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의 이유 있는 삶
빌립보서 4: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행복해지는 삶의 조건”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입니다. 빌립보는 “작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원래는 “크레니데스”(Krenides)라는 곳이었습니다. B.C. 356년에 마게도니야 왕 빌립 2세가 그곳에 도시를 형성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빌립보라고 지었습니다. 사도바울이 A.D. 50년경에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이 도시에 들러 교회를 개척(행 16:)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교회는 유럽 최초로 세워진 전도기지가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이방여인인 루디아 집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신자는 귀신들렸던 하녀와 빌립보 감옥에 있던 간수와 그 가족들로 형성(행 16:33)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교회였지만 이 빌립보교회는 참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선교비를 지원(2:25,30)했습니다. 바울로 인해서 교회가 핍박받고 성도들이 어려움 당할 때 성도들은 그 고난을 다 극복하고 복음을 끝까지 굳게 지켜 나갔습니다(1:7, 28-30). 교회의 건강성은 어려울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다 빠져나가고 회피하면 그 교회는 건강치 못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는 바울로 인해서 핍박을 받을 때 그 고난을 다 극복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서신을 끝맺으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 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1).
이렇게 보면 사도바울은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선교 말년에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혔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교사가 좋은 제자들을 육성해서 그 제자들이 사회에 나가 할 일을 다 할 때 그것이 큰 보람이자 자랑거리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잘 키워서 사회에 내 보냈을 때 그 자식이 사회에서 큰 역할을 했을 때 그것이 보람이고 자랑거리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잘 육성해서 참 신앙인으로 모든 난관을 잘 극복하고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을 때 그것이 최고의 영광이고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당신들이 나의 면류관이고 자랑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전도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고 핍박도 많았지만 그것들을 생각하면 행복한 마음의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어려움은 다 잊고 행복한 장면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식 행복한 삶의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고난의 기억은 잊어라
이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시대에 살고 풍성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겨우 이거야” 이 마음 때문에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하기보다 적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행복의 노래를 하기보다 비관조의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노래들을 보면 늘 우는 노래, 이별노래, 헤어지는 노래를 많이 합니다. 생각, 마음, 언어, 노래는 내 입으로 내 뱉는 그대로 내게 암시를 주고 그대로 내게로 다가옵니다. 늘 불평하며 살아가면 안 됩니다. 되는 일 없습니다. 행복은 결심한 사람의 것입니다.
영국 국민은 53%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6세 이상 영국 성인 7천명을 조사했더니 7명중 1명은 매달 한 번씩 예배에 출석하였고 10명중 1명은 매주 한 번씩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단한 300만 명중 기회가 되면 다시 출석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생각이 중요합니다.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행복을 향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뒤를 돌아보면 행복한 마음보다 어려움의 기억들이 훨씬 더 많은 사람입니다. 억세게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죽을 고비도 수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것이 여러 번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것도 두 차례나 됩니다.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지난날의 어려움 등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함께 고난을 인내해 주고 어려움 속에서도 반듯하게 승리해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행복했던 순간은 기억 안하고 어려움만 기억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친구, 친척, 형제들에게 서운한 것만 생각하고 은혜 입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삶이 어둡고 힘든 것입니다.
때로 어려움을 경험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것도 소중한 것입니다. 20대는 용기와 패기가 있어 좋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없어서 실수를 많이 합니다. 그때마다 당황하게 되고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처음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내면 몹시 당황하게 됩니다.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교통사고는 나만 질서를 잘 지킨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신호등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차가 받았습니다. 그때는 무조건 뒤차 책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법률상의 이론입니다. 뒤에서 박은 운전자가 소리 지르며 다가옵니다. “왜 갑자기 빽하는 거야, 당신 바보야”, 그러면 정신이 멍해집니다. 상대방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하면 끝장입니다. 그렇다고 운전 안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경험 없다가 한번 사고를 저지르면 당황해서 뺑소니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어려움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이제는 웃으며 넘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경륜과 고난을 깊이 이해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지난날의 그런 아픔들은 기억에도 없고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빌립보 성도들이 그 어려운 고난들을 잘 이겨주고 건강한 신앙을 가진 것만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식의 행복창조입니다.
행복의 방법
사도바울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의 삶에는 행복할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오늘 집도, 가족도, 건강도 평안히 쉴 안식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보다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행복의 방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족하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만족해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느니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행복이나 기쁨이나 감사는 양으로 크기로 높이로 얻으려면 절대 불가능 합니다. 욕망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돈으로 행복하려 하는 것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돈은 가질수록 갈증만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은 벌려고 하면 더 멀리 도망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꾸만 돈을 좇아가고 사기치고 부정식품을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돈이 멀리 달아나는 것입니다.
