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는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처음만난 만남이 아니라 오래된 관계성의 질적인 전환과정이라는 것, 그걸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셨을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3장 14절에 보면,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른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세례요한을 예수님을 많이 알고 있었고 자기보다 더 높은 분, 더 거룩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는 걸 반증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이미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마태복음 3장 15절에서 이렇게 당신이 회개의 죄책, 회개를 하라는 세례에 내가 참여해야만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니까 속히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요구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의를 이룸,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3장 15절, ‘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계약적 사람,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공동체 백성으로 초청하심,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속박감, 결박감, 책임감을 창조해주셔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 의무감과 일종의 거룩한 부담을 안겨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려고 했을 때 회개의 요구를 듣고 강물로 뛰어드는 사람은 언약백성입니다. 비록 더러워졌지만 하나님 율법의 요구에 자기가 속박돼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되지 않을지라도 회개해야 하는 필요성에 공감하고 요단강물에 뛰어드는 것, 이게 언약백성의 표지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세리와 창기와 창녀, 마태복음 17장에 창녀라는 말이 나옵니다. 창기 세리들이 요단강가로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창녀생활을 했던 사람도 요단강가에 몰려들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도 창녀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 언약백성의 신분을 놓친 것은 아닙니다.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유지하지만 그렇게 살지는 못한 겁니다. 그렇게 살지 못했던 지난날의 과거를 일괄 청산하는 작업이 요단강에 와서 세례를 받는 겁니다. 그런데 각각 다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입니다. 각각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마다 한 사람씩 죄를 자복하기 보다는 전부 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도 자기 죄를 자복하고 물에 풍덩 빠졌습니다. 물에 풍덩 빠졌던 이 과정이 바로 침례를 받는 과정인데, 자기 죄를 자복했기 때문에 전부 다 자기 죄를 자복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무슨 죄를 자복했는가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죄를 자복했을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무슨 죄를 자복했는가 모릅니다. 다만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중요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말이 예수님이 무슨 죄를 자복했는가를 짐작하게 만들어줍니다. 예수님은 아마 세상 죄, 유대인의 핵심 죄, 유대인의 탐욕과 교만, 유대인의 산산 조각난 언약공동체의 참상, 어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창녀로 살 수밖에 없고 양심을 오염시킬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의 조건들, 이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는 무한 책임추궁적인, 무한책임을 자기에게 전가시키는 죄사함 죄고백을 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슨 죄고백을 했느냐면 무한책임적인 죄책전가, 이 모든 사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사는 것, 한 사람은 왕이 되고, 한 사람은 친로마 앞잡이가 되고, 한 사람은 분봉왕이 되고, 한 사람은 세리가 되고, 한 사람은 창녀가 되고, 한 사람은 로마 10군단에 돼지고기를 납부하는 돼지고기 목장 주인이 되고, 한 사람은 세리가 되고 한 사람은 세리의 세금납부를 폭력적으로 집행하는 군병이 되고, 이렇게 사는, 이렇게 갈가리 찢겨져버린 언약백성공동체, 이렇게 서로 적대하면서 으르렁거리면서 부서져버린 언약공동체, 이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무한책임을 지는 고백을 했단 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자신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인류의 모든 죄가 하나님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입니다. 