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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마 17;1-8)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걸작품중에 하나가 <최후의 만찬>입니다. 12 제작들과 함께 예수님이 성만찬을 하는 그림입니다. 지구상에 이 그림을 한번도 안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그림 한 장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 년 동안 고생많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 그린 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친구 몇 명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자기로 싸여져 있는 이 그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습니다. 모두가 감탄을 하였습니다.
그림에 매료된 친구들이 탄성을 지르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그림이군요. 예수님의 손에 들린 저 포도주 잔은 정말 실감이 납니다. 저 유리잔은 정말 놀랍군요.> 이런 칭찬을 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을 가지고 오더니 유리잔을 지워 버렸습니다. 감격스럽게 그림을 구경하던 친구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저렇게 잘 그린 잔을 지워 버리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이 작품을 실패한 그림이다. 나는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면서 예수님 얼굴을 보기 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일 먼저 예수님이 들고 있는 잔을 보았다. 내 의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을 다시 들어 예수님의 얼굴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도록 그림을 그렸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직 예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보면서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 데 예수님은 안 보이고 건물이 보이면 안 됩니다. 목사가 보여도 안 됩니다. 전자 오르간이 보여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가 보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다볼산입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신 산이라고 하여서 오늘날은 변화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산꼭대기에서 변화되셨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났습니다. 옷도 빛처럼 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 때 구름이 세 분을 덮으면서 구름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이 이 음성을 듣고 엎드렸습니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았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결론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1. 사람들보다 예수님만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와 엘리야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도하여 낸 절대자입니다. 건국자입니다. 모세없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중에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마지막 성경은 말라기이고 말자기 마지막 장은 4장은 4장에서 엘리야로 끝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민족입니다. 메시야가 오기 바로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을 언급하며 구약은 끝나고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모세는 율법을 이룬 사람이고 엘리야는 예언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두 분이 예수님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감탄하여 땅에 엎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오직 예수님만 남고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은 이렇게 끝납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교회에 와서 사람이 보이면 안 됩니다. 목사나 장로나 친구가 보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흔히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뭐 저래?> <장로가 뭐 저래?> <교인들이 뭐 저래?>라고 회의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람 때문에 왔다가 사람 때문에 떠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목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장로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교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을 향하여 가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지 말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CNN 방송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쑈 담당자는 래리 킹입니다. 그는 유대인입니다. TV에 나올 때마다 그는 Y 셔쓰만 입습니다. 그리고 멜빵을 눈에 띄이게 어깨에 맨 모습이 그의 상표입니다. 그리고 마이크 하나로 온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날마다 특이한 사람을 등장시켜서 토크 쑈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구를 통털어서 한 사람과 인터뷰하여야 한다면 누구를 선정하겠습니까?>
그는 당당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지구상에 죽었거나 살아 있는 사람들중에 인터뷰하고 싶은 한 명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그 분과 인터뷰하면서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정말 처녀에게서 태어났는 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죽었다가 살아 났는 지 묻고 싶습니다. 그 분의 대답은 역사를 증명하여 줄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낭이 한 말과 같은 말입니다.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없이 이해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 보여야 예수님의 공동체입니다.
2. 환경보다 예수님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베드로는 좋은 환경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집을 짓기에 가장 좋은 곳은 산위입니다. 지중해 바람을 신선하게 맞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든 동네가 산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 할 것이요.>
베드로는 산위에 초막을 셋 짓자고 말했습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명하신 세 분과 함께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변 환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사람도 안 보이고 초막도 안 보였습니다. 오직 예수였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대결하여 이겼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 두 분과 서계셨습니다.
산은 역사가 일어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 곳에 환경을 보며 베드로는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 환경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1871년 미국 시카코 한 도시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소가 외양간에서 난로를 건드려 쓰러뜨린 것이 화재원인이었습니다. 당시 무디 목사님이 선풍적으로 시카코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가 잿더미로 변하였습니다. 물론 무디 집도 폭삭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언 다른 도시 성도가 무디 목사님을 위로차 찾아 와서 말했습니다.
<모두를 잃었군요.> 그 대 무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한 분만은 남아 있지요. 그 분이 다 하실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불타지 아니한 오직 예수님을 모시고 전보다 더 큰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네델란드의 고리덴 붐 여사는 나치 정권하에서 학살당하는 유대인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발각되어서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언제 사형당할이지 모르는 암담한 동굴속에서 지냈습니다. 나치 정권이 무너진 후 감옥에서 석방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이 세상을 보았다면 나는 감옥 그 모진 고문속에서 살지 못 하였습니다. 세상을 보면 절망이었습니다. 환경을 보면 낙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 보니 희망이 생겼습니다.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 어두워도 참고 있어야 합니다. 터널을 지나며 어둡다고 뛰어 내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참고 지나면 터널을 빠져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만 보아야 합니다.
3. 신비보다 예수님만
제자들은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1500년전 사람이 모세를 보았습니다. 이미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세 제자는 두려워서 엎드렸습니다.
