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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돈보다 더 좋아졌습니까? (행 4:32-37)

by 【고동엽】 2022. 1. 21.

예수님이 돈보다 더 좋아졌습니까? (행 4:32-37)

 

 


한 성도의 기도 요청을 받았습니다. 최근에 음란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보았는데, 그 영상들이 머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밥을 먹어도 그 영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이 악한 영에게 내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계속해서 영적으로 시달리는 것이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그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일들이 우리 삶 속에 많습니다. 더럽고 음란한 매체들은 우리 주변에 너무너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한 영에게 마음을 공격 당하고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음란하고 자극적이고 끔찍한 것들을 통하여 교묘하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주여, 어찌하면 좋습니까? 탄식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번 주간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 어떤 것 보다 충격적인 것이 복음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그림이나 모습을 심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악한 영이 우리 마음에 충격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충격을 우리 가운데 주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계속 더럽고 음란하고 충격적인 복음은 마음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든 것들이 다 떠나가고 정결함을 받는 역사가 십자가 복음의 능력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 복음의 역사는 정말 놀랍습니다.
오순절 날에는 3천 명, 그 다음 날에는 오천 명이 회심하였습니다. 상상만 해도 얼마나 놀랍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중심에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놀라운 감동을 여러분이 받으실 것입니다. 초대 교회 모습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서 또 집에서 모여서 예배하고 즐겁게 교제한 일도 놀라운 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부럽습니까?
사람들이 예수 이름으로 말하면 죽인다고 하는데도 오히려 더 크게 담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의 복음은 계속 전해지고 예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나기를 기도했더니 땅이 진동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그 기도하는 모습, 그서이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이것이 전부 복음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 속에 정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구나! 싶은 진짜 엄청난 충격이 32절 말씀에 나옵니다. 초대교회 모습에서 우리가 정말 깜짝 놀라는 것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자기 재산을 다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했습니까? 돈이 생명처럼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내 것 네 것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리고 한 예가 언급되었는데, 바나바라는 사람이 자기 소유의 밭이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 가난한 교인들의 먹을 것을 공급하려고 교회에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니!
여러분, 복음의 능력이 아니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적도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웨슬리는 지갑이 거듭나야 진짜 거듭난 것이라 했는데, 초대교회가 진정 성령의 충만한 교회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이 은혜 받았다는 고백, 하나 되었다는 것,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진정한 것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고는 이런 상황이 벌어진 적도 없거니와 벌어질 리도 없습니다.
(34절)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끼리 모였는데 그 중에 누구도 가난한 사람이 없고 굶는 사람이 없었다. 진짜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역사상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도 그 하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빈부 격차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지식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전 지구의 절반 이상이 공산주의화 되었습니다. 결과는 완전한 사기극이 되어버렸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다 속았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이다! 하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진짜 해결의 길이 교회 안에 있는데도 당시 교회는 스스로가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실패했습니다.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혁명, 강제적으로, 비밀 경찰을 동원하고 비판자들을 수도 없이 제거하면서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폭력으로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다가 전쟁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던 그 시도가 얼마나 허구였는지 공산주의 나라로 들어가 살고 싶은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나오겠다는 사람만 있지. 공산주의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오늘 교우 여러분 중에 오늘 잘못 은혜를 받으면 재산 다 바쳐야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걱정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 겁낼 것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교인들이 재산을 내어 놓은 것이 완전히 자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비밀 경찰이 없었습니다. 강제적으로 뺏는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지만 강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정말로 놀랍지요? 재산이 있는 자들은 자기 재산에 대해서 조금도 욕심이 없어졌습니다.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다면 너무 기뻤습니다. 초대교회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초대교회 때 재산을 가진 자만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35절)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부자들만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들만 은혜받고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던 교인들도 놀라왔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재물에 한이 맺혔겠습니까? 만일 부자가 자기 재산을 내 놓았다고 해도 너도 나도 서로 가지려고 달려들었다면 지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결단을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자신이 필요한 것만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 사무국에 돈을 갖다 놓고 어려운 분들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는 만원만 있으면 돼. 그래서 그 돈다발 중에 만원만 가져가고, 나는 3만2천원만 있으면 돼. 그러고 8천원은 돌려주고.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 그 일이 가능할까요? 만약에 부자가 재산을 팔아서 서도들 앞에 놓았는데 너도 나도 더 가져가겠다고 달려들었다면 재산을 헌금한 부자 마음은 어떠했겠어요? 지옥과 같지 않겠어요?

