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비에 대한 잘못된 관행
이광호 목사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각종회의를 위한 모임 후에 회의비, 교통비 등을 받는 모든 관행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목사들은 이미 그 일을 위해서 교회로부터 생활을 보장 받고 있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정말 경제적 어려운 형편에 있는 회의 참석자들이 있다면 그들에 대한 배려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물질주의화 되었다는 지적은 이미 어제 오늘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할 지상의 교회가 이 세상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에서조차 진리를 벗어난 자들이 돈을 통해 사람을 사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실 교회가 시정해야 할 잘못된 관행들 가운데 하나는 각종 회의비와 교통비 등의 명목의 재정을 지출하는 문제이다. 노회와 총회는 물론, 시찰회를 비롯하여 평상시에 모이는 노회와 총회의 각종 상비부를 비롯한 다양한 모임에서도 동일한 명목의 재정이 지급된다. 물론 회의비라는 별도의 항목이 정해져 있지 않다하더라도 교통비 등 다른 명목으로 실 경비를 넘어서는 경비가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회의에 참석하는 목사 장로들에게 소속 교회가 직접 그 경비를 부담하든지 아니면 교회가 낸 상회비를 가지고 해당기관이 그 경비를 지출하든지 결과는 마찬가지다. 물론 회의를 위해 실제로 사용되는 식사비라든지 교통비에 해당하는 액수를 지급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모든 회의와 모임에서 관례화되어 실경비와 상관이 없이 경비가 지급되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과거 교통과 숙식문제 등 모든 환경이 열악하던 시기에 믿음의 선배들이 교회를 위한 각종 회의에 참석할 때 교회가 그 필요경비를 부담했던 것은 충분히 납득할만하다. 수 십리 길을 걷거나 수 백리 길을 하루 몇 차례 있는 시골버스를 이용해 회의장으로 달려와 며칠씩 묵어야 할 때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상당한 경비가 들었다. 교회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성숙한 신앙과 희생적인 자세 없이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대식 환경과 첨단 과학시설이 구비된 우리시대는 불과 수십 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제반 사정이 달라졌다. 회의를 위해 먼 길을 와 숙박업소에서 잠을 자야만 할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게 된 것이다. 노회를 개최할 경우에는 대개 목사와 장로들이 거주하는 본 지역에서 회의를 한다. 더군다나 다수의 목사들은 교회에서 제공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러므로 교통비나 숙박비가 그렇게 많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계 인사들은 고급호텔에 모여 값비싼 경비를 들여 회의를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어디를 가나 회의를 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교회당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이다. 교회당에서 회의를 한다면 불필요한 경비를 많이 줄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필요이상의 경비를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재정이 성도들이 애써 연보한 물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그 연보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의 삶의 고백이 담겨있다. 그 값진 돈을 공금으로 사용하는 자들은 여간 주의 깊게 경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는 한국교회에 만연한 각종 잘못된 회의비에 대한 관행이 속히 없어지기를 바란다. 잘못된 그런 관행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골의 미자립 교회나 재정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목회자들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교회들이 실비를 지원해 도울 수 있다. 즉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회의 목회자는 회의비를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대신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의 목회자들을 찾아 경비를 지원한다면 누가 봐도 보기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물질을 잘못 사용하거나 목회자들이 물질을 탐하게 되면 교회가 세속화될 수밖에 없다. 혼탁한 시대에 지상의 교회가 신음하고 있을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에 대한 선명한 자세를 가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는 목회자들의 사생활에 대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공적인 재정을 회의비나 교통비라는 명목으로 개인에게 지출하는 문제에서부터 새로운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광호 목사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각종회의를 위한 모임 후에 회의비, 교통비 등을 받는 모든 관행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목사들은 이미 그 일을 위해서 교회로부터 생활을 보장 받고 있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정말 경제적 어려운 형편에 있는 회의 참석자들이 있다면 그들에 대한 배려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물질주의화 되었다는 지적은 이미 어제 오늘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할 지상의 교회가 이 세상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에서조차 진리를 벗어난 자들이 돈을 통해 사람을 사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실 교회가 시정해야 할 잘못된 관행들 가운데 하나는 각종 회의비와 교통비 등의 명목의 재정을 지출하는 문제이다. 노회와 총회는 물론, 시찰회를 비롯하여 평상시에 모이는 노회와 총회의 각종 상비부를 비롯한 다양한 모임에서도 동일한 명목의 재정이 지급된다. 물론 회의비라는 별도의 항목이 정해져 있지 않다하더라도 교통비 등 다른 명목으로 실 경비를 넘어서는 경비가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회의에 참석하는 목사 장로들에게 소속 교회가 직접 그 경비를 부담하든지 아니면 교회가 낸 상회비를 가지고 해당기관이 그 경비를 지출하든지 결과는 마찬가지다. 물론 회의를 위해 실제로 사용되는 식사비라든지 교통비에 해당하는 액수를 지급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모든 회의와 모임에서 관례화되어 실경비와 상관이 없이 경비가 지급되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과거 교통과 숙식문제 등 모든 환경이 열악하던 시기에 믿음의 선배들이 교회를 위한 각종 회의에 참석할 때 교회가 그 필요경비를 부담했던 것은 충분히 납득할만하다. 수 십리 길을 걷거나 수 백리 길을 하루 몇 차례 있는 시골버스를 이용해 회의장으로 달려와 며칠씩 묵어야 할 때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상당한 경비가 들었다. 교회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성숙한 신앙과 희생적인 자세 없이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대식 환경과 첨단 과학시설이 구비된 우리시대는 불과 수십 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제반 사정이 달라졌다. 회의를 위해 먼 길을 와 숙박업소에서 잠을 자야만 할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게 된 것이다. 노회를 개최할 경우에는 대개 목사와 장로들이 거주하는 본 지역에서 회의를 한다. 더군다나 다수의 목사들은 교회에서 제공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러므로 교통비나 숙박비가 그렇게 많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계 인사들은 고급호텔에 모여 값비싼 경비를 들여 회의를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어디를 가나 회의를 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교회당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이다. 교회당에서 회의를 한다면 불필요한 경비를 많이 줄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필요이상의 경비를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재정이 성도들이 애써 연보한 물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그 연보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의 삶의 고백이 담겨있다. 그 값진 돈을 공금으로 사용하는 자들은 여간 주의 깊게 경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는 한국교회에 만연한 각종 잘못된 회의비에 대한 관행이 속히 없어지기를 바란다. 잘못된 그런 관행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골의 미자립 교회나 재정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목회자들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교회들이 실비를 지원해 도울 수 있다. 즉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회의 목회자는 회의비를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대신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의 목회자들을 찾아 경비를 지원한다면 누가 봐도 보기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물질을 잘못 사용하거나 목회자들이 물질을 탐하게 되면 교회가 세속화될 수밖에 없다. 혼탁한 시대에 지상의 교회가 신음하고 있을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에 대한 선명한 자세를 가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는 목회자들의 사생활에 대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공적인 재정을 회의비나 교통비라는 명목으로 개인에게 지출하는 문제에서부터 새로운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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