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개인구원에 관한 말씀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교우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죽으면 천국 간다는 전래 민속종교에 나타나는 천당개념은 맞지 않습니다. 우리 전래 민속종교는 선을 쌓는 사람은 천당에 가고 악덕을 쌓는 사람은 지옥에 가거나 아니면 윤회에 의해서 축생으로 떨어진다, 축생은 인간세계보다 한참 아래입니다. 즉 동물로 태어납니다. 동물보다 더 심한 사람들,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은 아수라로 떨어집니다. 아수라는 불교적 악마들에 의해 불교세계에서 부처님의 agent 역할을 하는 벌주는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 전래민속종교는 천당이라는 개념을 서방전통 또는 천당이라는 개념을 아주 개인단위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전래민속종교의 천당개념이 우리 기독교의 구원개념과 접목되면서 우리가 바로 개인단위의 구원론에 익숙한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실로 말하건대 우리 구약성경은 개인단위로 받는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도 말하지 않지만 요한복음이 유난히 우리의 전래민속종교의 개념과 유사한 영생개념을 설파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다윗이 죽어 그 조상에게로 갔다고 돼 있습니다. 요시야왕도 죽어서 조상에게 가고 히스기야 왕도 죽어서 조상에게 갔습니다. 모든 믿음 있는 사람들이 조상에게 갔습니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이겁니다. 죽으면 일단 씨족 공동체로 집합됩니다. 모든 혼백들은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면 천당과 지옥과 같이 분명히 갈립니다. 영생으로 가는가 영벌로 가는가, 우리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이 논리를 구사합니다. 그럼 왜 성경에서는 개인단위로 천국가고 지옥 가는 영생과 영벌로 나눠지는 이런 일이 매우 희귀했는데, 왜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영생 영벌로 딱 나누었을까? 요한계시록도 영생과 영벌로 나누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변하는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맥락에서 추가가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계시가 추가가 됐다, 구약성경에서 희미하게 나왔던 것들을 이제 개인단위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이런 계시가 추가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추가가 왜 일어났는가가 중요합니다. BC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15만 명의 정규군을 가진 페르시아 왕을 물리치고 페르시아를 정복했습니다. 오늘날 인도까지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범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스의 모든 문화가 인도까지 범람을 했습니다. 그리스 문화가 집중범람해서 영향을 미친 곳이 터키지방과 시리아지방과 팔레스타인 지방입니다. 터키 지방 자체는 벌써 오래 전부터 그리스 식민지입니다. 그리스 철학자인 탈레스 밀레투스학파 이오니아학파 헤로도토스 전부 다 터키지방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전부 다 우리가 그리스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지역은 터키인데 왜 그리스 사람이라고 말하느냐면 그리스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오니아학파라고 하는 건 그리스 해변, 즉 터키해변입니다.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는 그 해변이 이오니아 해변입니다. 이오니아학파의 거부였던 탈레스도 거기에 살았습니다. 그 밑의 밀레투스학파의 밀레노도 거기에 살았습니다. 그 밀레투스랑 가장 가까이 있던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요한은 에베소의 목회자였습니다. 그리스철학이 맹렬하게 영향을 끼치던 곳, 그리스 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영혼은 불멸하고 육체는 소멸하여 영혼불멸설,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리스적 영생입니다. 이런 그리스적 영생이 요한복음의 청중들과 요한복음의 독자들에게 익숙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저자였던 요한은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개인단위의 영생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영생론을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구약과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아예 성경에서 빼 내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이걸 정경에서 빼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빼낼 만큼 그렇게 이질적인 게 아닙니다. 여전히 요한복음에는 영생개념을 그리스종교의 영향을 받은 영생개념과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종교에서는 죽으면 천당 가는 게 영생개념의 전부입니다만, 요한복음은 그리스적 영생개념을 원래 구약성경의 영생개념에다 절충을 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 그리스적 영생개념은 무엇입니까? 죽어서 시간도 없는 무시간적, 욕망도 많이 제거된 상태로 사는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 가는 곳, 혼백들이 가는 곳이 영생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생을 여러분 원합니까? 욕망이 제거된 영생이 좋아요? 선과 악을 선택할 지향점도 없는, 의지의 척추가 무너져버린 영생이 좋아요? 안 좋죠. 지능이 매우 떨어져버린 상태로써 오라우탄과 침팬지 수준으로 지능이 떨어져서 찬양하면 좋아요? 안 좋잖아요. 