미국 어느 공원에서 한국 사람들이 떨어진 호두를 부대 자루에 주워 담으니 미국인들이 한참을 보다가 다가와서 "그러면 다람쥐들은 무엇을 먹고 삽니까?"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서부 포틀랜드의 바닷가에는 조개는 15개 이상은 잡을 수 없게 규정이 되어 있더랍니다. 한국 사람들이 씨를 말릴 정도로 조개를 잡아 가는 걸 보다 못해 만든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재산을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같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욕심은 다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교회를 핍박할 당시 지하 교회였던 예수 가정 교회 공동체가 운영하던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공산당 관리가 교회를 폐쇄시키려고 왔다가 과수원을 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과일들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키는 것도 아닌데. 공산당 인민 농장에는 과일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 몰래 다 따가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들의 전도에 큰 권능이 따라올만 했습니다. 복음이 삶으로 뒷받침되엇으니 말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기적같은 삶! 사람이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진짜 복음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진짜 성령충만한 것이 맞구나!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재산을 내놓고 서로 필요에 따라 가져가는 것을 보니까.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 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담대했겠어요? 말을 잘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있었겠습니까?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무리가 큰 은혜 받을만 했습니다. 설교를 정말 잘해서 은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삶이 뒷받침 되는 메시지니까 은혜가 된 것입니다.
현재 전도가 안된다, 힘들다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한 것 보다 성도들의 삶 속에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삶이 뒷받침이 안되고 복음만 전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초대교회 복음의 역사는 그렇게 증거된 것입니다.

인류는 기나긴 역사 내내 평화와 일치와 친교와 사랑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도 실패했고, 지금도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초대교회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왜 세상에는 온 인류가 갈망했던 진정한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그런 공동체가 성경 속에 이루어진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가능했고 왜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안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것은 유일하게 성경 뿐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평화를 우리가 원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악하다 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곤경은 인간이 죄의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평화가 회의만 소집하면 된다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만나서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 타협점을 찾게 되고 통일되는 줄 압니다. [타임머신]의 작가 웰즈(H. G. Wells)는 교육으로 전쟁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미개인들이나 싸우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교육받은 인간에게는 충분한 분별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상황도 이성을 사용하면 곧 바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평화주의자들은 평화를 호소하고 평화를 가르치면 평화가 오는 줄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기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나라가 무기를 부수어 버리기만 하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기가 없는 가정에도 직장에도 학교에도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다툼과 불화, 이기심과 탐심의 원인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야고보는 자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전쟁은 우리 마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평화와 사랑은 그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아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와 사랑은 항상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행복 그 자체를 위해서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행복을 찾는 일에 착수해 보십시오. 가정이나 직장 사회 국가 간에 세미나를 하고 포럼을 하고 협의체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행복과 평화 사랑은 다른 것의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 무언가 다른 것 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평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애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맺어졌습니다. 그러니 평화도 사랑의 공동체도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진정한 평화와 사랑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순히 우리 죄를 사하시고 허물을 씻어주신 것만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과 새 본성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죄함만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독생자가 굳이 십자가에서 죽을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다 용서한다! 그러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는 안되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역사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몸으로 오셔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새 생명과 새 본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교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훈이라면 수세기 동안 축적된 것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빛을 사랑하고 어두움을 미워하는 새 마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평화와 사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십자가 때문에 초대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본성과 새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사한다 하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 된 본성을 처리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를 구주요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령을 받게 되니 초대교회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전에는 서로 다투며 시기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각기 다르고, 천성 또한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소유 개념이 없어질 정도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들 사이에는 진정한 평화와 완전한 교제, 사랑이 일어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음을 믿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으며, 새 본성과 새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보기에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이 되시면 우리가 비로서 돈에 대해서 재물에 대해서 제 정신이 돌아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을 제 정신이 돌아오게 됩니다. 제 정신이 아닐 때는 돈을 끊임없이 가지려고 합니다. 소유가 복인 줄로 생각합니다. 타락한 다음에는 사람이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돈을 소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얼마나 그것이 고통인 줄 아십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왜 고통스러운지를 모릅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구주로 영접하고 나면 돈 보다 귀한 것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더 이상 살지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비참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복인 것을 아십니까? 왜 우리가 그렇게 괴롭게 살고 왜 그렇게 답답하고 왜 그렇게 마음에 상처가 많지요?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이 더 이상 내가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삽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입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사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내어주셨고 그렇게 행복해 하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육신을 내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고 그렇게 행복해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대로 됩니다. 소유할 때는 지옥과 같았는데, 베풀어주면서 그렇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사람이 변합니다.
성도 여러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돈보다 더 좋아졌습니까?
많은 분들이 그렇습니다. 신기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증거입니다.


