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 요한복음 3장 11-16절은 우리가 그토록 집착해마지 않는 영생의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전제할 것은 영생, 개인의 영혼이 죽어서 천국 간다는 개인별 단위의 천국 간다는 영생개념은 신구약 전체에서 너무 낯설다, 개인이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비유적으로 말했거나 간접적으로 말했거나 암시적으로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 본문 말씀에서 교리를 이끌어낼 만큼 그렇게 체계적인 진술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영생교리를 성경 안에서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성경의 대부분은 이 땅에서 이뤄지는 신적교제, 전폭적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동된 사람들의 신적교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신적교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99% 이야기 했다, 그걸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라 할 때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시간도 없는 낙원상태의 무시간적인, 갈등도 없고 선택의 고통도 없는 그런 일종의 숨은 모드로 가는 저준위욕망단계의 사람들, 욕망이 아주 없어져버린 사람들이 있죠? 저준위 욕망, 이런 말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도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저 사람을 보고도 연애하고 싶다, 이런 마음도 안 일어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욱 있는 저준위, 욕망의 단위가 떨어져버린 사람들, 공동묘지 비슷한 사람들, 좀비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악도 없고 선도 없는 그런 의미의 내세는 성경이 약속하지 않았다, 분명하고요. 그다음에 이거 한 번 보세요.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 하였으니,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 조상에게로 돌아갔다고 돼 있습니다. 솔로몬도 조상에게로 돌아갔고 했습니다. 대부분이 조상에게로 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씨족 공동체로 모인다고 했습니다. 구약 사람들은 죽으면 음부에서 씨족공동체로 다시 집합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조상에게로 갑니다. 선악 판단 전에 죽으면 일단 어디로 갑니까? 조상에게 간다, 그게 구약사상입니다. 이것이 BC 4세기부터 332년부터 헬레니즘 그리스사상이 시리아 일대를 완전히 정복했습니다. 그리스 사상이 물밀 듯이 왔습니다. 그리스 사상 중에서 피타고라스의 사상과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사상, 영혼은 불멸하고 육체는 썩고 죽으면 영혼이 신과 합하여 가는 사회, 소크라테스 <향연>에 나오는 영혼이분설이 시리아 일대를 다 덮쳤습니다. 그때 유대교들도 시리아 일대에 범람하는 영혼이원론에 과감한 세례를 받습니다. 그때 이후로 나온 것이 외경입니다. 외경과 위경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양침략 이래로 그리스의 이원론과 영혼불멸성과 육체 멸시설, 육체를 멸시하고 영혼을 존귀하게 보는 이런 그리스적 이원론, 소크라테스적 이원론이 시리아 일대를 다 점령하고 범람했는데, 그 시리아의 일부가 유대 땅이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개인구원론을 과감하게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개인구원론은 각각 개별적인 운명을 논합니다. 이것은 매우 구약에서 낯섭니다. 그래서 개인구원이 나오면서 개인구원론에 관한 것이 외경 또는 위경, 구약 안에 들어오지 못한 60여개의 외경 또는 위경이 있습니다. 14편 정도의 위경은 77년에 나온 신구약 공동번역이 있습니다. 가톨릭은 그걸 정경의 일부라고 보지만 우리는 그걸 보지 않죠. 그런데 보면 내세신앙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내세는 영생, 요한복음은 에베소에 있는 소아시아 터키 지방에 있는 시리아 종교, 이원론 종교, 여러분이 에베소라는 말뜻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는 고대 밀레투스학파의 그리스, 탈레스의 고향으로 보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그리스 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터키 해변을 쭉 올라가서 그리스를 연접하고 있는 이 해변을 이오니아 지방이라고 합니다. 이 이오니아 지방에서 탈레스 철학 이오니아 철학이 나온 거죠. 그러니까 터키는 그리스 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탈레스가 그리스 사람입니다. 헤로도토스도 그리스 사람인데 전부 다 터키 사람입니다. 터키 사람을 전부 다 그리스 사람이라고 했어요. 왜? 그리스 식민지였기 때문에요. 밀레투스라고 하는 지역, 사도바울께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를 불렀죠. 사도행전 20장의 밀레투스, 밀레투스 옆에 있는 에베소, 에베소라는 곳에 있는 목회자가 요한입니다. 요한은 시리아 헬레니즘 사상을 많이 받았던 민중들의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영생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는 정말로 구약에서 희귀한 단어입니다. 구약이 꿈꾸는 최고의 구원은 이것입니다. 이 땅에서 외부 침략 없이 각자 자기 포도나무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서 농사를 짓고 사는 평화로운 자작농민들의 공동체,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이 어디에 나와요? 시편 133편에 나오죠. 마 힌네 마토 하노임,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게 바로 영생이잖아요. 영생은 형제자매가 오순도순 살면서 강력한 공동체적 유대감과 결속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봤단 말이에요. 영생을 외부의 침략과 천재지변의 공격으로부터 삶의 테두리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사는 것을 말했어요. 