이 모든 죄의 참상이 나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아버지의 품속에 있던 그 독생자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이 모든 죄가 나 때문이라고 하는 것, 이게 바로 예수님의 죄책고백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의 저질러진 모든 죄악을 하나님 자신 책임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아버지 품속에 있던 예수님, 예수님이 이걸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무한책임추궁적인 자기책임전가를 한다는 말은 하나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죄에 대해 궁극적으로 무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고백이고 다짐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죄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책을 자기에게 전가시키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자기 가슴 속에다 전가시키십니다. 독생자의 완전한 순종의 바다에다 인류의 모든 오물 쓰레기 등을 갖다 바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만드신 영적 물리적 우주 안에서는 불순종은 순종을 통해서만 무효화되게 돼 있거든요. 불순종은 순종에 의해서만 무효화되는 원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영적 물리적 우주 안에서 통하는 법칙이거든요. 마이너스 10만큼 떨어진 사람들은 10 올라와야 원 위치에 오듯이 하나님의 마음과 10km미터 멀어진 사람들은 원래 상태로 가려면 10km 더 간 사람이 있어야만 마이너스 10km간 사람의 죄가 속해진단 말이에요. 이런 원리, poetic justice, 비례적 정의감이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안에 통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독생성자가 인류의 모든 죄를 자기 책임이라고 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 모든 인류의 모든 문명사적 죄악의 총아가 하나님 자신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런 형이상학적 분이 아니에요. 인간의 죄를 보고 손도 까딱하지 않고 안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히틀러의 만행 앞에 죽어간 그 죄책이 자기 책임이라고 보고, 더 극적으로 말하면 엘리 위즐처럼 말하면, <흑야>에 나오는 그 수사법으로 말하면 거기에 죽어간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뎅강뎅강 달린 희생자가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우리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만행들 죄책의 궁극적 피해자가 되시고, 이게 다 내 책임이라고 하시는 의사표시가 예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그런 고백을 한 겁니다. 굉장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한 더 이상 해답이 필요 없는 완전한 해결책, 예수님은 독생성자 예수님의 순종의 바다에 인류의 모든 불순종의 쓰레기를 다 갖다놓고 무효화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독생자가 오신 까닭은 불순종을 다 흡수해버린 겁니다. 블랙홀처럼, 불순종의 모든 만행들을 예수 안에서 다 가져간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직관적이고 통찰력 높은 논평을 한 것은 요한복음 1장 2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세례요한에게 알려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세례요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요한복음에 나왔나? 이것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이 세례요한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렇게 자세하게 심층탐사보도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는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남의 죄를 지적하고 죄를 고발하고 탄핵하는 폭풍 같은 양심의 경악만 일으키면 안 되고, 죄를 실제로 지고 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죄를 실제로 제거 하는 것이 순종의 화신, 독생성자급 순종의 화신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독생성자급 순종의 화신이 나와야 이 땅의 죄가 없어지는데, 부산저축은행 같은 무지무지한 큰 죄를 범한 이런 엘리트의 탐욕을 이 엄청난 죄를 예수님께 지금 맡기면 안 됩니다. 나사렛 예수 독생성자의 순종을 재현하고 방불 하는 사람이 지금 나타나야 합니다. 그게 예수님 믿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와서 이 땅의 십자가를 져 달라고 하면 안 되고,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부산저축으로 많은 서민들의 피눈물을 쏟게 했던 그런 무지무지하게 큰 죄를 다시는 그런 죄를 일어나지 못하도록 엘리트가, 누군가가 모든 재산을 쏟아놓고, 이걸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탐욕이고 내 교만입니다, 나의 모든 금융공학적 지식으로 여러분에게 사기를 쳤으니까 저는 회개하는 바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해줘야만 이게 상각이 됩니다. count balance가 됩니다. 문제는 부산저축은행의 탐욕적인 죄인들만 신문을 가득 채우고 자기 추궁하는 의인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점점 우주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균형상태가 돼서 폭발직전까지 가는 겁니다. 지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은 의인이 없기 때문에, 독생성자급 자기 추궁적인 메시아적 인물이 없기 때문에, 이게 참 중요합니다. 