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아픈 후회를 하시렵니까?/왕하 1:13-18
13. 왕이 세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낸지라 세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14.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 오십인들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15.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저를 두려워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저와 함께 내려와서 왕에게 이르러
16.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하니 이스라엘에 그 말을 물을만한 하나님이 없음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17. 왕이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저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 이년이었더라
18. 아하시야의 남은 사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
눅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지옥에 간 부자에 말씀하셨는데, 부자가 겪는 두가지 고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한가지는 너무 뜨거워서 "물 한방울이라도 혀를 적실 수 있었으면!" 하는 말할 수 없는 육신적 고통입니다.
또 한가지는 마음의 고통인데, 뼈아픈 후회입니다. "왜 나는 육신으로 살 때,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는가?" 영원히 후회가 됩니다.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부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더욱 괴롭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똑같은 운명이 될 형제들을 위하여 간청합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8)
지금도 부자는 지옥의 고통과 뼈아픈 후회로 인하여 몸부림치며 있을 것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후회하는 곳이기에, 두려운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옥에서 뼈아픈 후회를 하고 있을 한 사람, 아합 왕의 아들 아하시아의 이야기입니다.
왕하 1:1-2을 보면 그에게 세가지 어려움이 한꺼번에 닥칩니다. 의지하였던 아버지, 아합은 전쟁터에서 죽고, 속국 모압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은 낙상을 하여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사실은 낙심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은 이 때, 아하시아의 뼈아픈 후회를 남기게 될 두가지 잘못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잘못은 곤경 중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겹쳐진 어려움은 오히려 아하시야 왕이 아버지 아합의 전철을 밟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 올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다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하나님 보다 우상을 택했습니다.
왕하 1:2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3-4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지금 아하시야는 통곡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왜 하나님께 먼저 묻지 않았을까?"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 한 회사에서 신입사원 면접을 하는데, 기독교 신자들에게 물었답니다. "우리 회사에 나오면 주일을 지키기 어려운데, 그래도 좋겠는가?" 그러면 10명 중 9명은 "괜찮습니다. 저녁에배에 가면 됩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됩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 성도가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생길 때, 세상이나 사람이나, 돈을 의지하지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십니까? 이 점에서 뼈아픈 후회가 남지 않겠습니까?
두번째는 깨닫게 하시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기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을 들은 아하시야 왕은 오십부장을 보내어서 엘리야를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 오십부장이 엘리야에게로 와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御命이니 엘리야여 내려오시오!" 라는 뜻입니다.
엘리야를 데리고 오는 데 군인 50명이 왜 필요합니까?
강제로라도 끌고 가겠다는 말입니다.
그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명 모두 불에 타 죽었습니다. 두 번째 오십부장은 한술더 떠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그도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것이 아하시야의 잘못입니다. 지금 명령을 할 때가 아니라, 눈물로 간청을 할 때입니다.
세번째 오십부장은 태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13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그는 무릎 꿇었습니다. 그리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간구했습니다. 오십부장은 자신의 생명이 촌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기도에 자기의 부하 오십명의 생명과 그 가족의 운명이 같이 달려 있음을 알고,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왔습니다.
"엘리아야 저 오십부장을 따라서 산에서 내려가라" 아하시야 왕이 이렇게 기도했다면, 살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 아하시야 왕보다 120년 정도 나중에 유다 왕이었던 히스기야 왕도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죽음에 대한 통고를 받았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는 바로 하나님께 나아 눈물로 매달리며 기도했습니다
.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왕하 20:2-:3] 그
결과 15년 생명 연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적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받을 약속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아하시야 처럼 뼈아픈 후회를 남기시겠습니까? 공부 못한 것도 한이 되고, 효도 못한 것도 한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심각한 후회와 한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던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몰아가실 때에, 왜 좀 더 간절히, 생명걸고 기도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 성도들을 무너뜨리는 두 종류의 마귀가 있는데 하나는 기도를 적게 하도록 만드는 마귀요, 다른 하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귀입니다. 이 중에 기도를 적게 하도록 하는 마귀가 더욱 무섭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기도한다!" 고 여기게 하여, 실제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를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 갈 은혜를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떳떳하게 기도할 자녀된 특권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지 못하고,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누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였다면, 이 보다 더 큰 후회와 고통이 있겠습니까?
