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행복한 사람 (2)
빌 4:2-7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
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성경에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참 큽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구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사울은 처음 야망이 있고 욕망이 컸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핍박도 그냥 핍박이 아니고 극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사도행전26장1절을 보면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심히 격분하여”라고 표현하였고 사도행전9장2절을 보면 “외국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인을 잡아 올 정도”로 포악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3절을 보면 “교회를 잔멸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모두 바울이 유대교 사회에서 공적을 세워서 인정을 받아 성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바울이 어느 날 주께로부터 부름을 받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바울의 회심하게 되는데 회심도 그냥 회심이 아니고 180도 회심하여 자신이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이라고 바꿉니다. “작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인간적 욕망과 자아를 죽이고 절대 순종자가 되고 겸손 자가 되어 아주 작아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를 만나고 나서 사도가 된 후 그렇게 감사했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 후 서간서를 쓸 때마다 첫머리에서 “주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은...”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한때 예수를 핍박한 것을 회상하고 후회하면서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했고 “나는 모든 사도들 보다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적극적인 전도자로 변신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얻어 배신자로 미움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극렬하게 핍박하였듯이 이번에는 자신이 그렇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런 성격이 참 좋습니다. 시원하고 딱 부러지고 차든지 덥든지 분명해서 좋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분명한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흐리멍덩한 성격이 문제입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인 상태의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한때 경계인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습니다. 세상에 경계인이 어디 있습니까.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점에서 아주 분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그를 불러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부름받자 바울은 또 열심을 다해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데 철저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성도들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애정 어린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충고 속에 정이, 사랑이, 관심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인생을 돌아보면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아간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돌봄의 행복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핍박과 고난과 어려움을 다 극복하였습니다. 어려움이 왔으나 하나도 탈락한 사람이 없이 잘 이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면서 옥중에서 이 글을 쓰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주안에서 굳게 서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돌봄의 삶, 가꾸는 삶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마음을 다 쏟아 가꾸고 돌보고 양육하는 마음이 행복한 마음입니다. 아이를 키우고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화초를 가꾸는 마음도 행복한 마음입니다. 애완동물을 가꾸는 마음도 행복한 마음입니다. 이웃을 영적으로 돌보고 가꾸는 마음도 더 없이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내 이웃이 나의 손을 통해서 반듯하게 세워져 갈 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정성을 다해 양육하고 돌봄의 삶을 통해 행복한 삶을 누린 사람입니다.
오직 한 마음
또 사도바울은 주님을 향한 오직 한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할 때 오직 한마음으로 핍박했듯이 회심한 후에는 또 예수를 위해서 오직 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 했습니다. 고린도전서2장2절에서 “나는 이제부터 예수와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1장8절을 보면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사람은 마음이 오직 한마음일 때 행복한 법입니다. 두 주인 섬기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친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갈라지고 분열된 곳에도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하나 되라”고 하셨습니다(에베소서4장)
가정도 한마음을 이루어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나라도 사회도 마음이 하나 되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웃과도 한마음이 되어야 행복해집니다. 마음들이 갈라지면 불행해지고 갈등이 조성되고 불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내적으로는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 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서로 열심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서로 경쟁하느라 자연스럽게 파가 형성되고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열심이 지나친 것이 좋지 않습니다. 열심히 넘치는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합니다.
빌립보교회는 두 기둥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양대 산맥처럼 강한 여성 지도자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 두 여인은 능력이나 실력이나 지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둥이 둘이니까 동시에 다툼과 분쟁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2)고 충고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에 분쟁이 있으면 좋지 않습니다. 분쟁은 대부분 너무 열심일 때 발생합니다. 조금 적게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교회마다 이 열심히 넘치는 분들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내적으로 열심자들 때문에 갈등이 있었고 외적으로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극성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단들이 정치에도 등장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훈련시킨 지도자 급 임무를 띤 사람들이 교회마다 침투시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교회도 왔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는 잘 훈련된 전도사급을 침투시켜 뿌리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염려하고 두마음으로 갈라진 것을 염두에 두고 “주안에 서라“(1)고 당부하고 “한마음이 되라”(2)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중심으로 오직 한마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몸을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와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노라.”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것이 행복의 방법입니다.