남의 죄를 지적하는 것, 세례요한 같은 사람은 인류역사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죄책을 뒤집어쓰고 그 시대의 중심구성원들과 동료시민들의 죄를 무효화시킬 만큼 큰 순종을 바친 사람들은 너무나 적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마 인류가 예수님 재림에만 목을 빼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인류가 예수님 재림에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나쁜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지 못하는 모든 책임 회피를 재림예수가 와서 모든 것을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 노예적인 태도다, 이렇게 생각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바로 재림예수가 되는 겁니다. 바로 재림예수가 되고 부산저축은행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엘리트가 탐욕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쏟아놓고 회개하는 겁니다. 그런데 1부 예배 때는 돈을 아무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전혀 감동이 없었는데, 자기가 돈을 만져보지도 않았고 일단 부산저축은행 사태 자체를 모릅니다. 비산동 사람들은 일단 돈이 없기 때문에 포이동 불난 사태는 기도가 되지만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기도가 안 돼요. 왜? 너무 돈도 없고 저축할 돈도 없기 때문에, 이건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이게 엘리트의 탐욕, 이 죄가 민중을 물 먹이는 전형적인 패러다임입니다. 보통 시중은행에서 돈을 맡기면 3.5%-4%의 이자를 줍니다. 돈을 빌릴 때는 8%-7.5%를 주고요. 빌릴 때는 7.5%-8% 이자를 받고, 돈을 맡길 때는 너무 적은 이자를 주는데 이것도 악한 일입니다. 이 세계 만악의 근원이 맘몬이 됩니다. 돈이 돈을 증식하는 걸 맘모니즘이라고 합니다. 돈이 돈을 증식하는 것, 돈의 무한한 자기복제력, 자기 복제력을 가진 돈을 예수님은 맘몬이라고 했고, 그냥 돈이 아니고 맘몬을 숭배할 때 하나님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월가가 바로 맘몬숭배의 성전입니다. 그래서 월가를 점령한다는 것은 성전을 부서뜨린 예수님의 분노와 똑같은 겁니다.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런데 제2금융권, 저축은행 토마토은행 이런 것들은 보통 큰 은행이나 국가가 약간 돈을 내 만든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8%의 이자율을 제공하고 돈을 끌어 모읍니다. 8%는 1억을 맡기면 800만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노인이 1억을 맡기면 74만 원 정도 받는 겁니다. 그래서 노인은 8%짜리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8%짜리 노인들이 막 몰려옵니다. 몰려오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 후순위 채권으로 가입하면 14%로 이자를 올려주겠습니다, 1억을 맡기면 1천 4백만 원을 1년에 이자로 돌려준다고 후순위채권이라는 걸 발행했습니다. 은행이 부도나고 망해도 제일 마지막까지 채권을 행사하지 않겠다, 이런 식의 선언입니다. 할머니들이 1년에 장사를 해서 1천 4백만 원을 벌 길이 없죠? 다 할머니들 돈입니다. 다 장애인들 돈이고요. 경제활동을 참여하지 않고 결국 이자소득 외에는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다 돈을 갖다 바친 겁니다. 그런데 그 돈을 MB, 노무현, 전라도 패거리들, 삼자가 먹었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습니다. 누군가가 먹었는데 범죄수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잘못이 일어났는데 수사가 일어나지 않고 정의가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이건 슬픈 일이고 아우성치는 일입니다. 광주양민학살만큼이나 나쁜 짓입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켜버린 악인입니다. 정치세력 모두가 참여했기 때문에 이건 야당도 부끄러운 일이고 여당도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귀신들을 보내서라도 이걸 해결해주실, 이런 죄를 비판만해서는 안 되고, 엘리트들이 탐욕과 이런 특권과 지위와 지식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축재한 자들이 돈을 쏟아놓고 그들에게 굳이 펀드를 만들어서 도와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독생성자급 죄를 뒤집어쓰는 겁니다. 죄를 뒤집어쓴다는 말은 경제적 손해를 감수함, 사회적 지위의 명예의 훼손을 감수함, 이겁니다. 이런 사람이 나타나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은 이걸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신 자신이 하나님 의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아들로써의 독특한 독생자급 신분의식에도 불구하고 서민처럼 일생동안 가난을 위해 살면서 가난과 푸대접을 받고, 유명한 사람 아무도 모른 채 살면서 명함도 찍지 못한 채 살면서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이렇게 주유를 했단 말이에요. 이게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 당시 도탄에 빠졌던 민중들, 엘리트들이 물 먹였던 지주 소작인 재판관들 이런 악한 자들이 했던 민중에게 가했던 폭력을 어떻게 했어요? 병을 고쳐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지배자들이 다 쫄쫄 굶겨서 마가복음 8장 3절입니다. 3일 동안 굶은 채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먹입니다. 굶주린 민중을 먹이는 것, 이게 죄를 대속하는 겁니다. 