구약에서는 영원히 길게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보지 않고 질적으로, 해고의 위험이 없고, 거주지를 옮겨야 할 위험이 없는. 그게 저 같은 경우는 영생이 아닙니다. 매일 집을 보러 오기 때문에, 이 좋은 집을 언제 떠나나 이런 불안이 나에게 침범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불안과 내가 익숙하니까 괜찮지만 계속 집을 보러 갑니다. 거주지를 바꾸기 때문에 이건 영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안양도 영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형제자매가 같이 살긴 하지만 전셋집에 살기 때문에 주인이 언제든지 나가라 하면 공동체가 위험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말한 영생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trickle down 하나님의 은혜가 신령한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 만민에게 밑바닥까지 퍼져 내리는 것,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들판을 적시는 것,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공동체 구성원의 마음을 윤택하게 해서 풍요롭게 사는 것, 번영을 누리는 삶,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영생은 경제적 풍요, 공동체 구성원 간의 두터운 우애, 외적과 천재지변의 위험이 없는 안정된 삶,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각자의 운명을 영생과 영벌로 나눈 고도의 파편주의적이고 원자주의적인 구원관과 영생관은 신약에서 등장하는데 그게 시리아 종교의 특징입니다. 시리아 종교의 특징은 구원종교입니다. 즉 개별적 단위로 적용되는 구원종교, 이게 시리아 종교입니다. 이 시리아 종교의 개별적 단위 개개인 단위의 구원과 멸망을 선고해주는 그 영향은 어디서 왔을까? 토착 시리아 종교 플러스 BC 332년에 페르시아가 15만 대군을 가지고도 알렉산더 대왕의 5만 명을 물리치지 못해서 졌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진출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리스상인들이 엄청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리스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그리스철학이 페르시아에 다 퍼졌습니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그리스의 사람들이 영향을 준 곳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입니다. 시리아 터키 소아시아 지방이 그리스 이원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용어가 직간접적으로 암시가 많다, 왜? 에베소라는 곳은 이오니아학파 밀레투스학파와 매우 가까워서 영혼 이원론이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리스 사상에 너무 깊숙이 물들어버린 구약사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 사상에 물들었던 요한복음을 히브리적 고유사상으로 풀려고 한 사람이 튀빙겐 대학의 마틴 헹겔, 김세윤 박사, 이런 사람들입니다. 저는 마틴 헹겔과 김세윤 박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저도 요한복음을 그리스적 영향에서 보지 않고 히브리적 사상에서도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영생이라고 할 때, 우리 마음을 개인적인 주제로 조급하게 만드는 주제가 이 영생입니다. 내가 영생을 받을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안 들지만, 구약성경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 하나님 나라의 종합적인 통치 사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구원받을 것인가에 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에게 구원을 준다고만 하면 우리 담임목사님과 우리교회가 엉망이 돼도 된다는 걸 몰윤리적인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소망교회에서 당회록 권사회의록이 공개가 됐습니다. 뉴스앤조이에 공개가 됐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담임목사님이 7계명을 좀 어기면 어때? 우리 담임목사님이 교회 돈을 좀 쓰면 어때? 권사님 말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시는 분인데, 여의도에 있는 머리 좀 훤한 그분께서도 똑같은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인데, 그 말에 성도들이 지금도 아멘합니다. 여러분께서 얼마 전 피디수첩 보신 분들 알겠지만, 여러분 우리 집은 아간이 아닙니다,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멘 하면서 그 목사님은 이미 아들에게 간음죄로 성범죄자로 고발당했습니다. 재산축적 이건 말이 아니죠. 그런데 이 분이 말하기를 저희 집은 아간의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하니까 성도들이 다 아멘 하는데 그 이유는 조용기 목사님이 구원을 매개하는 분으로 보이는 겁니다. 구원을 매개하기만 하면 도덕을 묻지 않는 겁니다. 이건 JMS도 마찬가지입니다. JMS의 이단 정명석의 강의록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JMS 선생님이 여자 성도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다 하더라도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 아니냐? 그런 말이 강의록에 나옵니다. 우리 선생님을 defence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개인구원이 우상숭배가 됐습니다. 이건 굉장히 기독교적 구원과 다릅니다. 구원을 우상 숭배하는 건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구원을 우상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선시 하면 진짜 구원 받은 겁니다. 다시 말해 이런 겁니다. 제가 지지난주에 말씀드린 펄시 콜레가 쓴 <내가 본 천국>, 옛날 우리 한국에 수백만부가 팔린 <휴거>라는 책을 보면 보잉 747기 기장이 하나님께서 휴거시키니까 가버립니다. 올라간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겁니다. 