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자들
이광호 목사(실로암교회)
역사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들이 항상 있어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근래 한국 기독교 내부에는 성경을 왜곡하는 차원을 넘어 구약성경 ‘아가서’를 아예 인간의 성적인 욕망을 위한 음란서적으로 바꾸어버린 해괴한 책이 등장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항상 더러운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자들은 가증한 자기주장을 펼치기에 능수능란하다. 그런 자들은 기독교의 지도자인양 행세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때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며 그것을 통해 교묘한 방법으로 교인들을 속이고 있다.
사탄도 더러운 입술로 성경을 인용하며 감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적이 있다. 그에게 속한 자들은 성경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어린 교인들을 유혹해 사탄의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눈을 부릅뜨고 여간 민감하게 세태를 살펴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며칠 전 평소 존경하는 어느 선배께서 책을 한권 보내셨다. “하나 되는 기쁨”(최희열, 예영 커뮤니케이션, 2005). 나에게 그 책이 어떤 책인지 한번 살펴봐 달라는 부탁을 하셨던 것이다. 책 표지부터 심상치 않다. 상단에, <결혼한 부부들만 읽을 수 있습니다. 19세미만 구독불가>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표지부터 ‘이 책은 음란물입니다’고 공언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이 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집필되고 인정받을만한 출판사에 의해 제작되어 기독교 서점에서 판매되어야 하는가? 이 책 표지의 논지대로라면 사도바울 같이 혼인하지 않은 사람은 읽어서 안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도 신약시대의 사도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가서’의 내용을 말세가 되어서야 그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가진 걸출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자는 이단이 아니던가? 이단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런 망측한 사고를 할 수 없다.
우선 붉은 색 계통으로 장식된 책 표지를 한 장 넘겼다. 책을 쓴 자는 ‘최희열’이라는 이름을 가진 철학박사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는 가정상담을 전문적으로 하는 목회자였다. 책의 목차를 보니 그것은 변태적인 섹스 전문교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의 추천사를 쓴 자는 한국교계에 이름이 알려진 정동섭 교수였다. 출판사의 이름을 보고 놀랐는데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먼저 저자의 서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처음부터 성경을 짓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서문의 맨 앞줄에서 거룩함, 순결, 경건, 신앙, 예배, 제자훈련 등을 성교, 전희, 체위, 오르가즘, 로맨스, 성적 만족과 조화되는 용어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첫날밤의 부부관계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하는 것을 불경하게 보는 입장을 영지주의 이단들의 사상이라 단정했다.
저자는 마치 ‘아가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주해를 앞두고 있는 신학자라도 되는 양, 남녀간의 성적인 진한사랑과 육체적인 관계를 강조하지 않는 아가서 주석은 심각한 성경해석의 오류라 지적했다. 그러면서 ‘아가서’에 나타나는 ‘동산’은 ‘여성의 성기’ 혹은 ‘성행위 장소’를 의미한다는 망발로부터 더러운 논지를 풀어나가려는 의지를 보였다.
저자는 서문의 끝부분에서, 그 책이 대단히 훌륭한 책이라는 추천사를 써준 정동섭 교수와 이영애 사모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십 수년간’ 성적인 파트너가 되어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가명을 사용한 저자의 대략적인 나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이 출간된 연도를 감안할 때 당시 저자의 연령이 50대 정도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동섭 교수의 추천사를 읽어나갔다. 이는 저자의 서문을 읽는 만큼 충격적이었다. 성(sexuality)과 영성(spirituality)을 나눈 것이 기독교 역사상 나타나는 비극적 현상이란 말로 추천사를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탁월한 성생활지침서인 그 책이 출간된 것을 두고 신학적으로 ‘의미있는 사건’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나아가 섹스가 인간들이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성경(聖經)을 성경(性經)이란 말과 더불어 성교(性交)를 성교(聖交)라 주장하는 저자의 말을 원리처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일단 저자의 서문과 추천인의 추천사를 통해 충격을 받은 나는 내용을 읽기 전에 책의 맨 뒤에 있는 후주(後註)와 참고문헌을 살펴봤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의 어떤 글을 인용했기에 이런 참람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상당한 양의 성경구절들이 얼토당토않게 인용되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이 마치 성경적 근거가 되는 듯이 오해할 것이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적인 책들과 더불어 불신자들이 쓴 많은 분량의 책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동섭’이란 이름과 ‘이영애’란 이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책을 추천한 인물이며 그토록 감사한다는 학자의 책을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최희열’이란 가명의 저자는 글을 쓰는 자로서 추천인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마저 갖추지 못한 인물이란 말인가?