죄를 대속한다는 말은 A라는 일방의 죄 때문에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죄 대속은 경제적 손상 능력의 소진 등을 감수하면서 일어난 일이지, 우리가 해아 할 죄 갚음 사역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해야만 예수님이 한 것이거든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자꾸 예수님께 기도해서 시키려고 한 것은 기도자체를 정말 잘못 이해한 겁니다. 예수님께 시키면 안 되고, 지금 바로 우리가 한 것이 예수님이 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존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존은 그게 아닙니다. 의존은 모방입니다. 예수님 우리 부산저축은행 사태 좀 해결해 주십시오, 독생성자인 당신이 해결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한 것은 그것은 기도가 아니고 악한 노예적 의존입니다. 실천의 반경이고 자기책임의 무한한 회피입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한량없는 성령의 감동 받은 사람들이 돈을 내서 그 불쌍한 사람들 눈물을 닦아주고 입혀주고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세례요한의 단계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의가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세례요한적인 탄핵과 지탄과 비탄과 비판적 논평으로는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의는 세례요한적 지적을 내 가슴속에 내 책임으로 여기고 보상을 하고 배상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는 세례요한 같은 인물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죄를 무한책임 추궁을 통하여 이 시대의 중심죄악을 자기가 뒤집어쓰는 게 예수님의 길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의고, 이것이 인류 역사를 실제로 진보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과제는 성령의 감동 없이는 안 된다는 걸 저는 알기 때문에 참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동시키셔서 우리 안에 이런 사람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고, 우리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돼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돼야 한다고 할 때 성령이 감동 주시는 분들은 되시면 됩니다. 성령 감동 안 주면 가만히 있으세요.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끊임없이 성령을 한량없이 받았습니다. 34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제 소원은 제가 진짜 성령 충만하게 죽는다면 제 옆구리에 피가 쏟아지고 물이 쏟아지듯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지듯이 다 줘버리고 다 희생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의 완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옆구리가 찔려서 물과 피가 쏟아졌던 우리 예수님처럼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피를 쏟는 인내를 수반하는 희생,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이죠. 이런 예수님이 세례를 주니까 그 영적 임팩트가 너무 강했습니다. 26절입니다. 세례요한 제자가 말합니다.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정말입니다.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아마 25절에 26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25절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아마 유대인이 와서 세례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바리새인의 제자가 와서 예수님의 세례운동에 대해서 시비를 건 것 같습니다. 아마도 25절에 유대인이 와서 요한의 제자랑 토론을 벌였던 것, 정결의식은 세례의식입니다. 이 정결의식은 아마도 예수님이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을 흡수하는지, 왜 민중의 열화 같은 지지를 받고 세례운동을 벌이고 있는지 시비조로 물었겠죠? 그런 변론을 했을 때 예수님의 세례운동을 다시 한 번 정당화해줍니다. 요한복음 4장 1절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이것 보십시오. 예수님의 세례운동이 엄청난 파급을 일으켰고, 바리새인들에게 문제의식을 줬고, 예수님의 세례운동이 바리새인과 유대인에게 문제의식을 심어줄 만큼 컸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논평이 약간 중립적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안 돼, 라고 말하면서 약간 중립적으로 말하다가 좀 더 개인적으로 친근한 논평이 됩니다. 28절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이때 너희가 바로 사도요한, 요한복음 저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왜?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증언할 책임을 인계 받았기 때문입니다. 29절은 적당한 비유입니다. 유대인 결혼식에 신랑이 도착할 때까지 신부 집에 와서 결혼식의 여흥을 돋우는 들러리가 있습니다. 신랑은 대개 6km 떨어진 곳에서 올 수 있고 7km 떨어진 곳에서 올 수 있고 아니면 20km 떨어진 곳에서 올 수 있습니다. 대개 나귀를 타고 왔거나 노새를 타고 왔거나 말을 타고 왔거나 아마 마차를 타고 오진 못했겠죠? 산골은 마차가 잘 못 지나갑니다. 