왜 영생개념이 희미하냐면 영생이란 말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결국엔 그런 영생밖에 생각을 못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곳, 저는 그런 영생을 별로 원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곳으로만 정의된 영생, 그리고 내가 지능이 약해서 하나님 보자마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단세포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런 영생을 원하지 않는데, 그런 영생을 말할 수밖에 없어요. 왜? 영생의 개념이 매우 희미하고 심지어 동방종교에서도 영생이 매우 약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의 영생개념도 이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로 영생이라 하면 하루 종일 하프를 치고 거문고를 타면서 천국 다니는 것, 하프가 좋지만 하루 종일 하프만 치는 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천국에 축구장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김형원 목사라는 복상의 동역자는 축구를 너무 좋아합니다. 이 분은 축구장이 많은 천국을 생각합니다. 잔디구장이 많은 천국을 생각하는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영생이 욕망이 거의 없어지고 죄를 거의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찬송하면서 돌아다니는 상태, 이게 천국이라면 저는 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천국은 부활한 인류의 삶과 거의 같다고 봅니다. 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거의 인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경험을 할 것이라고 보고, 노동이 있다고 보고, 선과 악의 유혹이 여전히 있다고 봅니다. 다만 변화된 천국에서는 악을 선택하지 않을 능력이 현저하게 많아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이지 욕망의 위험한 수위는 그대로 있다고 저는 봅니다. 왜 그런 암시가 있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여전히 천년 동안 갇혀 있는 사탄이 풀려난다는 지극한 암시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가는 천국도 여전히 욕망이 배제된 곳은 아니다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이 이렇게 개인단위의 구원과 영생을 자세히 말하는 까닭은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이미 개인단위로 구원받는 이야기가 너무 많았고 영생을 얻는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 청중의 수준에 맞게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그래서 오늘 같은 본문이 나왔다는 거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요한복음의 영생을 읽으면 사회문제가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믿고 천국 가버리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영생을 자꾸 읽으면 사회문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이 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위험함이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항상 공관복음서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요한복음만 읽으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만 읽으면 내가 받는 영생이 내 이웃에게 어떤 함의가 있는지 잘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영생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말함으로 영생을 지금 이 땅에서 취하는 영생으로 바꿔놨습니다. 요한복음 영생과 시리아 일대 헬레니즘 세계에 퍼진 영생의 가장 큰 차이, 요한복음은 영생의 현재성 지상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금 바로 영생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 바로 영생이 시작되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영생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습니다. 지금 영생을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영생이 바로 시편 133편에 있는 영생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자매가 한데 연합하여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때 형제자매는 서로 빈부격차가 있는 형제자매입니다. 높낮이가 다른 형제자매입니다. 해발 3천미터에 육박하는 높은 헐몬산,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즉 높은 산봉우리에 맺혀 있는 헐몬산 이슬이 시온의 들판을 적심같이,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퍼지는 상태, 하나님의 자애로운 초월적 은혜가 산봉우리에서 들판까지 윤택하게 하듯이 모든 사회구성원들, 밑바닥에 있는 구성원들까지 하나님의 통치혜택, 하나님의 자애로운 돌보심의 혜택을 누리는 상태가 바로 영생이라 본 거죠.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영생, 여전히 영생은 구약성경적 사회적 함의가 가득 찬 영생입니다. 다시 내가 내 이웃이 어떤지 몰라도 가버리는 영생이 아닙니다. 펄시 콜레가 쓴 <내가 본 천국>은 옥한흠 목사님 아들이 쓴 <아버지 옥한흠>에 조롱되고 있는 책입니다. 아버지를 조롱할 때 쓰인 책입니다. 아버지가 <내가 본 천국>을 수십만권 팔았죠? 조롱하고 비판하면서 하는 말이 그 책에 나옵니다. 그보다 더 위험한 책은 <휴거>라는 책입니다. 1980년대 수백만 권이 팔린 책인데, 이 책은 정말로 잘못된 이단이라고 할 만큼 잘못된 천국관을 가집니다. 보잉 747기 기장님이 휴거를 합니다. 