어떤 게 구원이냐면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독생자를 사람으로 보내셨는데 제가 구원받지 못한 나의 승객을 놓고 나만 구원받다가 이들이 산산조각 파편으로 변하는 게 아버지 뜻이 아닙니다, 저는 저를 불러올리는 게 하나님 아님을 믿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들과 함께 착륙하겠습니다, 불타는 세계로 내려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참으로 보유한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이지, 그 사람이 보잉 747기 승객을 두고 올라가는 곳이 천국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천국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니고데모는 책망을 받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이스라엘 선생으로 알지 못하는 이유는 한 세계의 최고를 이룬 선생님이 오히려 새로운 계시에 둔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이고 인습적인 구원지혜에 통달한 사람이 새로운 하나님의 신선한 계시에 민감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프톨레마이우스 BC 2세기 3세기 사람 맞죠? 이 사람이 우주관을 만들었죠? 프톨레마이우스 우주관, 엄청 두꺼운 책을 읽으면, 천동설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거기에 아멘을 하고 거기에 감동을 받아버리면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의 말을 들을 때 이해가 안 되겠죠? 그런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선생,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갱신으로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기까지는 이스라엘에 희망이 없다고 한 에스겔 36장과 예레미야 31장과 같은 이러한 계시의 말씀들을 줄 치고 주목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선생님이라도 거듭난다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책망 받습니다. 11절부터 매우 중요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이때 ‘우리가’ 예수님일 수도 있고 사도요한일수도 있고 요한복음의 저자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서 중요한 질문에 답할 설교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만, 믿어야마 구원받는다는 말은 굉장히 헬레니즘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믿자마자 구원받는다는 것은 시리아 종교, 동방종교,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은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는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구체적입니다. 아하스 왕이 지금 북이스라엘과 아람 군대에 포위돼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그 두 왕에게 항복하지도 않고 앗수르 왕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줄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줄 것을 믿으면 두 침략군에게 나라를 빼앗기지도 않고, 앗수르 제국에게도 종주봉신계약을 굴욕적으로 맺지 않아도 됩니다. 구원받는데 그런 식입니다. 구약에서 믿는다는 말을 할 때, 그런데 지금 신약에서는 믿자마자 영생과 영벌로 갈리는 이런 아주 개인주의적이고 원자화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럼 왜 요한복음이 이렇게 쓰였는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아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증언, 하늘의 증언, 이런 말을 씁니다. 이렇게 해야만 시리아 터키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청충들에게 이방인들이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해야만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이 말은 굉장히 신적으로 보증된 계시를 전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전파한다는 뜻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하늘에서 내려온 증언,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이 하늘의 일은 괄호하고, 13-15절입니다. 하늘 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지탱하기 위하여 불뱀에 물려서 민족전멸의 위기를 당할 때마다 극적인 용서장치를 베푸셔서 민족전멸의 위기를 항상 막아주신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 이게 하늘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요약합니다.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민족전멸의 위기를 당한 이스라엘 백성을 극적으로 용서하심으로 되살려내신 역사, 이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리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방법,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적인 사랑을 베푸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상처 받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 인간의 참혹한 배신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신 겁니다. 독생자 보내기 전에는 누구를 계속 보낸 거죠?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인간에게 계속 놋뱀을 보낸 거죠. 최초의 놋뱀은 누굴까요? 창세기 3장에서 놋뱀은 누구에요?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 이스라엘 백성이 1년에 한 번씩 대용서를 받는 게 무엇이죠? 대속죄제, 아사셀의 염소, 유월절의 어린 양,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공동체성을 누가 담보했습니까? 죄로 인해서 파괴되고 민족전멸의 위기를 당했을 때, 출애굽기 32장에서는요? 금송아지 우상숭배했을 대 모세가 진노함으로 그걸 깨뜨렸어요. 