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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신앙! (롬 14:7-9)

by 【고동엽】 2022. 1. 22.

위하여 신앙! (롬 14:7-9)

 

본문에 보면 "위하여"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주께서 죽으셨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 "위하여"라는 말은 의식의 변화를 말해주는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이를테면 삶의 목적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여러 가지가 변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게 되면 금방 돈이 생기고 출세를 하고 큰집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금방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현상은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목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위하여"에서 "주를 위하여"로 목적이 바뀌게 됩니다.
전에는 세상을 위하여 살았고, 자신을 위하여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를 위하여 살고, 그에게 온갖 관심을 집중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는 나를 목적으로 해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삶의 목적이 예수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궤도를 수정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위하여" 신앙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역대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김익두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한때 이름 난 깡패였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시장에 오고 갈 때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은 후 증거하기를 "나를 보라, 만일 예수님이 얼마만큼 능력이 있는가 궁금하면 나를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그만큼 철저하게 변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전도하러 가는 중에 산길을 가다가 더워서 언덕에 앉아 쉬고 있는데, 웬 술주정뱅이가 올라오더니 다짜고짜 패더라고 합니다. 왜 건방지게 나보다 먼저 올라와서 앉았느냐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는 마구 때립니다. 아무 소리 안하고 그 매를 다 맞은 다음에 이 김익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은혜는 당신이 받았소. 내가 김익두야." 그랬더니 이 술꾼이 정신이 번쩍 나서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빌더랍니다. 그래서 점잖게 타일렀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당신 장사 치르는 날이었을 거요. 예수는 내가 믿고 은혜는 당신이 입은 줄 아시오." 그러고는 그를 끌고 다니면서 전도를 했는데, 그가 나중에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목적이 바뀐 후이기 때문에 예수를 위해서 참고, 예수 때문에 인내하고, 주님을 생각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위하여" 신앙입니다.
변화된 삶, 목적이 바뀐 삶입니다. 전에는 내 체면 때문에 참았고, 내 인격 때문에 참았지만, 예수를 만난 후로는 나 때문이 아니고 예수 때문에 참고, 지고, 손해보고, 얻어맞고 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목적의 전환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친정을 위해서 살던 관심을 시집을 위해서로 바꾸어야 하듯이 우리가 예수를 만난 후에는 모든 관심과 목적과 뜻을 예수를 위해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발전하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나 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모르게 되면 내가 목적이 됩니다. 매사에 자기가 중심이 됩니다.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다는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이 강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게 되어서 목적이 바뀌게 되면 나를 초월하는 의지가 생기고, 타인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를테면 생각과 마음과 의식이 밖으로 향하여 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해 동포적인 커다란 마음, 넓은 마음, 성숙한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그런 재주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런 힘을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백의의 천사라는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전장으로 달려가 부상을 당한 군인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나라 병사만 치료해 준 것이 아니고 국적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적국의 병사까지도 부상을 당한 군인들은 모두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랬다고 나중에 첩자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때 한 말은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애국심만 가지고 "내 나라" 군인만을 치료해 줄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애국심만 가지고 내 나라 병사만 치료해 주고 다른 나라 병사라고 해서 죽어 가는 사람을 버릴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애국심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내 나라 군인이건 적국의 군인이건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사랑할 수 있는 인도주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주의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사랑하고, 기독교는 사람을 사람으로만 보지 않고 형제로 보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예수를 만난 후에 변화된 가슴에서 나오는 열린 정신 때문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하르나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이웃을 내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의 이웃 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삶의 목적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적만 변하게 되면 나를 고집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모두를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회를 향해서도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엥겔스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바에 의하여 자기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 자신의 값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매겨진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나는 값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만큼 나의 값이 매겨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봉사 좀 하자 하면 큰 영광으로 알고 용기를 가지고 나서서 하십시오. 값이 없으면 그런 부탁을 하지도 않습니다. 값이 떨어지기 전에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는 자기를 위해서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일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어떤 주부는 우리 여자들은 평생 가족들의 뒷바라지만 하다 죽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것은 모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신 이유는 허무주의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정이 있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가 생깁니다. 가정이 있으니까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고, 악착같이 땀을 흘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이것이 어찌 하기 싫은 뒷바라지며, 헛수고란 말입니까?

여러분, 가정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생활, 그 마음속에 무엇이 찾아오겠습니까? 허무주의밖에 찾아오는 것이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화장은 왜 하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합니까? 사람이 집에서 혼자 있을 때는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곱게 옷을 해 입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결국 변화 받은 사람은 이 같은 의식이 성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사회를 향해서 열려진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열려진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열려진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네 번째는 또 죽음까지도 열려 있는 죽음을 갖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살든지 죽든지" 그랬습니다. 이 말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본문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만난 사람은 죽음까지도 "죽어지는"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고 "죽는" 죽음을 죽는다는 말입니다.
죽어져 죽는 죽음은 값이 없는 죽음이라면 죽는 죽음은 변화된 사람이 목적을 "위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죽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죽는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위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냥 왔다가 그냥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윤회 적인 죽음 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8절에 보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살고 죽는 문제는 나에게서 떠나 주의 손에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오늘부터 예수님을 믿겠습니다"하고 결단을 하면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의 운명은 주님의 손으로 넘어가 위탁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내 운명이 좋게 전개되든 나쁘게 전개되든 그것은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겼더니 내 운명이 좋게 전개되었다 하면 감사하고, 나쁘게 전개되었다 하면 그곳에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니 지켜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때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 때가 있고, 또 죽고 싶다는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실례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연히 불러 가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지금 세상에 그냥 놔두시는 것은 당신에게 뜻이 있어서입니다. 또 우리들이 죽을까 봐서 안달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더 살고 싶어도, 애원을 한다고 해도, 산소 호흡기를 끼고 온 가족이 나서서 발버둥 이를 쳐봐도 그분이 작정만 하시면 별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라."
이것이 "위하여 죽고, 위하여 살아가는 "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을 살아갑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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