휴거란 말은 끌어올려짐, 이런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한 군데만 나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우리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영화로운 상태에서 주를 영접한다, 우리가 변화된 상태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공중에 들어 올려져 중력의 법칙을 초월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문자로만 해석한 책이 <휴거>인데, 이 책은 기독교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절대다수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불구덩이 쑤셔 넣는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아멘이 한 순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순복음교인들과 사랑의 교회 교인들은 아멘을 너무 많이 남발한 겁니다. 이게 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만큼 차이가 납니다. 저는 그 책을 보고 끔찍했습니다. 보잉 747기 기장이 휴거됩니다. 잠수함기장이 올라갑니다. 그러면 잠수함에 있는 사람이 다 죽습니다. 그러면서 404장을 부릅니다. 옛날 404장에 나옵니다. 땅위에는 고통이 소스라쳐 올 때 나는 천국 가서 좋아하는 것, 이건 기독교적 양심과 도저히 양립이 안 됩니다. 참다운 기독교적 양심은 이겁니다. 하나님 저를 휴거시키시렵니까? 저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360명의 승객을 불구덩이에 집어 던지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그런 구원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이 360명의 승객과 함께 불타는 지상으로 착륙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고 참 하나님을 아는 자고 이런 사람이 많은 곳이 천국입니다. 바이바이하고 올라간 사람들은 아마 지옥에 갔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나라가 이런 책을 읽고 천국관 구원관 영생관을 갖춘 나라입니다. 얼마나 몰윤리적이고 몰가치적이고 반사회적인 기독교가 나오겠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영생은 구약에서 말한 영생과 같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는 인간은 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충동, 원시적인 동물적 충동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어서 항상 갈 때마다 그릇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내 안에 있는 무서운 척추 같은 의지를 꺾어주는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3-14절 보십시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이야기는 생각이 많이 들기 때문에 민수기 21장 1-8절 읽어야 합니다. 읽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 뜻을 이해합니다. 민수기 21장 1-8절에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즉 하나님께 집단 불순종을 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진격을 하면 안 되는 방향으로 진격을 해서 토착족속과 전쟁을 벌입니다. 벌써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과 정반대의 길로 가서 조급한 전쟁을 시작하면 민족이 전멸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 진격로를 막기 위하여 불뱀을 보내서 물게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집단멸절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의 진격로를 막기 위해 불뱀을 보냈습니다. 불뱀들이 물자마자 독이 퍼져서 죽기 시작했습니다. 그 죽는 상황에서 모세가 놋뱀 한 마리를 쳐서 불뱀의 독을 죽여 버린 뱀, 이런 뜻입니다. 불뱀의 독이 더 이상 역사하지 못하게 한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상당히 인간에게 알아듣기 쉬운 방법으로, 고대인의 약간의 미신적인 세계관에 합당한 방법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듭니다. 불뱀을 이스라엘 민족을 물어서 독이 퍼져 죽어가는 그 순간을 복잡한 체계적인 이론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시니 우리 하나님은 똑같은 불뱀 모양의 놋뱀을 만들어 쳐서 불뱀의 독 효력을 더 이상 역사하지 못 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불뱀을 죽인 거예요. 불뱀을 죽여서, 너를 물던 불뱀은 죽었다, 불뱀의 위력은 끝났다라는 하나님의 치료 선언을 믿게 만들려고, 즉 죽은 불뱀을 형상화한 놋뱀을 쳐들어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했다는 그 믿음을 갖도록 합니다. 높이 쳐들린 놋뱀을 쳐다봄으로 말미암아 불뱀의 독 효력이 중지되도록 하는 그 방법을 하나님이 순식간에 알려준 겁니다. 이 복잡한 말을 하나님이 그렇게 알려준 거예요. 얼마나 복잡해요. 불뱀에 물렸는데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하자,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논문을 쓸 수 없잖아요. 논문을 쓸 수 있는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서 불뱀의 효력이 끝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불뱀과 똑같은 형상된 뱀을 만들어서 쳐서 때려죽여서 불뱀이 더 이상 물지 못하게 한다는 사인이 보여주듯이 놋뱀을 쳐들었습니다. 그런데 놋뱀을 쳐다본 사람마다 더 이상 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는 굉장히 쉬운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신기한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놋뱀 이야기입니다. 놋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심판의 가혹한 위력이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을 쥐어 뜯고 이스라엘 민족을 부서뜨리고 상하는 그 순간마다 항상 극적인 용서를 선언함으로써 민족전멸의 위기를 막아냈다,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해요. 