어떤 남자가 부인의 전도와 기도로 주일에 교회에 왔습니다.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부형이 묻는 말이목사님, 예수 믿는데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라고 했습니다. 친구와 친척들이 예수 믿으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자꾸 천주교로 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비용이 얼마나 들면 예수 믿으시겠습니까?그러자 그가 “담배값 정도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분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담배값 1년 치를 계산해서 주일 헌금, 감사 헌금을 떼어서 정확하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라니까 죽어도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물어 봤더니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들었느냐고 했더니 세례 받으면 십일조를 바쳐야 된다고 하니까 세례를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선생님, 세례 받으셔야죠.라고 하니까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묻는 말이목사님, 수확의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까? 아니면 비용을 다 빼고 순 이익의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까?그래서 제가수확의 십일조를 바쳐도 십일조요, 비용을 다 빼고 나머지의 십일조를 바쳐도 십일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비용 빼면 얼마 안되는데요.이 분이 그 해 가을에 쌀 두 가마니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에 쌀을 열 가마니 바쳤습니다. 알고 보니까 수확의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를 비싸게 믿기로 했습니다.하는 것입니다.어떻게 비싼 예수를 믿기로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제가 인생을 살면서 너무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믿으니까 제 존재가 천해지는 것 같아서 고귀한 예수님을 비싸게 믿기로 했습니다.그 얼굴이 훤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소유하는 것보다 나누어 주는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탐심의 유혹을 벗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세 때는 수도원에 들어가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수도자들은 영적으로 처참한 과오를 범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무소유로 사니 탐심이 발붙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는 돈 주고 살 것도 없지만 남에게 베풀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탐심의 반대는 무소유가 아닙니다.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누어주는 삶이 탐심을 이기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아무 것도 없어서 욕심도 없지만 나누어줄 것도 없는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기업의 복도 주시고 어떤 분에게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가 누렸던 복입니다.
바나바가 땅을 팔아서 바쳤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하라고 강요했습니까? 안하면 안되는 분위기로 몰아갔습니까? 그런데 왜 땅을 팔아서 바쳤을까요? 땅을 소유하고 있을 때보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하고 어려운 교우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훨씬 더 기쁘니까 그런 것입니다. 왜 기쁜 것입니까? 그것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제 진짜 제 정신이 돌아온 것입니다.
진정 복된 삶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가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나바가 누린 복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가 받는 복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초대교회에 나타난 영광입니다.


