니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어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때문에 빛을 거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심판론입니다. 이런 심판론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랍벨 마저도 이 본문을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겁니다. 저는 이런 심판이 있다고 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받아 사는 사람이고, 영생을 지금 이 땅에서 누리는 백성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진짜 하나님 사랑을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길은 우리 또한 이 세상에 파송된 독생자처럼 사는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생자는 뭡니까? 상처를 좌치함으로 자기 생명력을 나누어주는 것, 현기증이 들만큼 피를 흘려주는 것, 사랑의 종노릇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이런 소소한 일상의 거리에서 독생자급 순종이 누적될 때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빛의 공동체가 넓어지는 것, 이것이 오늘 날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초청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한국교회가 참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서 복음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여 독생성자의 복음을 빛내 온 세상에 널리 비추는 공동체가 되게 해 주시고, 우리 가향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놋뱀을 영접하여 독생성자의 길을 따르는 지체들로 가득 찬 동아리가 되게 해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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