그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려고 마음먹으면 쉽게 알 수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가정 사역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일 것이 분명하다. 그는 서문 가운데 십수 년 동안 부부생활 세미나를 개최해오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그가 주도한 부부 세미나에 참석한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그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증인이 될 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책을 추천한 정 교수와 해당출판사는 저자를 알고 있지만 숨길 수밖에 없다는 궁색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약속과 의리 때문인 양 변명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기만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처사는 하나님과 그의 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자신을 위한 구차한 변명에 빠져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책이 저자의 실명을 숨겨야할 정도라면, 추천사를 쓰지 말고 출판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기본적인 도리이다.
나는 저자의 서문, 추천인의 추천사, 그리고 책의 말미에 붙은 후주와 참고도서 목록을 확인 한 후, 그 책의 본 내용을 읽으면서 당황스러움과 더불어 엄청난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아가서’ 자체를 아예 섹스를 위한 교본으로 간주하고 있다. 저자와 추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더럽고 참람한 용어들로 가득한 음란서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그 책의 외설적인 표현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저자와 추천인의 이단적인 사상이다: '성교가 창조주의 창조 중심에 있음은 남녀의 성기의 구조로부터도 볼 수 있다', ‘거룩한 성교의 축복, 하나 됨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책임이자 사명이다’, ‘창조주의 명령과 축복은 바로 남녀의 성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성의 질은 성(性)과 성(聖)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남녀의 결합을 통해 성기(性器)가 성기(聖器)가 되고 성교(性交)는 성교(聖交)가 된다', ‘육체적 쾌락이 창조주와 만나는 순간이요 가장 강렬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거룩함과 공존하는 순간이다’.
저자의 이러한 말들은 단순한 사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의 종교적인 표현이다. 섹스 예찬론자로서 ‘성교영성’이라는 희한한 용어를 만들어낸 자가 어떻게 기독교 신학자이며 목회자일 수 있는가? 어떻게 성도들의 가정을 상담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선전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소위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기관의 이단 관련 부서의 요직을 맡고 있다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와 추천인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서는 눈곱만큼의 이해도 없어 보인다. 저자는 자기가 마치 ‘아가서’를 매우 탁월한 신학적 관점에서 주석하고 있는 듯이 주장한다. 추천인은 그에 대한 보증인이라도 되는 듯 엄청난 힘을 실어주고 있다. 성경본문을 인용하며 추잡한 섹스 테크닉을 자랑스럽게 가르치는 저자는 어처구니없게도 섹스를 통해 천국을 맛보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 이외는 이 세상에서 달리 천국을 맛볼만한 방편이 있지 않다는 논조이다.
섹스를 통해 천국을 맛보게 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섹스를 최상의 쾌락으로 삼는 불신자들이 성도들보다 천국의 맛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책의 저자가 말하는 성적 쾌락을 통해 맛보는 천국이란 불신자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성의 쾌락을 탐닉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을 제대로 맛볼 수없다.
그 책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볼 수 없다. 비판을 부탁받아 문제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마저도 그로인해 이미 상당한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 책 속에 기록된 노골적인 성적인 묘사들이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사자들이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면 즉시 그 책의 공급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속히 교회를 어지럽히는 그 책을 전량 회수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저자와 추천인이 말하듯이 그 책의 독자들이 성생활에서 어떤 만족을 얻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해악만 끼쳤을 따름이다. 책의 저자가 성경을 빗대어 가르쳐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갖가지 섹스 테크닉은 정상적인 부부간의 성생활이라기보다 성도착증을 부추기고 있다. 그것은 섹스지상주의적(性至上主義的) 사고를 가진 자들이 장려하는 중독성 있는 변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한 성경에 대해 참람한 해석을 하는 이단자들을 교회 가까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대응을 해야 한다. 그들을 방치하게 되면 교회는 엄청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탄은 무섭고 끔찍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달콤한 것을 가장하여 등장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말세에 처한 교회는 교활한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2009. 4. 24, 크리스챤한국신문)
이광호 목사(실로암교회)
역사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들이 항상 있어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근래 한국 기독교 내부에는 성경을 왜곡하는 차원을 넘어 구약성경 ‘아가서’를 아예 인간의 성적인 욕망을 위한 음란서적으로 바꾸어버린 해괴한 책이 등장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항상 더러운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자들은 가증한 자기주장을 펼치기에 능수능란하다. 그런 자들은 기독교의 지도자인양 행세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때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며 그것을 통해 교묘한 방법으로 교인들을 속이고 있다.
