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찢는 예배를 드리라
시 51:16-17
시 51:16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리더라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언젠가 주일 예배 후 한 분이 나오셔서“제가 살인죄를 짓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부탁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제가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가 예배드리고 무서운 죄에서 벗어났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에 예배를 바로 드리면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엄청나게 커진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은 것이 죄라고 깨달아지거나, 죄라고 여겼지만 갈등만 하며 지내던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랬습니다.
사 6:5 ...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는 눈이 처음 열린 순간,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오늘 예배 중에 이런 일을 경험해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죄에 대한 애통한 회개가 나오면 삽니다. 그러나 회개해야 할 죄가 있는데, 예배를 드리고도, 마음이 찢어지는 애통함을 느끼지 못하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다윗이 부하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게 했습니다. 그러고도 그는 매일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제물을 좋은 것으로 드렸던 것 같습니다. 왕이니 소와 양은 얼마든지 제물로 바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시 51:16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리더라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간음한 다윗에게 구하시는 것이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찢겨진 심령’, 애통함의 회개였습니다.
: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한 목사님이 교단에서 치르는 진급시험을 보다가 커닝을 하고 합격을 했습니다. 본인 밖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진하여 진급을 포기했습니다. 한해 진급이 누락되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유는 예배드릴 때마다 성령의 근심 때문에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한번은 성찬 때, 주님께서 저와 한 몸 되신 은혜에 대한 메시지를 들으면서, 하나 되기 싫어했던 분이 생각났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주님은 그런 나와 한 몸이 되시는 것이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하니 너무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성찬을 하면서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진짜 성찬의 은혜의 눈이 뜨인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이 찢겨지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바로 세우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이 글을 쓰셨는데, 자신은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한번 죽어 보고 싶다." 고 했습니다. “죽을 때, 기분은 어떤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죽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다. 그런데 죽고 난 다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지가 두렵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이 없다" ”목사가 "뭐 그래" 라고 욕해도, “그러고도 목사냐”고 욕해도 괜찮다. 그런 것은 잠깐만 먹으면 되는 욕이니까.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라면 다르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서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러나 죽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매번 예배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고 난 다음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예행연습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 이라고 했습니다. 좀 잔인한 표현입니다. :17에서는 좀 더 표현이 강합니다.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 마음이 찢겨지고 짓밟히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순간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휘장을 찢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것을 제거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찢겨져서 우리가 하나님께 언제든지, 얼마든지 누구든지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찢어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신 것처럼 우리 마음도 찢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철옹성처럼 굳고 견고합니다. 사람도, 하나님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리석게도 마귀는 안방처럼 들락날락하게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찢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마음 바깥에 두지 않고 마음 안에 오시도록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왕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정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 3: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마음을 찢는 것은 단순히 죄를 괴로워하는 것만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기로는 가룟 유다만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마음을 찢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마음에 오시도록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죽어!” “죽어!” 하는 마귀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깊은 죄책감에서 정신이상이 된 이도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워했으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을 찢은 것이 아니기에 주님께서 그를 도우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올바른 회개, 진정한 회개는 죄를 괴로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찢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도 받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방탕하고 속 썩이던 자녀가 집에 돌아왔는데, 얼굴이 눈물범벅입니다. 그러면 부모 마음이 어떻습니까? 자식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괜찮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때, 우리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보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 죄가 많으냐, 적으냐를 보시지도 않습니다. 다 지옥에 갈 자임에는 똑같기 때문입니다. 죄는 한가지만이라도 우리를 지옥에 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죄가 아니라 마음을 찢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 저 지난 주 죄 많이 지었어요.” 말은 분명히 회개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찌는 애통함은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난 주 죄 많이 지었어요.” 하면서 농담이나 하고 시시덕거리고 있다면 큰일입니다.
정말 마음을 찢은 사람은 사람들이 다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때,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아내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다시 풀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다시 왕이 되셔서 우리 삶을 회복하시려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계속 사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죄 안 짓고 살기 어려운 것은 유혹이 강하거나 우리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이 강하고 의지가 약해서 죄를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묻겠습니다. “독약을 마시라면 마시겠습니까?” 독약인 줄 알기에 아무리 목이 말라도 안 마실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해 보면 죄는 독약 보다 더 끔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약을 평생 마시지 말라” 한다고 답답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죄의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죄짓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 보는 앞에서 죄짓기 힘들다면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는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면 우리 마음이 찢겨진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찢어야 할 그 사람이 아닙니까?
