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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신앙! (막 7:31-37)

by 【고동엽】 2022. 1. 22.

에바다 신앙! (막 7:31-37)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는 데가볼리라는 지역에 가셨습니다. 데가볼리라는 곳은 열 개의 헬라 도시들이 연합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도시입니다. 그곳에 가셨을 때 귀먹고 말을 못하는 병자 한 사람이 와서 고쳐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양 귀와 혀에 넣고는 하늘을 향하여 탄식하시며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손에 침을 뱉어서 환부에 댄 것은 당시 헬라인이나 유대인들 사이에서 치료 행위로 사용한 민간 요법에 해당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탄식하시며 기도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귀머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시려는 아픈 마음과 고쳐 주시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고 했습니다. "에바다"라는 말은 "열려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막힌 귀야 열려라." "굳어 있는 혀야 풀려라." 그런 뜻입니다. 그랬더니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듣게 되었고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의 교훈을 받게 됩니다.

 

첫째, 듣지 못하는 것이 비극입니다.

 

불구자는 모두 불쌍한 사람이지만 그 중에서도 듣지 못하는 불구자는 더욱 불쌍한 사람입니다. 좋은 소리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고, 좋은 음악이나, 발달된 통신이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하시며 그 병자를 위해서 "에바다"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와있는 귀먹은 사람의 불쌍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 가운데도 이 사람처럼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귀가 막혀서 위로부터 들려 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속에서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묵상을 해도,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깊이 묻혀 있어도 그 자연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무감각합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이 고작 육신의 소리만 듣고, 생리적인 소리만 듣고, 욕망의 소리만 듣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니면 매일 같이 듣는다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물가 이야기만 듣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다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당하게 되면 속수 무책입니다. 이 일이 왜 내게 발생되었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이 왜 이 같은 일을 내게 주셨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듣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대로 원망부터 하고, 불평부터 하고, 불신부터 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의 답답함입니다.

어떤 부부가 아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아이를 주십시오." 얼마나 간절한 기도 제목입니까? 그렇게 기도하기를 16년 동안이나 했습니다. 이 부부가 마침내 기도 응답을 받아서 16년 만에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아이가 16년 만에 나왔는데 보니까 불구아입니다. 이 부부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이 부부가 불구의 아이를 낳아 놓고는 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한편으로 마음이 서운하기도 하고, 당황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하는 마음까지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모두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데 귀가 어두워서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채 고민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귀머거리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근심하면서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하고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마음속에 감동이 옵니다. 감동된 마음속에서 깊이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불구아를 누구에게 맡겨야 사랑을 쏟아 가며 키워줄까 하고 16년 동안을 찾다가 너희 부부한테 맡겼노라."
이 부부가 그 음성을 듣고 나서야 일순간에 의심이 사라지고, 불만이 사라지고,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부부는 이 어린 아이를 자신들에게 주신 것을 늘 감사하면서 길렀다는 것입니다. 알고 나니까 이렇게도 감사한데, 모르니까 답답하고, 불만스럽고, 불행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현대인들에게 불행스러운 면이 있다면 그것은 명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묵상이 없고,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들으려는 준비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먹은 사람을 붙잡고 탄식하시면서 "에바다" 하셨습니다. 닫힌 귀야, 열려라는 말입니다. 열려서 세상의 소리도 듣고, 하늘의 소리도 듣고, 이웃의 소리도 들으라는 말입니다. 귀는 반드시 열려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귀가 어두워서 민중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독재자가 됩니다. 지식 있는 사람이 자아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교만해집니다. 인간이 귀가 어두워서 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면 속물이 됩니다. 그래서 귀가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말을 못하는 것이 비극입니다.

 

세상에서 답답한 사람은 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바다"하신 것입니다. 즉, 혀야, 풀어져서 할 말을 하고, 전할 말은 전하고, 꾸짖을 말은 꾸짖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 가운데도 말을 못하는 벙어리들이 많습니다. 의와 진실을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은 모두 벙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암울하고 어두울 때 의인이 입을 열지 않고 있으면 돌들이라도 소리 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득재를 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손을 쓰는 곳이 언론입니다. 언론을 탄압해서 귀와 입을 막아 놓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 의해서 출애굽을 했습니다. 시내산까지 와서 모세는 산에 올라가 40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산밑에 있던 사람들이 금을 거두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이제부터 모세의 하나님은 없어졌고 이 금송아지가 우리들의 신이다."하고는 그 앞에서 춤추고 입맞추고 야단을 했습니다.
그 같은 모습을 아론은 끝까지 보았으면서도 한 마디의 말도 못하고 침묵했습니다. 말 잘하기로 소문 난 아론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대사로 파견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잘하기로 소문 난 아론이 하나님이 욕을 당하고, 진리가 짓밟힘을 당하고, 민족의 장래에 커다란 재앙이 쏟아질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때 백성 앞에 나서서 설득력 있게 옳고 그름을 분별해 주고, 설득해서, 죄짓는 일을 못하도록 해야 그것이 참으로 말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말을 해야 할 때는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것은 입은 있으나 말 못하는 벙어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할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외국 영화 가운데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들이 붙잡혀서 처형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레지스탕스도 아니고 나치에 불순한 행동도 하지 않은 장사꾼 한 사람이 붙잡혀 와서 함께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악을 쓰며 변명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나는 나치에 저항한 일도 없고 관심도 없다. 다만 왔다갔다하면서 장사를 한 죄밖에 없다. 아는 저 사람들과 함께 죽은 것이 억울하다." 입에 거품을 품으며 악을 씁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지스탕스 한 사람이 한심한 듯이 입을 열었습니다. "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전쟁은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수많은 민족이 나치에 의해서 희생되었고, 도시가 파괴되고, 나라가 멸망 직전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니 그러면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일을 해야 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입을 열어야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결백이 아닙니다. 그것이 벙어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탄식하시면서 혀에 손을 넣어 "에바다" 하신 것입니다. "혀야 풀어져서 할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혀는 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할 말을 해야 하고, 전해야 할 말은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셋째, 더 심각한 것은 열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벙어리가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도 비극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비극은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듣지를 못하고 말을 못하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를 흉보는 줄 알고 마음을 닫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열리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면 불행해집니다. 이웃끼리 교류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도 교통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비극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 가운데는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를 도우려고도 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간섭하려고도 하지 않고, 간섭을 받기도 싫어합니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필요로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까지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구제 불능입니다. 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탄식을 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서 10년을 기도했는데도 그 마음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망말고 더 기도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 결혼할 때 믿지 않는 상대를 골라 놓고서 사는 말이 "결혼하고 나서 전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아주 좋은 희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은 그것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은 아주 굳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다는 말까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에바다"하고 외치신 것입니다. 귀가 열려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입이 열려서 진리의 말을, 복음의 말을 선포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린 가슴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에바다"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 귀도 열리고, 입도 열리고, 마음도 활짝 열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열린 귀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린 입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열린 가슴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에바다 신앙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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