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는 두려움과 거짓 평안을 조심하라! (요 14:25-31)
지난 고난 주간과 부활절은 그 어느 해보다 더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고난 주간 부활절 행사 팀원으로 섬겼던 교우들이 닫는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하신 장로님께서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기도에 모두가 진심으로 아멘!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가장 놀라운 복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친히 역사하신다! 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려운 고비가 많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고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면서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예수님께서 이 번에도 함께 해 주실까?’ 순간 두려움이 일어나곤 합니다. “주여, 정말 저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 지금 제가 잘 가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 이 문제 속에서도 역사하고 계신가요?” 하는 절박한 기도를 드리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만 늘 확인할 수 있다면 두려울 것도 근심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풍랑도 잔잔하게 하셨던 예수님,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만 분명하면 다 끝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처럼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만 분명하다면 걱정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겠는데 예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는지 지금 내가 가는 이 길 속에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명한 증거 하나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 누리는 가장 큰 복이 평안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계속하여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시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가장 큰 증거 중의 하나가 평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평안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함께 하시는지 알고 싶은 분들은 지금 여러분 마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안하십니까?” “두려움과 근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이 놀라운 평안은 어떻게 임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성령의 역사로 임하는데,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이는 두려움’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때때로 극한 두려움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인간적인 외로움,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반응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즉각 성령님에게 “성령님, 제게 말씀을 주십시오.”하고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때 꼭 합당한 말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것이 두려워할 일이 아니구나! 이것이 오히려 기뻐할 일이구나.’ 하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 때 만난 여집사님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고1 된 딸의 방에 갔다가 딸이 인터넷 음란사이트를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딸이 완전히 타락한 줄로 여겼습니다. 그 날 얼마나 딸을 닥달을 하고 야단을 쳤는지 딸이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통곡하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딸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이 있을 당시 우리 부부 사이에 사업 문제, 형제들 문제 등으로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 마음에 은혜도 떠났고 기도도 못했고 사랑도 식어있었습니다. 그 때 딸을 품어주고 바로잡아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너까지 왜 이러니! 하며 딸을 정죄하고 절망하게 하고 몰아세우기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두려움과 근심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도 능히 일어날 수 있는 말씀을 다 주셨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오면 두려움에서 우리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먼저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9절)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가는 것이 오히려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그러므로 상황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을수록 더욱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30절)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세상 임금이 오리라” 잠시 마귀가 승리한 것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달리실 때 ‘만 왕의 왕’이 악한 자들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고 옷을 벗기우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찌 이리 무능하십니까? 마귀가 춤 추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이것은 말씀을 모르기에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지 마귀에게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마귀가 능력이 커서 된 일이 아닙니다. 마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순종하셨기 때문에 온 인류를 위한 대속 제물로 당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말씀을 이미 제자들에게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알아야 십자가를 보고 시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어떤 순간이 와도 어떤 문제가 닥쳐오든지 마음에 두려움과 근심이 있을 때 즉각 이것이 속이는 것이 아닌가 물으셔야 합니다. “성령님, 이 때 제가 어떻게 판단해야 되며 제가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외.”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붙잡으면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속이는 두려움은 아주 교묘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게 우리 속에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저는 지난 교역자 기도 모임에서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에게 두 가지를 회개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정확하게 말씀대로 부교역자들을 대하지 못했던 두 가지를 회개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함으로 제가 더 이상 두려움에 속지 않기를 원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제 힘으로 부교역자들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주님께서 부교역자들을 친히 가르치고 이끄신다는 것을 제가 온전히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제 안에 속이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안하면 안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주님 대신 자꾸 제가 말로 가르치려 애썼던 것입니다. 부교역자들이 담임 목사님에게 야단 맞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제는 부교역자들을 주님께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회개한 것은 부교역자를 능력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능력이 있다 없다 하고 교역자들을 평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닌데 저는 자꾸 능력이 있고 없고를 따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역자들에게 저의 존재는 부담스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역시 제 안에 깊이 자리잡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목회를 사람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워지면 어떻게 하나. 부흥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인데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줄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제게 다시 한번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인가를 찾으셨습니다.
(고후 4:10-12)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목회, 여러분의 삶, 가정. 그런데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처럼 속는 것은 직접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두려움때문입니다.