라스베가스는 노름의 도시입니다. 돈 100불 어치 동전을 바꾸어 넣으면 한두 시간 동안 재미있게 놀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다 잃게 됩니다. 돈을 다 잃고 다시 10불을 꾸어 동전으로 바꾸어 넣으면 또 줄줄이 빠져 나갑니다. 그때 잃은 돈을 따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재미있게 놀았으면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본전 찾겠다고 계속 넣으면 더 털리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그런 이치를 다 알면서 사람들은 본전 생각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100불을 동전으로 바꾸어 열심히 집어넣었습니다. 그때는 돈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두 시간 재미있게 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 잃고 가자하고 남은 돈을 다 넣고 당겼습니다. 그랬더니 돈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밖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다 하고 모든 돈을 몽땅 걸고 또 당겼습니다. 그랬더니 쓰리 세븐에 걸려 동전이 쉴 사이 없이 쏟아집니다. 이런 경험해 보셨습니까. 돈은 따려하고 모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나가버립니다. 돈은 지출하고 나누고 사용하면 다가오고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만 나누라, 사용하라, 베풀라, 활용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지난날 어려운 것들만 생각하고 기억했다면 그 다혈질에 벌써 혈압 터져서 지레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것은 기억에도 없습니다. 오늘 주어진 은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 로라”, “나는 죄인 중 괴수니라” 그러니까 고난을 넘어 오늘 모든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나는 전도자니까 고생을 해도 참고 인내 하지만 저 성도들은 나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 신앙을 포기만 하면 곧 평안해지는데 그런데도 성도들은 다 인내하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흘렀고 감격이 솟았고 행복이 절로 솟아나며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 어디에 지난날의 얼룩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행복은 방법을 만들고 조성하고 스스로 터득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라
뿐만 아니고 사도바울은 어려운 티를 내거나 슬프고 후회스러운 티를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는 후회하고 탄식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속내에 고뇌나 고통조차 없었겠습니까. 있었지만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고뇌의 생활이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그런 마음이 있어도 밖으로 토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때로 외로운 사람이고 고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이 홀로 산에 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삭이고 씻어내고 해소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그런 마음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때로 목회자를 괴롭히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아주 고약한 분들이 교회 안에 몇 명씩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목회할 때 지독하게 그를 괴롭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 말은 사람들이 자꾸만 갈등을 조장하여 욱여쌈을 당하게 되고 그때마다 속마음이 아프고 떨리고 고독하고 괴로웠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 심정을 밖으로 그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보면 늘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 방법이 어렵지만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영적 힘에 의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때 마음에 온기가 차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씨앗이 마음에서 생활에서 현실에서 자라게 됩니다.
강영우 박사는 중학교 때 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장해서 맹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미국 대통령 종교와 사회 자문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맹인이었기에 불편했고 고통이 말할 수 없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들과 비교는 하지 않았고 자신의 환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생각하고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때 자신이 부정적 태도로 살았더라면 후에 자신은 분명히 점쟁이 아니면 안마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오늘 하나님의 지도자로 쓰임 받고 있다고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은 사람을 행복하게도 만들고 불행하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행복한 말만 하면 원망이나 불평이나 탓이 사라집니다. 여성들이 남성들 보다 훨씬 더 행복해 하고 장수하는 것은 조그만 것에 행복해 하고 기뻐하고 말을 많이 하고 수다를 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머리를 색다르게 보이면 그 머리로 인해서 수다가 적어도 한 시간 대화거리로 이어가며 웃다 박수쳤다 난리 법석을 떱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야 머리 깎았구나” “응” 단 두 마디면 끝납니다. 여성들은 참으로 신비한 요술쟁이들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너무 느리게 하고 말을 더듬어서 모두 답답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인가 설교를 빨리 빨리 말씀을 너무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모두 깜짝 놀라 “목사님 왜 설교실력을 숨기셨어요”하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 마세요, 아침에 급히 나오느라고 아내 틀니를 내 것인 줄 알고 끼고 나왔더니 말이 이렇게 빨라졌어요”하고 말씀했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사람처럼 말하고 표현하고 감사하고 즐거움을 표현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따뜻한 감화가 내 마음에 서려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내 마음에 주입하고 매일 공급받고 힘을 입어 살아갔습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라
사도바울은 자신만 행복을 알고 느끼고 누리고 살았던 사람은 아닙니다. 그 기쁨과 행복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는 주안에서 서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헬라어 스테케테 (stekete) 즉 “진실 되게 서라”, “굳게 서라“는 뜻입니다. 칼빈은 이 뜻을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기억하고 든든히 서라“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전도자의 삶은 자신의 삶도 소중하게 굳게 밝게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성도들로 하여금 굳게 서서 잘 이기며 살아가도록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승리하도록 인도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때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만들 때 그도 행복하고 내가 더 행복해 집니다.
남태평양의 키니와타 섬에 자니 링고라는 사람은 인격이 높이 평가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최근 결혼하면서 결혼 지참금을 암소 8마리나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쁜 색시를 얻었을 경우 보통 4마리, 3마리를 주고 아주 못생긴 색시면 1마리를 줍니다. 그런데 자니 링고씨는 예쁘지도 않은데 암소 8마리나 주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한 선교사가 링고 집에 가 보니 그의 아내 사리타가 너무 예뻐졌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소문과 너무 다른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링고씨가 대답합니다. 결혼 전에 여자들이 모여 나는 암소 4마리 받았다, 나는 3마리 받고 시집왔다 하고 자랑하는데 그때 한 마리 받은 여자는 슬며시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내의 자존심을 높여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자신 있게 살게 해 주고 싶어서 8마리를 주고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내 아내가 놀랍게 예뻐졌다고 말했습니다. 그 신부가 자신감에 의해서 예쁜 여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마음에 따라 생각에 따라 자기를 가치 있게 여김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행복하려고 애를 썼지만 더 나아가 많은 성도들을 기쁘게 해 주려는 생각과 마음이 그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배운 삶입니다. 그런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의 행복을 전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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