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주의의 폐단
근래 들어 창조과학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재현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한 지구와 우주의 연령에 관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론이 타당한 듯이 내세운다. 종전의 주장을 수정한 학자들은 이제서야 과학적인 근거를 갖는 참 진리를 발견한 듯이 말하기도 한다.
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저마다 나름대로 성경 본문을 인용하며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한다. 필자도 어쩌면 그런 여러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성주의와 지성주의에 대한 경계의 끈을 늦추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인간들의 이성과 과학을 성경계시보다 우위에 두려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과학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려 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성경을 통해 모든 과학을 해석해야만 한다.
즉 인간들의 눈에 명확한 근거를 갖는 과학적 결과로 비친다 할지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려해서는 안된다. 과학이란 일종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안목에 전혀 과학적이지 않아 보이는 성경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이성과 지성 혹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폄하할 수는 없다.
도리어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성경의 내용과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사건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근거로 세상과 인간들의 과학적 결과들을 평가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두고 종교적 억지라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창세기 1장의 교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학자들은 천지 창조 때 한 주간으로 묘사되는 기간 동안 있었던 내용들에 관한 문제와 거기에 언급된 ‘날’의 길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 ‘날’이 우리의 24시간이냐, 아니면 그보다 엄청난 긴 기간을 일컫느냐 하는 점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태양이 넷째 날 만들어졌는데 그 전에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어떤 논리를 갖다대도 인간들은 성경이 모순이라 이야기할 것이 틀림없다. 설령 그 하루가 수억 년이 되는 엄청난 긴 기간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이라 묘사 되는 그 기간 이전에는 첫째 날, 둘째 날 이란 말을 붙일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성경을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눈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한 책임과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한다. 따라서 그 내용은 인간들의 과학적 분석을 통한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돌리게 될 따름이다.
구약시대 선지자들 가운데 창세기 1장에 대해 과학적 관심을 기울인 자들이 없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들 중에 그에 대한 이성적 접근을 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21세기의 초 첨단 과학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들의 이성주의와 지성주의가 절대화된 시대이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어떤 시대에 살지라도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절대적인 것인 양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 밖에 없다.
우리는 성경에 관한 어리석은 과학논쟁에 휩쓸려서는 안된다. 신학자들에 의한 논쟁이든 과학자들이 주도하는 논쟁이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야 할 말씀이 인간들의 논쟁을 위한 책으로 변질되고 만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어려워 보이는 내용은 성경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올바르게 깨닫게 되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이광호 목사, 교회연합신문)
근래 들어 창조과학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재현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한 지구와 우주의 연령에 관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론이 타당한 듯이 내세운다. 종전의 주장을 수정한 학자들은 이제서야 과학적인 근거를 갖는 참 진리를 발견한 듯이 말하기도 한다.
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저마다 나름대로 성경 본문을 인용하며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한다. 필자도 어쩌면 그런 여러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성주의와 지성주의에 대한 경계의 끈을 늦추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인간들의 이성과 과학을 성경계시보다 우위에 두려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과학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려 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성경을 통해 모든 과학을 해석해야만 한다.
즉 인간들의 눈에 명확한 근거를 갖는 과학적 결과로 비친다 할지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려해서는 안된다. 과학이란 일종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안목에 전혀 과학적이지 않아 보이는 성경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이성과 지성 혹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폄하할 수는 없다.
도리어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성경의 내용과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사건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근거로 세상과 인간들의 과학적 결과들을 평가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두고 종교적 억지라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창세기 1장의 교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학자들은 천지 창조 때 한 주간으로 묘사되는 기간 동안 있었던 내용들에 관한 문제와 거기에 언급된 ‘날’의 길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 ‘날’이 우리의 24시간이냐, 아니면 그보다 엄청난 긴 기간을 일컫느냐 하는 점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태양이 넷째 날 만들어졌는데 그 전에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어떤 논리를 갖다대도 인간들은 성경이 모순이라 이야기할 것이 틀림없다. 설령 그 하루가 수억 년이 되는 엄청난 긴 기간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이라 묘사 되는 그 기간 이전에는 첫째 날, 둘째 날 이란 말을 붙일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성경을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눈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한 책임과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한다. 따라서 그 내용은 인간들의 과학적 분석을 통한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돌리게 될 따름이다.
구약시대 선지자들 가운데 창세기 1장에 대해 과학적 관심을 기울인 자들이 없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들 중에 그에 대한 이성적 접근을 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21세기의 초 첨단 과학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들의 이성주의와 지성주의가 절대화된 시대이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어떤 시대에 살지라도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절대적인 것인 양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 밖에 없다.
우리는 성경에 관한 어리석은 과학논쟁에 휩쓸려서는 안된다. 신학자들에 의한 논쟁이든 과학자들이 주도하는 논쟁이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야 할 말씀이 인간들의 논쟁을 위한 책으로 변질되고 만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어려워 보이는 내용은 성경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올바르게 깨닫게 되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이광호 목사, 교회연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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