그때 집어 들었던 놋뱀은 무엇이었죠? 모세의 목숨을 담보한 중보기도, 그게 또 놋뱀이죠? 모든 순간에 민족전멸의 위기 때마다 놋뱀이 계속 들려졌죠?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 일, 이스라엘 역사를 놋뱀과 불뱀 처럼의 역사로 압축 요약하시는 예수님의 말을 이해를 못한다, 니고데모가 지금 이해를 못하는 이게 하늘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 예수님이 정말로 통찰력이 많으신 분이다, 우리 예수님은 구약역사를 민수기 21장 21-28절, 제가 이번에 참 독특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믿는다, 이 말은 내가 어떤 검사나 경찰한테 전화해서 믿습니다 하는 건 사건이 잘 해결될 걸 믿는 거죠? 그렇죠? 어제 수업시간에 반장한테 보강을 하겠다고 강의실을 구해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전혀 믿음이 충족되지 못했어요. 한 30분 수업이 늦게 시작됐어요. 이 아이가 무책임했기 때문에, 그런데 나는 이 아이를 앞으로 장학금을 추천하기 위해서, 이 아이가 0.025 차이로 4.0이 안 돼서 저한테 학점을 고쳐달라고 하소연 하는 걸 제가 안 고쳐줘서 장학금을 받지 못한 아이입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에 부담이 돼서 이 아이를 장학생으로 추천하려고 하는데 봉사실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 반장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아버지가 목사님인데, 너무 무책임한 겁니다. 전학기 반장이 모든 일을 처리했는데, 이러면서 제가 그 아이를 두 번 다시 안 믿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 번 믿음을 주면 계속 신실하게 믿음성을 유지해주는 분이 있는데, 이번에 제가 이 수첩을 오사카 버스에 놓고 일본에 미야코 토요시마라고 하는 가쿠인 대학에 국제담당 자매님이 있는데, 이 자매님이 시종일관 영어도 잘하면서 굉장히 신실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미야코 자매님한테 제 명함을 주면서 이 수첩을 찾으면 보내달라고 했거든요. 제가 왜 그 사람을 왜 믿었느냐면 이 사람은 너무 확실한 완전히 Made in Japan 사람이에요. 믿음 신실 책임 친절 모든 일본 사람의 장점을 다 갖춘 사람이에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열흘 만에 온다는데 나흘만에 온 거예요. 다시 한 번 미야코 토요시마에 대해서 신뢰가 가는 거예요. 사람을 제가 믿었을 때 이걸 제가 다시 찾아온 것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왔어요. 이 사람이 분명히 찾아 줄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저는 안심을 했어요. 믿을 때 믿음의 시행효과를 미리 보는 게 영생이거든요.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천국 갈 영생을 지금 내가 선취하는 거예요. 이게 믿는 거예요.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과 진짜 실체를 만지기 전에 완전한 걸 맛보기 전에 미리 맛보기만 맛봐도 영생을 맛보는 것거든요. 미리 맛보는 것이 영생이거든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지를 믿는다는 말을 가리켜요. 예수님 독생자를 믿는다는 말은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죄 용서 의지를 믿는다는 말이고, 내 인생을 갱신하셔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으로 삼으실 걸 믿는데, 그걸 믿으면 성령이 내 믿음에 응답을 하는 거예요. 성령의 응답이 없으면 내 믿음이 하나님께 접수가 안 된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자마자, 그 이름을 믿자마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징표인 성령의 역사가 와야 해요. 그래서 내가 믿었는데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고 있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내 믿음은 영접이 안 된 거예요. 이거 조심해야 해요. 이건 정말 delicated 한 이슈에요. 대부분은 되는데, 어떤 사람은 믿었다고 하는데 성령의 역사가 없어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권세를 주셨다 괄호하고 로마서 8장 15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권세거든요.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권세거든요. 하나님 아버지 나라 왕국을 영접하고 상속하는 권세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나라를 상속하기 때문에 지상의 재산상속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쓴단 말이에요. 아버지가 주시면 받긴 하는데 아버지가 안 줘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 재산이 있단 말이에요. 재산이라는 말은 이상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아버지 나라를 상속할 것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실제로 지상의 물욕이 점점 없어져요. 저는 점점 그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세상의 물욕이 없는 이유는 도덕적 수양의 결과가 아닙니다. 완전히 믿음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영악한 이해타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자마자 성령의 역사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은 무엇이냐? 하나님 아버지 나라를 상속할 것을 앞당겨 맛 봄, 우리가 지상에서 맛보는 것은 성령의 내주함으로 지속적 기도성을 가능케함, 둘째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은사가 현저하게 개발됨, 즉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로써 이웃 사랑하는 것이 좋을지 나의 재능과 나의 숨은 은사가 꽃이 핌, 지극적 위용성이 있는 재능을 발굴케 함, 세 번째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닮아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 이것이 지금 미리 맛 봄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기도생활함, 둘째로 성령의 은사와 재능이 현저하게 개발됨, 그래서 직업적 타당성 직업적 보편성 위용성이 발견됨,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나옵니다. 