죄의 결과 파산적인 공격을 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을 때 극적인 용서의 선언, 이게 놋뱀입니다. 놋뱀은 극적용서의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에게 극적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혀 낫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2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하기 위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극적으로 모세의 생명을 건 중보기도를 통하여, 번쩍 쳐든 모세의 손을 통하여, 모세 자신의 생명을 담보한 기도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멸절위기를 항상 극적인 용서의지로 해소시켜 주시고, 살려주신 그 방법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놋뱀은 무엇이죠? 하나님의 죄 용서의지의 순간적이고 급진적인 대반전의 화해, 용서, 이게 놋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놋뱀을 번쩍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항상 민족전멸의 위기에서 구해주셨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이 70년동안 이방땅에 다 흩어졌을 때, 고레스칙령이라고 하는 놋뱀을 번쩍 쳐들어서 바벨론포로 14만 4천명이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한 마디로 불뱀에 물려 파멸돼 가던 역사를 놋뱀을 번쩍 들어 되살려낸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게는 집단적으로 경험됐지만 우리 개개인의 역사도 사실상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위기의 순간에 놋뱀을 들어 살리신 역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 역사를 집약적으로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예수님의 성경해석이 정말로 너무나 그 당시 랍리와 다르다, 너무나 그 당시 스승들과 다르다, 그 당시 스승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민수기 21장 1-8절을 가지고, 이렇게 간결하게 이스라엘 역사를 놋뱀과 불뱀의 역사로 정리한 걸 보고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인간 멸절의 역사를 놋뱀으로 항상 대반전시켜서 생명을 유지시켜 준 역사였다, 이것은 세계만민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만민의 역사 자체는 불뱀의 역사가 세계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항상 모든 각 나라와 각 민족과 각 가문에도 이런 대 반전의 역사가 항상 있어왔다는 겁니다. 16절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때 누가 믿느냐면 불뱀이 가슴을 물어서 심장이 파열될 만큼 정말로 답답한 사람이 놋뱀을 쳐다보게 됩니다. 이때 구약성경을 몰라도 됩니다. 아무 것도 몰라도 됩니다. 하나님의 초월적 구원이 없다면 내 생애는 끝났다고 느끼는 절박함 자체가 벌써 놋뱀을 쳐다보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놋뱀을 쳐다보고 이미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79년 10월에 구약을 모른 채 제 눈 앞에 번쩍 쳐들린 놋뱀을 쳐다봄으로 구원받고 한참 후에 구약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구약을 몰랐을 때도 쳐들린 놋뱀을 보고 구원을 받았던 까닭은 불뱀에 물려서 내 심장이 파열로 치닫고 있다는 걸 알았던 순간, 제 인생에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면 파열될 것 같은 극단한 위기에서 제가 놋뱀을 쳐다보고 영생을 받은 겁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모르더라도 내 삶의 성찰과 내 삶의 위기가 놋뱀을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위기라면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받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구원에 목마름이 극에 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지, 하나님의 영접의지, 하나님의 대반전, 이 전 죄를 모두 다 용서해버리고 묻지 않는 모든 죄를 다 해소시키시는,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낫는 방식으로 우리 하나님은 놋뱀을 쳐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 당신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는 순간 내가 참으로 믿었다면 반드시 성령의 내주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믿었다고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의 신적응답인 성령 내주가 동반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 인정 안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가 내 인생을 위하여 높이 쳐들린 놋뱀임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했습니다. 제가 79년 10월 17일에 믿었던 바 누구든지 김회권 청년의 인생에 나타났던 놋뱀을 믿고 그 순간 성령을 받았던 것과 똑같이 시차는 좀 다를지라도 예수 이름을 믿는 순간 반드시 성령의 내재를 경험하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로마서 8장 15절처럼 아바아버지라 부르짖는 기도가 시작됩니다. 탄생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하나님 아버지라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이라고는 불렀지만 아버지라고는 한 번도 안 불렀습니다. 