어느 원로목사님이 쓴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이 많이 들어 병든 몸 되어 보았습니까? 자리 보전하고 누워 있는 처량한 몽이 되어 보았습니까? 어느 누가 ‘보양식이요. 영양식이요.’ 하면서 받들어 모실 이가 있었습니까? ‘녹두죽이요, 깨죽이요, 전복죽입니다. 잡수셔야 합니다.’ 하며 정성을 다해 끓여 올 며느리, 딸이 있었습니까? 더 더욱이 대소변 받아내고 냄새나는 속옷 빨아서 뽀송뽀송한 속옷으로 갈아입히고 이부자리 햇볕에 말려주고 빨아서 갈아주고 눕혀주고 할 이가 누구였습니까? 꼼꼼히 살펴보면서 늙어도 늙어야 합니다. 시대가 변해도 한참 변했습니다. 정신 차리고 노후대책 안하고 있다가는 큰 일 당합니다. 후회할 때는 이미 늦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나 며느리는 그 일을 못해도 멋들어지게 당신의 비위맞춰 줄 놈이 있습니다. 대소변 갈아주는 것으로부터 죽 끓여 대는 일, 빨래해 주고 시간 따라 약 먹여 주는 일, 잠자지 아니하고 옆에 대기하고 지켜보는 이가 있습니다. 자식도 싫어하는데 도대체 어느 누가 그렇게 돌보아준답니까? 있습니다. 한 놈 밖에 없습니다. 김서방입니다. 돈이라는 놈 말입니다. 김 서방은 별 것 다~해줍니다. 종놈 부리듯 해도 불평이 없습니다. 마른 일, 궂은 일, 더럽고 냄새나는 일l 그놈은 다~해줍니다. 하고도 남습니다. 불평이 없습니다. 마음 편히 부릴 수가 있기에 좋습니다l
김서방 움켜쥐고 놓지를 말아야 합니다. 함부로 빌려 주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 놈은 일단 나가면 다시 돌아올 줄 모르는 놈입니다. 기분 좋다고 내주면 안됩니다. 아양 떤다고 풀어주지도 말아야 합니다. 알랑알랑 거려도 김서방- 만큼은 놓치면 안되는 놈입니다. 어디든 찾지 못하는 곳에 꽁꽁 숨겨 놓으십시오. 김서방 있는 척도 마십시오. 누가 김서방의 안부를 묻걸랑 모른다 하십시오. 놓으면 끝이고 풀어주면 끝입니다.
그러나 그 김서방도 풀어주고 놓아줄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종착점이 머~지 않았구나 느껴질 때, 좋은 곳 찾아가라고 풀어주어야 합니다. 유익한 곳, 불쌍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돈 없어서 공부 못하는 젊은이들이 있는 곳에 과부와 고아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게 해주십시오.
세상에 있을 때는 김서방처럼 좋은 것이 없어 보이지만 김서방 붙잡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화입니다. 그러므로 ‘종착역이 가까워졌구나. 내려야 할 시간이 가까이 왔구나’ 하는 시점에서 그 놈을 하차시켜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대물림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큰 실수입니다. 좋은 자식을 못된 놈 만들고 추한 놈 만들고, 게으르고 교만한 자식들 만드는 실수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요, 범죄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언제가 내 인생의 종착역인지 알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종착역까지 기다리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이 돈 보다 더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온 여러분은 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습니까? 받기 위해서 있습니까? 직장에 출근해서 당신은 당신을 쳐다봐줄 사람들을 찾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보아줄 사람들을 찾습니까? 퇴근할 때 당신 가족들이 당신을 시중들어주기를 기대하십니까? 아니면 주님, 저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의 목표가 받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거의 매번 실망할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자신에게 몰두해 있어서 남에게 주목할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목표가 주는 것이라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즐거움을 얻는다면 절대로 만족이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베풀 것이 늘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비논리적인 것 같지만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드리십시오.
여러분 마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눈이 뜨이면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주셨는데, 독생자까지 주셨고 성령님으로 내 마음에 오신 주님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냥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으로 이제부터는 주려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도 누구한테 무엇을 줄까? 가족에게도 직장을 가도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과 관심과 재물을 나누어줄까? 그렇게 한번 살아보십시오. 교회에 올 때마다 은혜요, 집에 갈 때 마다 기쁠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복을 감당할 수 없다고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데, 성찬식은 우리를 살리려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 복된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우리가 살았고 예수님은 기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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