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한나의 기도! (삼상 1:14-18)

by 【고동엽】 2022. 1. 26.

한나의 기도! (삼상 1:14-18)


여기 성경에 보면 한 여인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참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합니다. 그 여인이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라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고민도 많이 했고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또 위로도 받았지만 이 여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자로서 자신이 직접 꼭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매일같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나에게 아들을 주십시오. 주시면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이 여인은 지극히 동양적입니다. 여자로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죄스럽게 생각해서 아이를 낳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동서양을 따지기 이전에 여인의 본능일 것입니다. 많은 독신녀들이 "결혼은 하고 싶지 않으나 아이는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본능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세 가지 수모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여자가 머리 빠지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여자 대머리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흉하겠습ㄴ까? 그래서 이것이 여인의 수모입니다. 둘째는 결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독신녀들이 많은 시대니까 요즘에 이것은 큰 흉은 아닐 것입니다. 셋째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전통에는 여인들이 결혼을 해서 3년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남편을 다른 여인에게 양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 한나라는 여인이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결혼해서 3년이 지났는데도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양보했습니다. 브닌나라는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평소 이 몸종이 아주 순종을 잘하고 착하고 양순해서 마음 놓고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이 여인이 마침내 남편의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이 참하고 양순하게만 보이던 몸종이 갑자기 포악스러워지고 방자하고 도도해지기 시작하는 데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본처가 첩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첩이 본처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 광경을 보지 않아도 알만 하지 않습니까? 여인들에게는 이렇게 무섭고 독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부터 남자들이 조심할 대상 가운데 여인이 끼어 있습니다. 여인은 평소에는 아주 연약해 보이고 양순해 보이지만 한번 돌변하면 그렇게 무서워질 수 있는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간 큰 남자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고도 하는데 남자들은 가능하면 여인들을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인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표독해지고 아주 독해지는 원인을 분석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도 조용하고 부드럽던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무서워질 수 있는 이유가 여인들의 일상 생활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엌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나를 살펴보십시오. 모두 칼 자루를 들고 있습니다. 그 칼로 생선을 자르고 고기를 짜르는 모습을 가만히 눈여겨 보십시오. 얼마나 잔인하고 사정없이 잘라 내는지 독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게 썰고 찢고 자르는 일상의 생활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마음 깊은 곳에 삶이 잔인해질 수 있는 심리적인 요인들이 잠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면서 문제가 없으면 괜찮은데 살아가다가 문제가 생겨서 유사시가 되면 갑자기 잔인해지고 독해지는 성품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한 남편들이 아내들을 화나게 만듭니다. "전설따라 삼천리"를 보십시오. 모두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서양인들도 보면 평소에는 얼마나 부드럽고 친절합니까? 그렇다고 그들의 속마음도 그렇게 부드럽고 친절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관계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평소의 그 부드럽고 친절하던 모습은 순간 없어지고 얼마나 잔인해지는지 모릅니다. 그 원인도 알고 보면 그들의 생활 문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양인들이 식사할 때 손에 무엇을 들고 식사를 하는가 자세히 보십시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쇠스랑을 들고 식사를 합니다. 칼로 찢고 자르고 토막을 내 가지고는 쇠스랑으로 찍어서 먹습니다. 그런 삶의 형태들이 알게 모르게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잔인할 수 있는 심리적인 영향을 주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역사를 보면 모두 정복의 역사이고 총잡이의 역사이고 전쟁의 역사가 아닙니까?

평소 참하고 순종 잘해서 브닌나라는 몸종을 남편에게 주었더니 이 여인이 잉태를 하자마자 순간적으로 돌변했습니다. 아주 무섭게 변했습니다. 그때 한나는 굉장히 황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한나라는 여인의 눈에서 불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보지 않아도 다 알 만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이 여인이 괴로워합니다. 고민을 합니다. 매일같이 눈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참 착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는 아내에게 가서 8절을 보면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여보, 울긴 왜 울어.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하는 거요. 내가 있잖아.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아. 울지마."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이 남편은 참 신사적이고 착한 남편입니다. 그렇지 않고 아들에게 미친 남자 같았어 보십시오.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부인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입태해서 배가 불러오는 첩으 방에 틀어 박혀서 히히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착한 남편들에게 아이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집 주위를 보십시오. 아주 착한 남편들에게 아이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착한 남편들에게 딸들이 많습니다. 딸이 셋씩 넷씩인 가정을 보면 그 남편들이 틀림없이 착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아이를 가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세상에는 아이가 없는 가정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누가 아이 없는 사명을 짊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주 착한 남편들에게 이 같은 사명을 지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괴팍한 나자에게 자녀가 없어 보십시오. 그 가정은 곧 깨지고 말 것입니다. 또 아주 괴팍한 남자에게 딸만 셋씩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어디 나가서 아들을 낳아 가지고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은 그런 사명을 착한 남편들에게 지우십니다. 아이가 없어도 가정을 지킬 만한 사람에게, 딸만 많이 낳아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착한 남자들에게 그런 사명을 지우십니다. 그렇다고 아들만 셋씩 낳은 아버지들은 모두 괴팍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 한나라는 여인은 착한 남편으로부터 사랑도 받았고 극진한 위로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도의 모범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 번째는 기도의 간절성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요소입니다. 기도에는 무엇보다도 간절성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한나가 성전에 앉아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