신랑이 이제 천천히 옵니다. 그 전에 먼저 신랑 들러리가 가서, 신랑 들러리도 신랑 못지 않게 멋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결혼의 여흥과 축제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6, 7km 떨어졌던 신랑이 드디어 도착합니다. 신랑도착,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자기 역할이 끝났거든요. 신랑 오면 들러리는 무대 밖으로 가야 되는 거거든요. 자기가 그런 거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하나의 그림 언어죠.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들러리가 축제적 여흥을 만들고 사람들 북적대게 만들고 인산인해를 만들게 했던 그런 엄청난 열기의 주인공이었다가 신랑이 도착했다는 음성을 듣는 순간 fade out 무대퇴장을 하는 역할과 자기가 똑같기 때문에, 나는 무대를 퇴장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이 비유가 절묘합니다. 유대인들 가슴속에 확 박히는 비유입니다.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건 진짜 너무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14절은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입니다. 그 가장 큰 자가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쇠하는 이 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겁니다. 쇠락하는 것 이것도 좋은 겁니다. 누구 앞에서? 진리 앞에서 거짓이 쇠락하는 게 좋은 겁니다. 최선 앞에서 차선이 쇠락하는 게 좋은 겁니다. 제가 볼 때는 예수님의 절대적 진리 앞에서 상대적 진리가 쇠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을 예수님께 갖다 바치는 것, 이것이 들러리의 역할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과 일편단심을 이어주는 것, 이것이 자기역할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신랑 들러리의 역할에 만족하고, 신랑이 결혼식을 해서 흥하여지고 자기는 쇠락하는 것이 너무 마땅하다, 일종의 쇠락을 찬미하고 쇠함을 찬미하는 겁니다. 여러분, 가을이죠? 쇠락하는 계절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이 쇠락하는 단풍에게 얼마나 배려를 많이 했어요? 단풍색깔 중에 안 예쁜 단풍 있습니까? 전부 다 예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쇠락하는 단풍에게도 색채감각을 완벽하게 주셔서 이렇게 멋지게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쇠락하는 단풍에게 이런 멋진 아우라를 주셨던 것처럼 쇠하는 나를 모두 다 빛나는 무대 바깥으로 내보낸다고 실패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최근 우리 학교에 40년 교수하던 두 분이 은퇴를 했는데, 제가 은퇴설교를 했습니다. 40년 했던 두 교수님은 이제까지 40년간 교육 교수 봉사보다도 더 위대한 봉사를 오늘부터 하십니다, 빨리 연구실을 비워주셔야 합니다, 후임교수가 오도록 자리를 비워준 이거야말로 노교수의 가장 위대한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수님은 인문대 단과대학 학장선거에 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수연구교수한테는 정년을 70세까지 연장해달라고 로비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안 나가려고 하는 것, die hard, 안 나가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 새로운 7만 명의 어슬렁거리는 시간강사들에게는 적입니다. 시간강사들은 언젠가 용이 되기 위해서 이무기 상태로 바다 위를 슬슬 다니는데 두 명의 이무기가 승천하는 길은 은퇴하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가주는 것, 그리고 연구실을 빨리 비워주는 것, 그런데 어떤 교수들은 연구실을 비워주지 않아서 신임교수가 연구실이 없는 채 새 학기를 시작합니다. 이번에 제가 따끔하게 설교했습니다. 연구실 안 비우고 계속 로비하면서 강사 자리 차꼬하면서 70년 정년 연장하도록 로비하는 건 제가 보기엔 40년 했던 모든 수고를 다 어렵게 만드는 겁니다. 쇠락해주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은퇴하는 것, 늙어주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다음 세대가 주인공이 됩니다. 제가 그런 설교를 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문자로 이런 퇴임예배설교 처음 들었다면서 아주 감동과 충격을 받은 형제들이 보냈습니다. 우리 딸이 2002년에 제가 교회 개척할 때 찍은 사진앨범을 보더니, 아빠가 너무 늙었다면서 불쌍하다고 나를 막 껴안아주길래, 내가 늙지 않으면 나보다 10년 20년 어린 후배들이 어디서 활약을 할 것인가, 내가 늙어야 하고, 85세된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마쳐야 그다음 너희들이 나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고, 그게 역사의 발전이고 이 쇠락의 원리가 너무 아름다운 것인데 왜 늙는 게 두려해야 하나, 나는 전혀 두렵지 않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쇠락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약해질 땐 약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참 기독교 영성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ever green, 상록수처럼 푸른 잎을 띄는 게 아니라 단풍잎을 띄고 땅에 뚝 떨어지는 순간도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세가 돌아가실 때 요새말로 하면 고려장을 당한 겁니다. 최초 고려장의 원조는 모세장입니다. 