사탄도 더러운 입술로 성경을 인용하며 감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적이 있다. 그에게 속한 자들은 성경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어린 교인들을 유혹해 사탄의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눈을 부릅뜨고 여간 민감하게 세태를 살펴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며칠 전 평소 존경하는 어느 선배께서 책을 한권 보내셨다. “하나 되는 기쁨”(최희열, 예영 커뮤니케이션, 2005). 나에게 그 책이 어떤 책인지 한번 살펴봐 달라는 부탁을 하셨던 것이다. 책 표지부터 심상치 않다. 상단에, <결혼한 부부들만 읽을 수 있습니다. 19세미만 구독불가>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표지부터 ‘이 책은 음란물입니다’고 공언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이 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집필되고 인정받을만한 출판사에 의해 제작되어 기독교 서점에서 판매되어야 하는가? 이 책 표지의 논지대로라면 사도바울 같이 혼인하지 않은 사람은 읽어서 안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도 신약시대의 사도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가서’의 내용을 말세가 되어서야 그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가진 걸출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자는 이단이 아니던가? 이단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런 망측한 사고를 할 수 없다.
우선 붉은 색 계통으로 장식된 책 표지를 한 장 넘겼다. 책을 쓴 자는 ‘최희열’이라는 이름을 가진 철학박사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는 가정상담을 전문적으로 하는 목회자였다. 책의 목차를 보니 그것은 변태적인 섹스 전문교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의 추천사를 쓴 자는 한국교계에 이름이 알려진 정동섭 교수였다. 출판사의 이름을 보고 놀랐는데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먼저 저자의 서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처음부터 성경을 짓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서문의 맨 앞줄에서 거룩함, 순결, 경건, 신앙, 예배, 제자훈련 등을 성교, 전희, 체위, 오르가즘, 로맨스, 성적 만족과 조화되는 용어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첫날밤의 부부관계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하는 것을 불경하게 보는 입장을 영지주의 이단들의 사상이라 단정했다.
저자는 마치 ‘아가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주해를 앞두고 있는 신학자라도 되는 양, 남녀간의 성적인 진한사랑과 육체적인 관계를 강조하지 않는 아가서 주석은 심각한 성경해석의 오류라 지적했다. 그러면서 ‘아가서’에 나타나는 ‘동산’은 ‘여성의 성기’ 혹은 ‘성행위 장소’를 의미한다는 망발로부터 더러운 논지를 풀어나가려는 의지를 보였다.
저자는 서문의 끝부분에서, 그 책이 대단히 훌륭한 책이라는 추천사를 써준 정동섭 교수와 이영애 사모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십 수년간’ 성적인 파트너가 되어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가명을 사용한 저자의 대략적인 나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이 출간된 연도를 감안할 때 당시 저자의 연령이 50대 정도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동섭 교수의 추천사를 읽어나갔다. 이는 저자의 서문을 읽는 만큼 충격적이었다. 성(sexuality)과 영성(spirituality)을 나눈 것이 기독교 역사상 나타나는 비극적 현상이란 말로 추천사를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탁월한 성생활지침서인 그 책이 출간된 것을 두고 신학적으로 ‘의미있는 사건’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나아가 섹스가 인간들이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성경(聖經)을 성경(性經)이란 말과 더불어 성교(性交)를 성교(聖交)라 주장하는 저자의 말을 원리처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일단 저자의 서문과 추천인의 추천사를 통해 충격을 받은 나는 내용을 읽기 전에 책의 맨 뒤에 있는 후주(後註)와 참고문헌을 살펴봤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의 어떤 글을 인용했기에 이런 참람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상당한 양의 성경구절들이 얼토당토않게 인용되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이 마치 성경적 근거가 되는 듯이 오해할 것이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적인 책들과 더불어 불신자들이 쓴 많은 분량의 책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동섭’이란 이름과 ‘이영애’란 이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책을 추천한 인물이며 그토록 감사한다는 학자의 책을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최희열’이란 가명의 저자는 글을 쓰는 자로서 추천인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마저 갖추지 못한 인물이란 말인가?