저한테 누가 기도를 시키면 신이시여, 이렇게 기도했지, 천지신명이여, 신이여, 하나님이여, 이렇게 기도했지만 아버지라고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순간 이후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과 내가 일촌이 돼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아는 것,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아야만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내 죄를 다 대신 지셨습니다. 죄책감을 다 가져갔어요. 내 인생의 저주를 다 가져갔어요. 내가 나를 볼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없을 만큼 완전한 만족감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영생이고 믿음이고, 누구든지 예수를 높이 쳐들린 놋뱀으로 믿고 그를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데, 이 영생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며 그 아버지가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쳐들린 놋뱀의 상처를 아는 것이며, 쳐들린 놋뱀이 당했던 고난을 아는 것이며, 쳐들린 놋뱀이 당했던 무시무시한 고난의 역정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래서 영생이 임하면 지금 바로 영생이 시작됩니다. 영생은 사회적 함의가 매우 깊은 말입니다. 영생을 누리면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자매적 연합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친밀한 가족공동체로 접목됨, 이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영생을 누리는 순간 반드시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공동체에 접목이 됩니다. 공동체에 접목된 사람이 성령의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음에 진정성이 많습니다. 이건 안 됩니다. 구원 받았는데 영생을 받았는데 공동체와 전혀 떨어져 있고, 계속 공동체와 반대된 생각을 한다, 이건 제가 볼 때 약간 검증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이 시작됨을 어떻게 압니까?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기도생활 외에,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가득 나타납니다. 즉 재능과 나의 지어진 독특한 쓰임새가 발견됩니다. 두 번째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인격적으로 바뀝니다. 식물의 생장시기가 4개월이죠? 인간의 생장 시기는 4개월이 넘습니다. 인간은 열매가 나타날 때 4년이 걸릴 수도 있고 1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 다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영생을 누리는 걸 죽어봐야 아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검증 가능해요.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것, 내가 지금 영생의 열매가 안 맺히고 성령의 은사가 안 나타나면 영생이 시작되지 않은 겁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기도가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의 일상생활에 안 나타난다? 그러면 그건 영생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믿는 일부터 따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 시작된 사람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말 자체는 이 세상의 지배적 가치, 이 세상의 지배적 기구나 제도를 기독교적 가치, 하나님 아버지 성품을 닮은 가치로 제도를 바꾸고 법을 바꾸고 사회모습을 바꾸어가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 믿고 나서 천당갈 생각만 하고, 이 세상에 아무런 일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우리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가면 어떤 모양이든지 다스리는 일을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544장 찬송가 보면,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주와 함께 다스린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담에게 준 말이거든요. 다스림이 뭘까? 이건 많은 학자들의 논변이 있고 사변이 있습니다. 아마 불신자를 다스릴 가능성이 많다, 아니면 짐승을 다스린다, 아니면 아직까지 완전치 못한 성도를 다스린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스리는 것이 좋아서 갈 마음은 없고 우리 하나님과의 교제가 너무나 친밀하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이런 영생이 지금 바로 시작되고 지금 바로 이런 영생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요한복음이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그리스 오리엔탈리즘 영생보다는 훨씬 더 현재적인 영생을 말했고, 검증 가능하고 실현가능하고 확인 가능한 영생을 말했기 때문에 그리스적 영생보다는 훨씬 더 히브리적 영생, 즉 시편 133편의 영생과 같다고 믿습니다. 이런 요한복음 영생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요한일서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형제자매 사랑,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 완전히 이 세상의 각축과 갈등이 해소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충격을 일삼는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 나라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말을 듣고도 내가 죽어서야만 또는 예수님이 재림해서야만 내가 천국을 접수한다고 믿고 지금 이 땅에서 사회참여와 이 땅의 바른 정치 바른 경제 바른 문화가 들어서는데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주인의식이 없는 영생공동체가 아닐 가능성이 많은 겁니다. 