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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 (요 19:17-18/28-30)

by 【고동엽】 2022. 1. 21.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 (요 19:17-18/28-30)

 

 

 

요한복음 19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서 죽으시는 십자가 장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잘 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많이 듣고 읽었던 성경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새롭게 느낄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오늘 설교가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보다 더 한 감동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고,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인류 사상 최대의 개막식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다시 이런 이벤트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국과 같은 잠재력을 가진 또 어떤 나라가 그만한 열정으로 그런 올림픽 개막식을 또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이런 평가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십자가 설교가 그보다 더한 감동을 줄 수 있다니 아마 잘 믿어지지 않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에 대한 설교가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었고 더 놀라운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인하여 얼마나 흥분하였습니까? 우리 민족 모두의 자랑이었고 자부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그 감격은 어디 갔습니까? 그 때 그 기억이 아주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그 때의 감격을 지금도 되살리고 있는 분은 거의 없으실 것입니다. 베이징 올림픽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림픽 개막식 때 하나님과 천사들은 어땠을까요? 올림픽은 우상에게 바쳐지는 제사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 자체가 복될 일이 아닙니다. 육체를 숭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중국이 자기들의 힘을 온 세계에 과시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말 중국은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하였으니, 오히려 올림픽 이후의 중국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감동, 십자가의 영광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도 온 천사들도 숨죽이고 지켜 본 사건입니다. 온 인류에게 구원의 문이 열린 사건입니다. 2천년이 지나도 조금도 쇠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재방송도 감격스러울 수 있다면 십자가야말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감동과 능력은 2천년 동안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종종 임종을 지켜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임종을 앞에 두고는 고뇌와 두려움에 사로 잡힙니다. 그 순간 무엇이 그 마음을 위로하고 담대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세요.” 오직 이 한마디입니다. 이 말씀에 고통스런 얼굴이 비로소 환하게 밝아져 옴을 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보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같은 십자가를 보아도 사람마다 다른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를 십자가로 더 가까이 나가게 하십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십자가에 더 가까이 가신다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보시게 됩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오늘, 지금까지 바라보던 십자가에서 더 놀라운 십자가의 영광을 보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께서 눈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겨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 보는 수준이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구경꾼일 뿐입니다. 구경꾼에게는 십자가는 결코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막 예수님을 믿으신 분은 오늘 요한복음 19장을 볼 때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외에는 더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나 다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것만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비밀로 더 깊이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구나.” 하는 애통함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 십자가를 통하여 주는 여러분의 죄로 인한 애통함을 반드시 느끼게 해주십니다. 절대로 십자가를 구경꾼처럼만 보시고 지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더 머물러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죄를 바라보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 기록만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는 유대인들이요 빌라도입니다. 그래서 과거 유럽에서는 무서운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참 어려운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이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시에 성령님의 역사가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는 우리 자신이지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의 감독 멜깁슨에게 유대인 단체가 극심하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들은 멜 깁슨에게 물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입니까? 그 때 멜깁슨은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예수를 죽인 사람은 나 자신이고, 온 인류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애통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죄 사함을 주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애통함이 먼저 있어야 함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이 애통하십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전제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누리려면 반드시 죄에 대한 애통함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역사는 회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에서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셨습니다.