아직 덤덤하십니까? 별로 깨달아지는 죄가 없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라고 말합니다. 정말 화가 날 정도입니다. ‘그래 교인 중에 나쁜 사람들도 있어요. 거짓말쟁이, 사기꾼 같은 목사나 교인들도 많아요. 그런 나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함께 비난을 받는 거예요.’ 하고 답답해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른 어떤 교인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거짓말쟁이! 사기꾼!”일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았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쟁이인 것입니다.
2. 자신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말할 수 없는 죄인이었음을 믿습니까? 그런데도 화를 잘 낸다면 거짓말쟁이입니다.
3.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심을 믿습니까? 그렇다고 믿는다면서 염려 걱정하며 산다면 거짓말쟁이입니다.
4. 주 예수님께서 정말 마음에 임하셨음을 믿습니까? 그렇다고 믿는다면서 은밀한 죄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쟁이입니다.
5. 정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습니까? 그렇다고 믿는다면서 고난이 축복이라 여겨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쟁이입니다.
“목사님은 너무 지나친 것이 흠입니다” 하는 분이 계십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무엇이든지 적당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너무 지나쳐도 문제입니다.”
그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태도는 영적 문제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는 적당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는 적당한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려는 마음은 큰 미혹입니다. 아예 방탕한 삶을 살면, 애통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고후 13:5에서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시험해 보고 검증해 보라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부활의 주님과 함께 동행 하시며 부활의 생명으로 살고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신 것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예배 때, 마음을 찢는 애통함이 없다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작아도 큰 일이 있습니다. 죄를 품고 무감각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아이 성 전투에서 지고는 이제 끝인 것처럼 애통했습니다. 바로 전에 큰 성 여리고에서 대승했습니다. 아이 성은 작은 성입니다. 전쟁을 하다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성 전투에서 한번 졌다고 아주 끝난 것처럼 절망하는 것은 오히려 장군다운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이 성에서 진 것을 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장로들과 함께 ‘옷을 찢고...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가 졌습니까?’ 그래서 아간의 죄를 청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 처음 선교를 시작할 때 중국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뛰어난 학식이 있는 한 중국인 학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중국 유생은 선교사와 매일 만나 신약성경을 읽으며 적합한 중국어를 찾아 주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중국인 학자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일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 번역을 다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선교사가 이 중국학자에게 기독교에 대한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말하기를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기독교인을 만나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선교사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바로 “내가 기독교인이오.” 하니까 이 중국학자가 선교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아닙니다.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나는 그동안 당신과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었는데 그동안에 당신은 남에 대해서 악평을 한 적이 많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데 악평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때때로 걱정과 염려 때문에 초조해 한 적도 많았습니다. 결코 기쁨이 충만한 적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그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기독교인이었다면 나도 당신을 보고 기독교인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말에 이 선교사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 중국인 학자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돌아와서는 하나님 앞에서 통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월 한 달간, 안식월을 가졌습니다.
건강의 회복을 위하여 가진 안식월이었지만 주님의 계획은 저의 기도의 회복이었습니다.
안식년을 시작하는 날,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지금 97세인데, 80번째 생일 후 미국의 유명한 토크 쇼 진행자인 래리 킹과의 인터뷰에서 "당신의 삶을 뒤돌아보면 당신은 상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후회도 없겠지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그래함 목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실패자입니다. 나는 사람들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고 반대로 하나님과는 너무 작은 시간을 보냈지요. 사업상 미팅을 하느라 너무 바빴고 예배에도 너무 바빴어요. 나는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더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주님께서 제게 주시는 말씀이라 깨달아졌습니다. 저도 똑같은 패턴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육신의 향락을 위하여 방탕하게 살지 않습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복음을 전하느라 몸이 부서져라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실패자라고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십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일을 했다고 평가받는 목사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실패자’라고 고백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나 여러 행사 때문에 하나님과의 시간이 너무 작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더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작년부터 기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성령의 책망을 느꼈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처럼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사역의 원천은 주님과 하나 되는 기도 시간에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기도했다’는 위안 정도에 그쳤지, 충분한 기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설교 준비에 쫓기고 여러 일정을 감당하였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실패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몰랐을 때는 계속 그렇게 살지라도 알고서야 어떻게 이전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 삶과 사역을 철저히 재점검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적게 몸부림치자!”
익숙하지 않은 패턴입니다. 그러나 늦었지만 걸음마하는 아이처럼 끊임없이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왜 하는가? 여러분도 지금 살고 있는 패턴을 재점검해야 하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고민하고 갈등만 하지 말고 빛이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주여, 나의 마음에 빛을 비추소서!
주님조차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회개합니다.
죄를 감추고, 감싸고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마음을 찢습니다. 주님을 영접합니다.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고 살지 않겠습니다.
거짓말쟁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애통할 것을 애통해할 은혜를 부어 주소서.
찬송 190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 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후렴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여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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