던지 성경을 보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고 음성도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엘리 제사장이 그만 술취한 줄 알고 큰 소리를 칩니다. 14절을 보면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그럽니다. 한나는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 바람에 술 취한 것같이 기도에 심취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그런 곳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주 진지한 대화는 조용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데이트하는 청춘 남녀들을 보십시오. 시장 바닥 같은 곳에서 데이트하지 않습니다. 아주 조용한 곳에 둘이 앉아서 말도 하지 않습니다. 둘이 눈만 마주하고 앉아서는 얼굴만 쳐다 보고 있습니다. 굳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도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그것이 기도입니다.
한나는 지금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홀로 앉아서 아주 심취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런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첫째 요소입니다.

 

두 번째는 분명한 목적입니다.

 

기도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그 목적이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냥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에게 아들을 주십시오. 주시기만 하면 그를 평생 나실인으로 키우겠습니다."
나실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으로 키우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병들어도 약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평생 머리를 깎아서는 안 됩니다. 또 술을 마셔도 안 되고,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거나 모아서도 안 됩니다. 이 말은 어머니가 죽어도 가서 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한나는 아들을 낳아도 자신이 죽은 다음에 와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좋으니 아들만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기도의 목적이 분명합니까?
오늘 우리들의 기도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목적이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냥 구하기는 하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왜 돈을 달라는지 그 이유가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아들을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습니다." 어찌 이런 기도가 응답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기도에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약속 이행입니다.

 

결국 한나는 기도 응답을 받아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그렇게 귀한 아들을 낳아서 젖뗄 만큼 키웠습니다. 그러니 그 얼마나 귀한 아이입니까? 그래도 이 여인은 약속대로 젖을 때자마자 아이를 데려다 엘리 제사장에게 맡깁니다. 이 아이는 이미 내 아이가 아닙니다. 내 품에 끼고 살 수 있는 그런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이로 성전에서 자라도록 보내 버립니다.
그리고 아들이 보고 싶으면 일년에 한 번씩 제사일에 가서 그것도 아이가 마음이 산란해질까 봐서 가까이 가서 안아 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서 자라나는 아이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모습입니까?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것도 문제입니다. 급할 때는 우리들이 얼마나 약속을 잘합니까? 별 약속을 다해서 기도 응답을 받고 문제가 풀리면 대부분은 약속 이행을 하지 않습니다. 병만 고쳐 주시면 무엇이든지 다하겠다고 해놓고는 병이 나으면 꿩 귀먹은 소식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그러니까 서원했으면서도 간단하게 잊어버리고, 약속하고서도 간단하게 어겨 버리고, 헌금을 약속했다가도 간단하게 번복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 점에 아주 분명했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한 아이였지만 서원대로 아이가 자라자 하나님께 갖다 바칩니다. 그리고 아이가 보고 싶으면 가까이 가서 안아 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서 아이가 놀고 있는 모습만 보고는 눈물 지으면서 그냥 돌아옵니다. 그러니 그 심정이 얼마나 눈물겹습니까? 이 땅에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 데는 이런 애처로운 사연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물 짓고 그냥 돌아가는 그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리가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한나를 불러 놓고 축복 기도를 해줍니다.
2:20을 보면 "(삼상2:20) 엘 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축복해 줍니다. 그러니 그 기도 또한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겠습니까? 그랬더니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후에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를 바치고 다섯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런 생활을 가리켜서 신앙 생활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신앙 안에서 살되 분명한 뜻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하시고 축복하시되 배로 축복하십니다. 이런 생활을 누리는 삶을 가리켜서 신앙 생활이라고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되 남들 흉내나 내고 남들 뒤나 따라다니고 생각 없이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이런 확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증거가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축복의 생활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