* 우리 교회에는 남편이 아내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는 가정이 여럿 있습니다. 참 귀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에 분명히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많이 기도한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이들을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의 반도 안됩니다. 남자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가정과 기업, 교회와 나라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남자들이 뼈아픈 후회를 남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 지난 주간, 기독교방송 본부장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방송 운영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방송국 사옥도 건축 마무리 못하고 월급도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태로 인하여 방송국 직원, PD, 기자들이 아침부터, 시간시간 비상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방송에 체험이 오면 하나님은 교회들과 성도들을 움직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시련이 커서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매달리는 결사적인 기도를 하지 못한 것이 뼈아픈 후회요, 절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도에 나라와 교회와 우리 식구들의 운명까지도 달려 있다!"는 벼랑 끝에선 마음으로 간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혼자 힘으로 안됩니까? 그래서 선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연합하십시오. 속회에 참석하십시오. 불신자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새벽기도회에 철야기도회에 참석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영적인 흐름에 던져 넣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살과 피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우리는 살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는다는 이러한 절박성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도들을 보면 들어주시면 좋고 안 들어주시면 말고 이런 식이 아닙니다.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의 생명이 걸려 있는 절박성을 인식하고 한 기도들이 대부분입니다.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러 엘리사 선지자의 집에까지 왔을 때, 엘리사는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나아만이 불 같이 화가 났습니다. 당연히 엘리사가 마중 나와서 자기에게 절하고 자기를 영접할 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겸손하여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였을 때, 그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빈센트 필 목사가 어느 의사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번은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이 10%밖에 없는 한 소녀를 수술하게 되었을 때, 수술대 위에 있는 소녀에게 다가 갔읍니다. 그때 그 소녀는 '선생님 부탁이 있읍니다. 저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합니다. 지금 기도해도 괜찮겠지요?'라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마음은 너무나도 괴로왔읍니다. 나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왔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소녀에게 말했읍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목자 예수님,나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오늘밤 당신의 이 어린 양을 지켜주세요. 그리고 예수님, 의사선생님에게도 축복해 주세요. 그분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읍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그때 간호사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돌아서서 난생 처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읍니다. '오,하나님,저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소녀의 생명을 구하게 하소서!'결국 그 소녀는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소녀의 기도야말로 나를 완전히 변화시켰읍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지 못했기에 겪는 고통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지모릅니다. 지난 금요일 인천상공에서 터진 공군 미사일 오발사고는 한 순간에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음을 생각할 때, 정말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사는 인생은 반드시 뼈아픈 후회를 남깁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대신에 섬기는 우상이 많습니다. 어떤 성도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사고는 "가장 쉽고, 덜 고통스런 길을 선택하는거야!" 하는 기준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쉽게만 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는 은연 중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대로 가야지" 하는 메시지를 따라 갑니다. 어떤 성도는 "이익이 많이 생기는 것이 가장 좋아" 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당신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아야 합니다. 죄 이전에 뼈아픈 후회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시아처럼 당장 죽음을 내리시지 않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죽음과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몰아가신 것입니다.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왜 이러한 고난의 구덩이에 집어넣으셨는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제는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코너로 몰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예나 지금이나 많이 쓰고 계십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우리가 꼭 무엇이 필요해서 달라고 요청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요, 내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면 보통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서 기도를 하면서 주님을 부릅니다. 결국 그 어려움은 나중에 다 해소되고 남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고, 신앙심이 더 두터워졌다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더욱 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방법을 아주 많이 쓰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건강하고 모든 일들이 잘 되어 가고 집안에 어려움이 전혀 없으면 그 사람에게 전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 사람은 저절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오는 때는 바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경우입니다. 인생의 지독한 어려움이 닥치자 결국은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 나와서 도와 달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잘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 신앙이 시들해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저절로 그냥 다시 신앙이 회복되고 예수 잘 믿게 되는 법은 드뭅니다.
대부분 어떤 계기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됩니다. 바로 그 계기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유기성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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