영생공동체는 반드시 사회적 실천의 함의와 의무를 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영생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가는 영생과 다른 까닭은 여전히 구약성경적 영생입니다. 왜? 사회 실천적함의, 세상 변혁적 에너지를 품어내는 사랑의 강력한 실현 공동체가 영생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자기를 선한 독생자급 인생으로 바치는 것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각 시대와 각 문화와 국지적 공동체에서 자기를 쳐들려진 놋뱀처럼 자기를 희생시키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이끌어 오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기독교적인 의미의 영생이 많을수록 이 세상은 혜택을 보게 돼 있어요.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사에서 아직도 초대교회 사도행전 2-4장까지 이 경지를 빼고 나면 한 번도 속 시원히 기독교적 사랑의 영생공동체가 세상에 선한 임팩트를 눈부시게 끼친 역사가 너무 적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낙심이 되는 일입니다. 그만큼 어렵단 말인가?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는 죄의 법 아래, 죄의 독기운에 쓰러져 가는 우리를 순식간에 용서해주기 위하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대신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대신 수치를 받고 십자가에 높이 쳐들렸기 때문에, 십자가에 높이 쳐들린 이 굴욕적인 죽음이야 말로 놋뱀을 쳐든 하나님의 사건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놋뱀을 보고 살라고 하는 생명의 사인임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예수 믿어야만 영생을 얻습니다. 왜? 영생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의존적 순종밖에 없습니다. 의존하고 순종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나님을 껴안아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경외심을 가지고 고요히 순종하는 게 사랑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만드는 힘이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샘솟아나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율법의 요구를 이뤄지게 하기 때문에, 결국 예수 이름 믿자마자 성령 받고 나서 영생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 시작된 영생이야말로 사회적 함의가 가득 차서 선교가 가능합니다. 마무리 짓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영생 안에 머물고 있는가를 확인하려면 첫째 내가 자연발생적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기도가 내게 샘솟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내게 성령의 은사와 재능이 꽃 피고 있는가, 내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위해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 질서에 근접하도록 바꾸는 일에 이바지하고 있는가? 이걸 볼 때 내가 현재 영생을 누리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게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 그래서 이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게 우리가 지금 말한 영생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죄 씻음의 확신을 주는 성령이 우리 안에 역동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영생공동체의 일원이 돼서 역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늘 점검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를 가장 쉽게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훈령이 나에게 배달되고 있는가, 하나님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는 요구가 전달되고 있는가, 여러분이 이 설교를 듣는 것도 하나님 나라의 요구가 전달되는 과정이라면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 안에 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듣고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나라의 파발마 하나님 나라의 훈령과 명령이 전달되지 않는 거거든요. 가장 중요한 건 내 양심상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나라의 명령과 율법이 내 행동의 준칙이 되고 내가 바로 살수 있도록 격려하는 하나의 말속, 이정표가 되고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 나라 영토 안에 내가 이미 살고 있는가, 내가 영생공동체 안에 와 있는가를 점검하는 하나의 귀한 실험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역동적인 영생의 실험 자가진단이 많이 일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일에 앞장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영생공동체로 삼아주셔서 날이 갈수록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실감나는 느낌을 갖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예수 이름 믿고 성령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기도부터 시작해서, 성령의 열매부터 맺는 일에 앞장서서 우리가 영생공동체에 속했음을 감사함으로 기뻐하며 감격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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