이제는 교역자들에게 사역을 잘하시오. 설교를 잘하시오.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보여달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그 동안 저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은혜의 역사는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끼치려고 하니 더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죽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약한 것이 더 좋습니다.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속이는 두려움을 조심해야 하지만,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평안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 지금 마음이 편안해요. 두려운 것도 근심도 없어요.”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마음이 평안하다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오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평안하다고 느낍니다. 지갑에 돈이 두둑하신 분들은 평안하시지요? 통장에 돈이 두둑하신 분들은 아마 편안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말씀 앞에서 점검받아야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 앞에서 평안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풍년이 들어 많은 곡식을 창고에 저장한 농부가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며 흡족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때 그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임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부자의 평안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평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불안해지고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세상 평안에 속으면 안됩니다. 예수님 말씀 앞에 서보아야 됩니다.
왕은 군사가 많고 무기가 많으면 평안하다고 느낍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서 기도로 고침받고 나라가 강성해지니 마음이 오랜만에 평안했습니다. 마침 신흥 제국 바벨론에서 사신이 왔을 때 히스기야 왕은 무기고를 다 보여주며 자랑했습니다. 그는 어느덧 하나님보다 자기 무기고를 더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이사야 39장 6-7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소서.” 하며 왕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평안한 줄 알았더니 하나님 말씀 앞에 서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요한계시록 3장17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기를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평안할지라도 이것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거짓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속으면 두려운 날이 도적같이 임합니다.
지난 주간 인턴 전도사 수련회에서 말씀 전하기 위하여 기도할 때 성령께서 책망을 주셨습니다. 첫 시간에는 죄로 인하여 속으로 무너진 전도사님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역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주의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간에는 다른 전도사님들 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사역도 잘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전도사님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위하여 목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거짓된 마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실력이 있고 모든 것에 부족함 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지요. 다른 사람보다 내 사역에 열매가 많다고 생각할 때 큰 자부심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거짓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출간된 기도의 사도 존하이드의 전기 [기도로 매일 기적을 체험한 사람]을 추천합니다. 이 책 속에 존 하이드가 거짓 평안에서 돌이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인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인도로 가는 배를 타고 갈 때였습니다. 그 순간까지 그는 마음이 뿌듯하였습니다. 스스로가 대견하였습니다. 아버지도 목사였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선교사로 헌신했고. 그것도 아주 훌륭한 선교사, 위대한 선배 선교사틀 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인도어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위대한 선교사가 되는데 장애가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이든 용인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의 야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밑바닥에는 흉물스려운 자아 추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존하이드 선교사가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편지 한 통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배에 오르자 아버지 친구 목사님이 보내신 선실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즉시 뜯어서 읽었는데, 편지 내용은 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짤막한 몇 마디 말때문에 그의 자존심은 잿더미가 되었고 맹렬한 분노가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편지에는 단지 사랑하는 존, 네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까지 너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을 거야!"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 편지를 구깃구깃 구겨 선실 바닥에 던져버리고, 분을 주체 할 수 없어서 갑판 위로 올라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까지! 이 말은 그가 지금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갑판을 거닐면서 혼잣말로 말했습니다. 나는 선교사로 인도에 가고 있어. 그런 저런 선교사가 아니라 최고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 가고 있는 중이라고!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니겠어? 그런데도 내가 성령 충만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니. 정말 어처구니없고 주제넘은 말이잖아! 그렇게 한동안 갑판 위를 하염없이 오락가락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맹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친구 분을 정말로 사랑했고 또 그 분이 평생 신령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다시 선실로 내려가, 구깃구깃 구겨 던져버렸던 편지를 다시 집어 편지지를 곧게 펴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지만, 아버님 친구 목사님이 옳다는 것과 자신이 선교사 사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절망의 구렁텅이에 내려가 자신을 성령으로 채워달라고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모든 것 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가 품었던 것이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배가 항구에 당도하기 전에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말리라 결심하고 더욱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제가 인도에서 보게 될 언어 시험에서 낙방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봉사하는 무명의 선교사가 되어도 좋으니 다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 영적 몸부림은 항해가 끝날 무렵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순간, 존하이드 선교사의 마음의 평안은 깨어졌지만, 위대한 선교사가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성령의 근심이 있습니다. 이 근심은 말씀 앞에 설 때 오는 근심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는 근심입니다. 성령의 근심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피하면 큰 일입니다. 정직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성령의 근심이 우리를 살리는 근심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속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짓 평안에 속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내 속에 두려움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 평안에 속으면 안됩니다. 성령님께서 동일하게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마음이 매우 불편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전심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속이는 두려움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진짜 평안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두려움에 속지 않고 거짓 평안에 속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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