여기에 초막 셋을 세워서 같이 살고 싶었습니다. 신비에 머믈러 살고 싶었습니다. 신비 체험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과 우리와 만남은 신비하게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신비체험은 많이 할수록 좋지만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신비체험한 장소에 머믈려고 하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신비 체험한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비체험은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여기에> 초막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신비한 사람들과 같이 초막 셋에서 같이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누구에게 은혜받았다고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그 분을 통하여 은헤를 주신 것뿐입니다. 그 곳에서 은혜받았고 그 곳에서 병고침받았다고 그 장소에 집착하여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주시고 병고침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만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감정의 변화를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좋아서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 때 구름이 세 분을 덮으면서 구름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이 이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제자들은 좋아 하다가 두려워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하였습니다.
두려움이 오직 예수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무엇이 오직 예수입니까? 두려움이 오직 예수입니다.
이번 주에 성막 쎄미나는 238기가 됩니다. 38기 쎄미나에 생긴 일입니다. 김 상수 목사님이 참석하였습니다. 간암 말기였습니다. 간에 이미 암이 9cm나 크게 생겨 있었습니다. 간은 자기 주먹만합니다. 그렇게 큰 암이라 수술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3개월 정도 밖에 살 수 없다고 진단하였습니다. 김 목사님은 그런 중에도 성막 공부를 왔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그를 사로 잡았습니다. 피 복음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있다는 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짐승 피와 예수님의 피를 연관시켜서 설명할 때 큰 불이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 결심하였습니다.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 데 피설교만 하다가 죽으리라.>
그리고 내가 출판한 피설교집 <피흘림이 없은 즉>이라는 책을 사가지고 돌아 갔습니다. 그리고 매 주일 피설교만 하였습니다. 3개월이 지났습니다. 몸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생기가 돋아 남을 느꼈습니다. 병원에 가서 재검진을 받았습니다.
며칠 후 결과를 보기 위하여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당신 몸속에는 암 세포가 하나도 없습니다.>
김 목사님은 병원에서 나오자 말자 내게 전화부터 하였습니다.
<형님! 형님이 내 병을 고쳐 주셨어요.>
그리고 사정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너는 목사가 되어서도 누가 병 고쳐 주었는 지를 모르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라.>
그 후 김 목사님은 우리 성막 쎄미나할 때면 와서 간증하여 주고 찬송인도를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성막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성막 공부하다가 암을 이겼으니 성막을 만들자.> 그 모형을 우리 교회에 기증하였습니다.
신비체험입니다. 그렇다고 내게 은혜를 입은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분명 간암을 고침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수양관이 고쳐 준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병고침을 받고 좋아하는 감정에서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감정으로 끝내야 합니다.
두려움이 오직 예수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두려운 분입니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 재정 부장 장로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회 종각을 세웠습니다. 돈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정부장 장로님은 사업을 하다가 돈이 급히 필요하였습니다. 종각 만든 업자에게 주어야 할 돈을 자기가 임시 사용하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 가다가 추럭에 치어 공중 높이 솟아 올랐습니다. 떨어지면서 머리가 개져 숨졌습니다. 그 뒤를 달리던 차가 미처 급정거하지 못 하고 그 몸위를 지나가서 시신이 걸레처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운 분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오직 예수입니다.
내가 세 번 부흥회를 인도한 로스엔젤레스의 은혜 한인 교회에 유 의웅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옷 사업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교회 건축을 하게 되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내가 장로입니다. 건축헌금을 많이 하여야 합니다. 옷 사업이 잘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그 이튿날부터 10배 옷이 팔려 나갔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옷 사업을 그만 두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목사가 되어 카자크스탄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5천명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그 교회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오직 예수입니다.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덴마크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느 나라의 왕자가 사냥을 나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시골 길에서 한 처녀를 만났습니다. 한 눈에 반하여 버렸습니다. 궁으로 돌아왔는 데 온통 그 처녀 생각뿐이었습니다. 보고 싶어서 미칠 정도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보고 싶어져서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처녀를 궁으로 데려와 배필로 삼아야겠다는 결심하였습니다. 어떻게 데려올 것인가를 궁리하다가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첫째 방법은 왕자 자신의 권위로 다가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왕자의 정장을 하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가가 청혼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서는 그 처녀의 진정한 사랑을 얻기에는 합당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위압감을 느낄 것같았습니다.
두 번째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처녀를 데려다가 왕궁의 영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부하를 보내어 처녀를 왕궁으로 데려다가 왕궁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 주고는 청혼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도 마땅치 않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처녀가 사랑의 마음이 없어도 왕궁의 영광을 보고 결혼에 응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왕자도, 왕궁도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기엔 합당치 않을 것이니 왕자 자신이 시골 목동의 모습을 하고는 그 처녀에게로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여 왕궁으로 데려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왕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골 처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왕궁은 하늘나라입니다. 왕자 예수님은 시골 처녀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세번째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직접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자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왔다면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천국을 구경시켜 준 후 믿으라면 안 믿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순수한 사랑을 하여 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보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진정한 변화산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순교자가 많은 나라가 일본입니다. 기독교인이 가장 적은 나라도 일본입니다. 에도 막부 시대에 수 만명이 순교하였습니다. 그 때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위하여 <후미에>라는 살인 방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동판을 만들어 땅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일열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면 기독교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을 밟지 않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러나 살려고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하였습니다.
전 날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발바닥을 피가 나도록 문질러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새로운 짚신을 신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예수님의 얼굴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뒷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밤을 지내우며 통곡하면서 회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다시 회복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살아 났지만 그 후부터는 죄인된 모습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통곡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욕되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된 모습으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두렵게 살아가는 것이 오직 예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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