그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남, 마지막에 세월이 갈수록 내가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보화의 상속자임을 믿게 됨, 이건 여러분이 너무 젊기 때문에 실감이 안 날 수 있습니다. 지금 가진 돈도 너무 많은데 하나님 나라까지 볼 게 있느냐,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영생은 죄가 해결된 사람에게 있는 성령이 감히 들어와 살아주심이거든요. 죄가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성호를 언제든지 칠 수 있고, 성령을 파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우리가 unpredictable한 weather, 불가예측적인 날씨 같은 성품이 있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constant한 아주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될 때만 우리 하나님이 와서 내주하기로 결정을 하기 때문에 믿음은 성령내주로 화답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순간 우리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즉 근원적 불순종 의지와 불순종 충동이 쇠약해지거나 꺾여버립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을 믿어야, 예수가 내 대신 놋뱀이 되셔서 내 죄로 인해서 불뱀에 물려 괴롭고 고달픈 내 인생이 죄의 공격을 그만 받도록 높이 쳐들리셨음을 믿는 것, 놋뱀인 그 예수님을 쳐다보는 순간 불뱀의 독의 흐름이 정지됨, 이 생화학적인 반응, 총체적 영적 반응이 일어나는 게 바로 영생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누리는 겁니다. 영생의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생을 누리는 사람의 특징은 기도 생활하는 거예요. 두 번째로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타남, 이런 영생을 하면 반드시 공동체에 소속되게 돼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 내가 내 은사와 열매로 섬길 공동체, 나를 보완해주고 나를 함양해줄 공동체에 소속되게 돼 있습니다. 공동체에 소속될 때 영생의 실체를 느긋하게 느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자기를 가리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빌라도 나옵니까? 여기 유다 나와요? 버리고 간 제자 이야기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십자가는 누구와 누구의 이야기가 돼 버립니까? 공관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방적인 1인 모노드라마가 돼버립니다. 십자가는 요한복음에서 1인 모노드라마가 돼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쳐서 번쩍 들어 올린 사건이에요. 빌라도와 유다 예수님 제자가 무슨 수작을 건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아버지가 독생자를 꽁꽁 쳐서 번쩍 쳐 올린 사건이에요. 번쩍 쳐 올린 사건이 뭐죠? 십자가에 번쩍 쳐 들려 올려진 사건, 수치스러운 매 맞은 사건, 놋뱀과 타격당한 인자, 망치와 못에 찔린 그 몸과 쳐 들려진 놋뱀은 똑같단 말이에요. 놋뱀을 쳐다보고 죄사함을 받은 것과 똑같은 효과가 초대교회에 나왔단 말이에요. 초대교회가 그러 경험을 했다는 게 중요해요. 우리가 이런 경험이 없는 건 왜 그럴까? 지금 우리도 있습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몰랐을 때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을 대부분 몰랐을 때 높이 쳐들린 놋뱀에 구원을 받았는데, 그때 제 영적인 수준인 죄 문제로 엄청 고뇌하던 때입니다. 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때, 놋뱀이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내 인생에 해답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고 나서 뒤에 구약을 천천히 공부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을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 높이 쳐들린 놋뱀은 모든 보편적인 인간의 영적 죄책감, 하나님과 접촉하고자 하는 모든 열망에 보편적인 호소를 가집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브레이드너의 일기라는 마지막 사역을 보면, 데이비드 브레이드너라는 사람이 29세에 죽었죠. 26세부터 29세 마지막 4년 동안에 뉴저지 뉴욕 일대에서 했던 인디언 사역을 보면 인디언들이 십자가의 보혈 설교를 듣고, 십자가 놋뱀 설교를 듣고, 예수님의 대속설교를 듣고 너무 많은 인디언들이 찾아왔습니다. 구약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요. 그리고 전부 다 자기 죄를 회개하는데 인디언 토속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데, 전부 다 구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 예수의 이름은 놋뱀입니다. 높이 쳐들린 놋뱀, 예수 이름은 우리가 받아야 할 채찍질을 맞은 놋뱀입니다. 예수 이름은 불뱀에 물린 보편적 인류 전부를 위하여 들리어진 초이스라엘적 초시온적 초골고다적 놋뱀입니다. 모든 세계만민의 눈에 들리어진 놋뱀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민에게 예수님을 일단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민이 한번은 보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민에게 나가야 합니다. 왜? 예수님 놋뱀 이 메타포는 보편적 호소력이 있습니다. 구약을 몰라도 있습니다. 죄로 시달림 받은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놋뱀이라는 소리를 듣고 금방 깨달을 수 있고, 여기가 구원이구나, 하면서 불뱀의 위력을 즉시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 이름을 따르는 자, 영생은 요한복음 17장 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괄호하고, 친밀하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미 영생 안에 와 있는 사람의 특징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기도의 내성이 있는 사람, 성령의 은사와 재능이 꽃피워 개발되는 사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히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하나님 나라의 자비가 교환된 통치권을 행사하는 사람, 여기서 중요합니다.