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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완성! (히 4:14-16)

by 【고동엽】 2022. 1. 22.

미완성의 완성! (히 4:14-16)

 

사탄이 하나님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고 하늘과 땅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왜 사람을 만들어 놓으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사탄의 질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완성품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보기에 좋았다고 했지만 사람은 미완성품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좋았다고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식물까지도 만드시되 모두 완성품으로 만드셨습니다. 자연도, 만물도, 식물까지도 모두 완성품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심지어는 동물도 그렇습니다. 동물은 새끼를 낳으면 나오자마자 걷고 뛰고 합니다. 그리고 몇 날이 못 되어 동물의 구실을 모두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미완성 상태로 세상에 나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인간 구실을 하려면 적어도 20, 3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그렇다고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50년, 100년을 살아도 역시 미완선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역시 미완성 상태로 일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인간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미완성의 상태" 즉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모든 면에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어떤 도움이 필요하고 어떤 힘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는 필요한 그 힘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힘은 인간의 무지한 부분을 보완해 줍니다. 인간의 무능한 면과 무력한 부분을 보완해 줍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완성품으로 짓지 않으시고 그렇게 부족한 면이 있도록 지으셨습니다. 그 부족한 면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힘입어 메꾸어 가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부족한 면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들이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첫째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살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도 또 죄를 짓고 맙니다. 선을 행하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뜻대로, 잘 되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고민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래서 고민하기를 "왜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악한 마음이 솟아 나오느냐"고 탄식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이 완전함을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가끔 "목사가 되는 그 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그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함을 주시고, 신통력을 주시고,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역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미완성 그대로, 또 죄를 짓고, 또 넘어지고, 그러고는 울고, 탄식하고, 고민하고 그럽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이런 고민은 바울도, 모세도, 다윗도, 베드로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만 넘어지고 실수하고 죄를 짓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은 완전해지는 능력을 주시면 간단할 것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한가지 방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대제사장 제도입니다. 대제사장은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워 놓으신 중보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론이 그 일을 수행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14절에서 (히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 실수를 했을 때는 대제사장 되시고, 중보자 되시는 주님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넘어지고 죄를 짓게 될 때에는 곧바로 주님을 찾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 나가도 죄를 짓고, 안 나가도 되를 짓게 된다면 차라리 안 나가고 죄를 짓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하지 않느냐." 옳은 말씀입니다. 나가도 죄를 짓고 안 나가도 죄를 지을 바에야 안 나가고 죄를 짓는 편이 훨씬 속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왔다가 졸기만 하고 그냥 돌아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특별히 감격스럽게 은혜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은혜를 받고 가든, 졸고 가든,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나의 신앙이 균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이 균형만 이룬다면 내 신앙이 내려간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내가 죄를 짓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꾸준하게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 그때마다 브레이크가 정상적으로 작동을 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6개월이나 1년쯤 신앙 생활에서 떠나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시간, 시간 와서 말씀을 듣고 가든지, 혹은 졸고 가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합 태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티끌이 모여서 태산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망망 대해를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살고, 말씀 안에서 살게 되면 매일매일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가 큰 힘으로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힘을 입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불완전한 내가, 미완성인 내가, 하나님 앞에 자주 찾아 나오는 그 시간을 통해서 나의 신앙이 굳어지고, 강해지고, 온전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완전하나 지어져 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미완성의 완성입니다.

 

둘째는 나약함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실수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동물은 추위에도 강하고 더위에도 강합니다. 그래서 생명력이 강하고 나름대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극복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들에 널려 살고 있는 잡초들을 보십시오. 그 생명이 얼마나 모질고 질긴지 모릅니다. 겨울, 그 모진 추위 속에서 죽었는가 싶었는데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싹으로 재생되어 땅을 뚫고 살아나옵니다. 얼마나 강한 생명력입니까?
또 곤충들을 보십시오. 하잘것없고 보 잘 것이 없는 곤충들도 그 기나긴 추운 겨울 동안 어디서 과동했는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 살아 나와 하늘을 납니다. 하찮은 매미 한 마리도 16일 동안 세상을 날기 위해서 17년 동안이나 땅 속에 묻혀서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곤충들에 비해서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보면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 들고, 넘어지고, 낙심하고 그럽니다. 그런가 하면 조그만 일에 울고 웃고 분노하고 밤잠 설치고 걱정하고 한숨짓고 그럽니다. 사람은 이렇게 나약한 존재입니다.

성경에서는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해 주신다." 여기서 "체휼"이라는 말은 즉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들이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나서 후회하고 넘어지고 할 때 주님은 우리를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주님이 먼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일찍이 인간의 연약함을 먼저 다 체험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아픔과 약함과 비천함을 스스로 모두 겪으신 분입니다.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을 겪으셨고, 남의 집 말구유에 태어나서 집 없는 설음을 겪으셨고, 압박 받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압박 민족의 설음도 겪으셨고,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심으로 이 세상의 배신을 몸소 체험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이 같은 여러 문제들 때문에 넘어져서 고뇌하고 자탄하지만 그분은 우리보다 더 일찍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오늘 우리들이 고뇌하고 자탄하는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체휼하시는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살아가시다가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넘어지게 될 때 너무 크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넘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를 하게 되면 우리보다도 주님은 더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 주님은 우리의 넘어짐을 보시고는 나무라기 전에 우리의 아픔을 당신이 먼저 체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들의 부족한 모습을 보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그럴 수 있느냐고 나무랍니다.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사람이기에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 완벽해질 수도 없습니다. 다만 지어져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좀더 나은, 좀더 굳세고, 깊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지어져 가는 것뿐입니다.

 

셋째는 시험받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또 나약한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늘 시험을 받고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좋으면 시험이 없습니까? 기도를 많이 한다고 시험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도 40일이나 금식한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험을 받을까봐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사탄의 밥입니다. 시험이 우리에게 오면 대개는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웃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힘에 의해서 점점 강해져 가고, 점점 여물어져 가는 것입니다.
걸음마 하던 아이가 나중에는 뛰듯이 점점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완전하나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애초부터 불완전하게 지음을 받았지만 주안에서 은혜를 힘입어 나중에는 바로 설 수 있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이렇게 보완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도의 간디는 40kg밖에 안 되는 작은 육체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의 슈마허라는 사람은 간디를 가리켜서 "큰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작은 것이 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라는 사람은 간디에게 편지하면서 그를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간디의 이름은 모한다스 간디입니다. 그런데 타고르가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른 이후 그의 이름은 "마하트마"가 된 것입니다. 마하트마라는 말은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이를테면 초인이라는 뜻입니다. 간디가 이렇게 초인이 된 것은 그의 장기인 명상 때문입니다.
그는 1주일 중 월요일은 묵상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묵상을 하면서 나라를 생각했고,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였고, 자신이 믿는 신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묵상 속에서 그는 무한한 힘을 끌어냈고 위대한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었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대기만성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큰일이 이루어지고 큰 인물이 만들어지는 데는 끊임없는 노력과 수고와 수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긍휼하심을 받고 은혜를 힘입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뻔뻔스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매일같이 시험을 받고 넘어지고 상처투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뻔뻔스럽지만 그래도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넘어지면서 자라듯이 신앙인들도 그러면서 여물어 가는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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