깐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밀양>을 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빈정거림이 나옵니다. 전도연씨가 열연한 주인공 신애 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살해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슬픔과 번민에 휩싸인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어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대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신애가 유괴범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선을 용서하러 왔다. 고 하자 유괴범은 너무나 평안한 얼굴을 한 채 나는 용서받았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충격을 받고 교도소를 나와 쓰러지고 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였느냐? 는 것입니다. 그 후 영화는 내내 신애의 방황을 묘사합니다.
이 영화는 죄 사함받았다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의 믿음을 이렇게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다 용서 받았다. 면서 자기 죄에 대한 애통함도 없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는 고백 한 마디 없는 살인자, 그가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자기 죄를 눈물로 회개해본 적이 없이, 죄를 반복해 짓고 살면서 단순히 “예수가 내 죄를 위해 죽었으니, 나는 용서 받았다. 는 교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뛰게 될 줄 아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곡해한 것입니다. 결코 그런 십자가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어떤 죄에서도 다 건저내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있는 자에게 십자가 복음의 능력은 그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가 없는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세기 전 영국에서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부스가 앞으로의 기독교는 어떤 기독교가 되겠습니까?" 하고 기자들이 물었을 때 앞으로의 기독교는 거듭남없이 구원을 선포하는 기독교, 회개 없이 죄의 용서함을 말하는 기독교가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십자가에 더 가까이 나아갔다면 여러분은 십자가를 애통함 없이 바라볼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3장 7-1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를 받으러 나왔을 때, 세례 요한이 그들을 책망하며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회개의 열매가 없고 내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이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을 것이다. 내 모든 죄를 다 사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믿는 복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함을 거친 후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까? 여러분, 지금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다 여러분의 죄로 인한 진정한 애통함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전도를 받고 말씀 양육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분께예수 믿고서 무엇을 배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분이 잠시 생각하더니눈물을 배웠습니다.했습니다. 더 이상 정확한 답변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다가 갈 때, 성령님께서 죄로 인한 애통함을 부어줍니다.
만약에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아무런 애통함이 없다면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냥 성경 말씀을 읽고 넘어가지 말고 십자가 앞에 더 머물러야 합니다. “성령님, 저를 더 십자가 가까이 인도해주십시오. 제가 십자가 믿음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성령님은 반드시 여러분 안에 여러분의 죄로 인한 애통함을 주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비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직 아닙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님은 십자가에서 예수님만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죽었음을 보여 줍니다.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이미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죽어야 합니까? 우리 생명 안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온갖 불의함과 악함과 음란함과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강퍅한 마음이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교육으로 막아보려고 아무리 인류가 노력해도, 도덕으로, 윤리로, 어떤 종교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생명 속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죽음으로만 이 죄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옛 사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이 비밀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의 고백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리라고는 마귀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생명 속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마귀는 우리 생명 속에 죄를 집어넣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 게 하셨습니다. 단순히 우리가 지은 죄를 씻겨주시는 정도가 아니고 죄짓지 않는 능력있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로 인하여 애통하게 합니다. 하지만 애통함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습관적인 죄에서, 두려움과 염려에서, 미움도 원수 됨도 가난도 슬픔도 질병도 이기는 능력있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보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평안, 기쁨, 사랑, 능력, 풍성함을 얻게 됩니다.그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볼 때 되어지는 삶입니다. 성령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항상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다” 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내가 믿음으로 취할 때 비로서 내게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승리가, 슬픔이 기쁨이 되는 역사가, 질병이 건강함으로 바뀌고, 애통함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207년 봄에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합니다. 말을 타고 시골 길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다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정말 나의 뜻을 알게 된다면 지금 네게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쓴 것이 될 것이고, 혐오하던 모든 것이 달콤하고 더 없는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순간 갑자기 타고 가던 말이 놀라서 움직이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몇 발짝 앞에 심한 나환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문드러진 손에 돈을 쥐어주고 악취가 나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감정에 북받쳐 울었습니다. 자신이 변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했던 것을 경멸하고 자기가 멸시했던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그 날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승리 곧 자신에 대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주님이 그를 이기고 최고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체험을 처음 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이것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누가 십자가의 비밀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 옛 사람도 함께 죽게 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신 일. 그러므로 우리를 죄에서 완벽하게 건져내시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십자가의 비밀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귀도 전혀 알 수 없었던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0절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다가 예수님께서 아무 소리도 않고 계시는 것을 보고 하도 답답하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라
이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허락하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예수님을 구출하고 빌라도와 유대교 지도자들을 멸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처구니 없다.’ 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 뭐야? 하나님께서 쇼를 하신 건가?’ 아닙니다.
이사야 50장 4-7절을 읽어 보십시다. 여기 보면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 아들과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사람들이 너를 때리면 돌아서지도 말고 맞아야 한다. 사람들이 네 수염을 뽑거든 너는 저항하지 말고 네 뺨을 통째로 맡겨야 한다. 사람들이 네 얼굴에 침을 뱉거든 절대 얼굴을 돌리면 안돼. 알겠지?”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얼마나 이 당부를 많이 했는지
(4절)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신대로 합니다.
(5-6절)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아들이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도 그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얼굴이 철판보다 더 두꺼워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7절)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 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아들이 예수님이시고, 이 아버지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수없이 이 이야기가 오고 갔던 것입니다. “이제 네가 매를 맞을 터인데 피하지 마라.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너를 모욕하겠지만 너 절대로 얼굴 돌리지 마라. 다 받아야 되는 거야.”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왜냐하면 우리를 죄에서 건지고 죄에서 승리하게 할 수 있는 길은 이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십자가! 어느 것이 더 놀랍습니까? 십자가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중국의 장이머우 감독의 작품이지만, 십자가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마치 화려한 전등이 휘황찬란해 보여도 햇빛이 비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듯이. 여러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한낮에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웃음거리 밖에 안될 것입니다. 모든 보조 장치가 다 드러나 있고, 폭죽이 무슨 밝은 빛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 빛 아래에서만 보아도 우스운 장난같이 여겨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십자가 영광은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가슴에 깊은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고 눈물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몇 번 사랑의 편지를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어디 쯤 가 계십니까?
십자가로 더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애통하는 눈물을 쏟아놓게 합니까? 성령님의 인도를 잘 받고 계십니까? 아직도 애통함도 없는 분도 계십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애통하는 눈물이 끝이 아닙니다. 아직도 성령님의 더 놀라운 인도를 받으십시오.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찬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승리의 노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다.
“주님, 제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십자가의 영광 속에 더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저를 더 인도해 주옵소서. 성령님, 더 주님의 십자가로 나아가게 해 주옵소서. 제가 십자가에서 지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 더 깊은 은혜 속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지금 제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죄의 무거운 짐들이 녹아지게 하시고 승리를 주옵소서. 하나님, 제 삶 속에 진정한 찬양을 주옵소서. 진정한 승리의 노래를 제게 주옵소서.”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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