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이 말이 자칫 잘못하면 교황권을 강화하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은 참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행사하는 하나님 나라 맞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 온다는 것은 하나님 믿는 사람이 이 땅의 모든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주도권을 쥔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사람들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의 주도권을 쥔다는 말이지, 당장 권력부터 잡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권력도 잡겠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만일에 보편적인 호소를 가지고 모든 다수 사람들에게 청빈과 의로움과 매사 공공적 이타심의 화신이 된다면 전부 다 도지사가 되겠죠? 그래서 마지막에 마태복음 19장 28절,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하나님 나라 상속이라는 말에 지상적 실현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의 주도권을 빼앗듯이 이 땅의 운명권과 이 땅의 제도적 운영권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책임감을 맡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참여하지 않고, 그러면 기독교정당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건 다음에 또 다룰 문제인데, 다른 모든 정당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완전히 배척할 때는 기독교 이름으로 정당을 만들 수 있지만 지금 대부분의 정당들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어떤 면으로든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이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유보, 죽어서 예수님 와서 우당탕해서 완전히 해줄 때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그래서 칼 헨리가 쓴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이라는 책이 중간단계의 사회참여가 왜 필요한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조짐은 어디에 있죠? 예수님 닮은 도지사가 나타나는 것, 예수님 닮은 총장님이 나타나는 것, 예수님 닮은 목사님이 나타나는 것, 악당들이 당회장을 하도록 내버려둬야겠습니까? 진짜 좋은 분이 당회장을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제도 있는 걸 고칠 수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포지션, 지위를 야심으로 볼 것이 아니라 책임감의 영역으로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국회에도 진출해야 하고, 시장도 돼야 합니다. 자 이때 우리는 너무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시장선거에 나가려면, 정치하면 더러워진다는데, 더러운 걸 너무나 두려워하여 정치를 안 하면 오대산 월정사로 가서 스님이 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움을 무릅쓰고라도 세상에 참여해야합니다. 여러분이 순결해야 할뿐만 아니라 세상 참여의 모험심도 갖춰야 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내려놓음>만 일단 너무 읽지 말고, <올려놓음>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성취해야 합니다. 내릴 것이 있는 사람은 내리는데 아무 것도 이루지도 못하고 <내려놓음>만 읽으면 안 됩니다. 이룬 것도 없는 사람이 겸손부터 배우면 안 됩니다. 먼저 이 세상에 적정성을 가지고 세상에 바른 운명을 위하여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유권자 운동, 시민운동조직, 정치참여, 사회참여, 시정 도민참여, 문제는 교회가 터부시합니다. 예를 들어 파주나 일산 같은 경우는 자전거 도로를 만들자고 여러번 주민청원이 있었습니다. 이건 우리나라 각 주요 교회나 시민들이 응원하면, 모든 도로와 인도에 자전거 도로를 만들자고 청원하면 시장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걸어다닐 수 있는 행복한 권리를 찾는데 교회가 그걸 안 합니다. 이런 걸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에너지를 아끼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 하나님 나라 상속자의 하나의 맛보기입니다. 이런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 예수님 주는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지금 이 땅에 앞당겨 맛봄, 개인의 인격에서 공동체에서 은사와 재능이 개발돼서 성품의 열매 결실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조금씩 하나님의 통치에 귀속시키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지향을 함으로써, 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돌보심, 죄사함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신 영생은 죽어서 혼백들이 누린 영생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영생이고, 이 세상을 구원하는 영생이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영생임을 믿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이 영생을 믿고 우리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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