모세는 120세 때 느보산에 올라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기도응답으로 세 번 거절 받고 아무도 없는 산에 올라가서 일정량 식량을 남겨 놓고,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다 내려가 버렸습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저 먼 가나안 땅을 바라다보고, 여호수아와 그 모든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걸 망연히 쳐다봤습니다. 이때 만일 모세가 너는 여기에서 죽어야 한다, 라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모세가 혹시 몰라서 여호수아한테, 여호수아야 춥다 배고프다, 이런 문자를 보내고, 여호수아야 주말에 한 번 느보산에 들러줄래, 이렇게 계속 후배들한테 그러면 모세답지 않죠. 그러면 성경에서 이렇게 나오죠.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몰래 잠입해 여리고성에 나타날 때 너무 사람들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성경구절이 나왔을 텐데 모세는 그렇지 않고 죽은 날짜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무덤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무덤이 참배객들이 모여드는 성지가 될까 싶어서 무덤도 만들지 말라고 해서 무덤도 찾지 못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모세의 무덤이 없어요. 누구보다도 있어야 할 게 모세의 무덤이죠. 그래서 모세는 승천했다는 전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쇠하여질 때도 오는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 신령한 영성의 소유자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쇠할 때도 기쁨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게 가을의 기쁨이고 돌아가는 단풍의 기쁨이고, 단풍의 이렇게 지지 않으면 이 귀한 은행나무에 6월의 실록은 어떻게 만듭니까? 이놈들이 서 있으면요. 이것들이 다 떨어주니까 단풍이 지고 나면 너무 멋진 이파리가 차오르잖아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마지막에 죽는 게 쇠락의 절정, 쇠락함을 적분하면 쇠락의 완성점은 죽음, 죽음 끝에 무엇이 와요? 부활이 오잖아요. 제가 어렸을 때 진주 이쪽은 10월 둘째 주에 보리와 밀 씨앗을 뿌립니다. 제가 항상 기억나는 것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10월 둘째 주에 밀과 보리를 심기 위해서 땅을 길게 파던 기억이 나고 11월 초에 씨앗을 뿌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항상 아버지를 따라서 5마지가, 천평 짜리 큰 논이 있었는데, 천평짜리 큰 논에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씨앗 뿌리는 것을 도왔는데, 제 어린 마음에 그 천 평 땅이 너무나 넓었습니다. 그 땅에 보리를 뿌리고 나면 2월에 보리가 되는데 그때 뿌리는 보리와 밀은 완전히 죽은 겁니다. 완전히 볼품 없이 죽은 씨앗입니다. 그런데 그 볼품 없이 죽은 씨앗, 영광을 잃어버린 씨앗을 땅에 뿌려놓고 앞뒤로 체온을 유지해주면 2월에 파란 보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6월에 대공을 이루면서 열매를 이루는데, 보리밭과 밀밭이 저는 그렇게 기억이 남습니다. 밀밭과 보리밭 너무 기가막힌 장면입니다. 거기서 장난도 많이 치고 고라니 노루 잡으러 뛰어다니고 동네 아이들과 많이 밀밭과 보리 밭을 뛰어 다녔던 기억이 나는데, 그건 전부 다 죽은 씨앗을 뿌린 겁니다. 쇠락한 씨앗을 뿌리는 겁니다. 우리 모두도 쇠락함의 정점에 있으며, 이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세례요한처럼 쇠함을 기뻐하고 쇠락함을 기뻐하고 약함을 기뻐하고 약해지면서 새로워지는 변증법적 신비를 늘 만끽하는 성도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이 쇠할 때 나보다 훨씬 구속사적 섭리면에서 더 좋은 후배가 제자가 그 자리를 채웁니다. 너무 좋은 것 아닙니까? 쇠락은 창조적 쇠락, 창조적 쇠락은 더 나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파트너를 데뷔시키기 위한 쇠락, 그래서 저는 우리 아이가 저의 장례식을 치룰 때 제가 우리 자녀들에게 한 사랑의 완성이라고 봅니다. 우리 자녀들이 적당할 때 죽어주고, 우리 자녀들에게 너무 힘들지 하지 않게 제가 죽어주는 것, 저는 이게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아름답게 쇠락하여 부활로 되살아나는 2월 3월에 혹한의 추위를 뚫고 파랗게 돋아나는 보리싹과 밀이삭이 되도록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례요한은 이때 쇠락했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우리 하나님 나라에 찬연히 빛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쇠락을 위축을 무대에서 조명받지 못함을 인정받지 못함을 제쳐둠을 당하는 것, 심지어 이번에 11월 5일에 축구할 때 항상 주전이었던 선수가 비주전으로 밀려나고 마지막 5분밖에 뛸 수 없는 참담한 사태가 나도 그걸 감수해야 한다고 어떤 분이 광고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마우신 아버지 하나님, 쇠락함을 주 안에서 기뻐하며 약해짐을 기뻐하며 인정받지 못함을 주 안에서 기뻐하며, 모드 사람이 내 후배와 내 뒤에 오는 사람에게 다 가버려서 텅하니 멍하니 홀로 남은 것 같은 이 고독을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 우리가 쇠락해주어야만 우리 다음세대가 기를 펴고 사는 것, 이 섭리를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고 세례요한이 쇠락하면서도 기뻐하였던 것처럼 이 놀라운 섭리를 터득하게 한량 없는 성령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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