그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려고 마음먹으면 쉽게 알 수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가정 사역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일 것이 분명하다. 그는 서문 가운데 십수 년 동안 부부생활 세미나를 개최해오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그가 주도한 부부 세미나에 참석한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그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증인이 될 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책을 추천한 정 교수와 해당출판사는 저자를 알고 있지만 숨길 수밖에 없다는 궁색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약속과 의리 때문인 양 변명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기만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처사는 하나님과 그의 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자신을 위한 구차한 변명에 빠져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책이 저자의 실명을 숨겨야할 정도라면, 추천사를 쓰지 말고 출판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기본적인 도리이다.
나는 저자의 서문, 추천인의 추천사, 그리고 책의 말미에 붙은 후주와 참고도서 목록을 확인 한 후, 그 책의 본 내용을 읽으면서 당황스러움과 더불어 엄청난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아가서’ 자체를 아예 섹스를 위한 교본으로 간주하고 있다. 저자와 추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더럽고 참람한 용어들로 가득한 음란서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그 책의 외설적인 표현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저자와 추천인의 이단적인 사상이다: '성교가 창조주의 창조 중심에 있음은 남녀의 성기의 구조로부터도 볼 수 있다', ‘거룩한 성교의 축복, 하나 됨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책임이자 사명이다’, ‘창조주의 명령과 축복은 바로 남녀의 성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성의 질은 성(性)과 성(聖)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남녀의 결합을 통해 성기(性器)가 성기(聖器)가 되고 성교(性交)는 성교(聖交)가 된다', ‘육체적 쾌락이 창조주와 만나는 순간이요 가장 강렬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거룩함과 공존하는 순간이다’.
저자의 이러한 말들은 단순한 사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의 종교적인 표현이다. 섹스 예찬론자로서 ‘성교영성’이라는 희한한 용어를 만들어낸 자가 어떻게 기독교 신학자이며 목회자일 수 있는가? 어떻게 성도들의 가정을 상담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선전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소위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기관의 이단 관련 부서의 요직을 맡고 있다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와 추천인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서는 눈곱만큼의 이해도 없어 보인다. 저자는 자기가 마치 ‘아가서’를 매우 탁월한 신학적 관점에서 주석하고 있는 듯이 주장한다. 추천인은 그에 대한 보증인이라도 되는 듯 엄청난 힘을 실어주고 있다. 성경본문을 인용하며 추잡한 섹스 테크닉을 자랑스럽게 가르치는 저자는 어처구니없게도 섹스를 통해 천국을 맛보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 이외는 이 세상에서 달리 천국을 맛볼만한 방편이 있지 않다는 논조이다.
섹스를 통해 천국을 맛보게 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섹스를 최상의 쾌락으로 삼는 불신자들이 성도들보다 천국의 맛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책의 저자가 말하는 성적 쾌락을 통해 맛보는 천국이란 불신자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성의 쾌락을 탐닉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을 제대로 맛볼 수없다.
그 책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볼 수 없다. 비판을 부탁받아 문제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마저도 그로인해 이미 상당한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 책 속에 기록된 노골적인 성적인 묘사들이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사자들이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면 즉시 그 책의 공급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속히 교회를 어지럽히는 그 책을 전량 회수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저자와 추천인이 말하듯이 그 책의 독자들이 성생활에서 어떤 만족을 얻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해악만 끼쳤을 따름이다. 책의 저자가 성경을 빗대어 가르쳐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갖가지 섹스 테크닉은 정상적인 부부간의 성생활이라기보다 성도착증을 부추기고 있다. 그것은 섹스지상주의적(性至上主義的) 사고를 가진 자들이 장려하는 중독성 있는 변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한 성경에 대해 참람한 해석을 하는 이단자들을 교회 가까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대응을 해야 한다. 그들을 방치하게 되면 교회는 엄청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탄은 무섭고 끔찍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달콤한 것을 가장하여 등장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말세에 처한 교회는 교활한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2009. 4. 24, 크리스챤한국신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