사랑 나눔
또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함께 사역한 동역자들을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 곁에는 언제나 목숨을 내놓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16장을 보면 그 동역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문안하고 기억하고 안부를 전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네게 구하노니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한다”고 했습니다. 멍에를 같이 멘 사람은 여러 지도자들이거나 빌립보교회 감독 중 한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탁하기를 “저 여인들과 글레멘드와 그 외 여러 동역자들을 돌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 길에서 여러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함께 수난당한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을 돌보라고 옥중에서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존대 받을 사람들이고 사랑받을 사람들이며 하나님도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마음은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그것이 가장 성숙한 정신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피를 흘린 사람은 국민들이 존대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서 전사한 사람, 국가 유공자, 피 흘린 사람, 그들은 마땅히 나라가 사랑하고 국민이 사랑하고 존대해야 합니다. 미국은 고기도 군인들에게 첫등급으로 먹이고 일반인은 2등급을 3등급은 수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를 보면 서양에서 귀족의 전통을 가진 집안들이 전쟁터에서 자식이 죽는 것을 명예로 알고 자랑거리로 알고 어디서든지 자랑하고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교계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부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공을 쌓았는가를 따지고 사회에 얼마나 기부했는가를 따진다는 것입니다. 현재 공화당의 메케인 대통령 후보자는 아들이 현재 이라크 전쟁터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점이 부족합니다. 우리와 사고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늦었지만 공로를 인정하고 국가가 추념해 주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런 죽음을 무시하면 누가 나라를 사랑하고 위해서 피를 흘리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자는 마땅히 사랑해 주어야 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정신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고 너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고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일입니다. 에릭 프롬은 사랑은 미성숙한 사랑이 있고 성숙한 사랑이 있다고 했습니다. 미성숙 사랑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너는 나에게 필요하니까” 이것이 미성숙한 사랑입니다. 내가 본위가 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숙사랑은 “너는 내게 필요해,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정신을 주고 뜻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사랑은 주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주지 않고 받으면 진정한 감사를 모릅니다. 진정한 행복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마땅히 존대할 사람은 존대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랑받아야 할 사람은 마땅히 사랑받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하고 기쁘기 때문이고 사랑을 줄 때 더 감사하고 더 기쁘고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동역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참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확실한 신앙고백
신앙고백하면 또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을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이 아주 확실했습니다. 디모데전서1장15절을 보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10절을 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옥중에 앉아서 밖에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기뻐하라”는 말은 현재 능동태 명령어법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 당시는 로마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바울은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1:14, 17, 20-23). 누구를 막론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은 기뻐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때 스스로 기뻐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2장17절에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너희도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전제”라는 말은 “제사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제물이 되어 피를 붓는 심정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제물이 되어 피를 뿌릴 지라도 나는 기뻐하겠다” 는 말입니다. 상상이 되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여기서 “기뻐하라”고 한 말은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고난을 받을 때에도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그처럼 기뻐한 것(행 16:19-25)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때 빌립보 교인들이 옥중에 있는 바울을 상당히 격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보면 기쁨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라는 단언가 무려 14번이나 나옵니다.
신앙생활에는 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반드시 좋은 것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주어져서 얻어서 횡재해서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 것은 어쩌면 저급한 기쁨일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죽음이 다가올 때 기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역설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갈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 천사 같은 얼굴 모습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신앙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지금 옥중에서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십자가를 스스로 찾아서 질 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역설의 기쁨인 것입니다.
긴장감
5절을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관용은 손해나 역경을 당했을 때 흔들림이 없음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핍박 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의연함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오실 주님이 상도 주시고 심판도 하실 것임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삶에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형편, 넉넉함과 평안함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열악함이나 빈곤함도 내일을 위해서는 아주 좋은 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학 강의실에서 열심히 강의를 듣는 사람은 청강생입니다. 그는 스스로 왔기 때문에 강의를 열심히 들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대 주는 학비로 어려움 없이 공부하는 학생은 그렇게 열심히 강의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일반 대학생보다 계절의 변화를 더 빨리 알게 되는 것은 재수생들입니다. 때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수생들은 남들이 잠잘 때 스스로 일어나 공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 양보하고 관용하고 사랑하고 고난 시에 기뻐하고 행복해 했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확실한 신앙고백이었었고 그에게는 종말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빌립보 교우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토록 행복하게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누구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까. 이 요소들이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사역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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