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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부활 그 이후 /요 21:1-7

by 【고동엽】 2022. 1. 19.

예수의 부활 그 이후

 

요 21: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

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끝을 맺습니다. 요한복음도 20장으로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21장은 부활 그 이후의 후기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서는 예수의 부활로 끝난 것이 아니고 21장을 후기로 첨가하므로 실추된 베드로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조직을 새롭게 추스리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부활소식으로 끝이 아니고 부활 이후에 있을 세상을 향한 선교사역의 과제를 제시하고 그 선교사역을 제자들이 감당할 것임을 시사 함으로 복음서를 끝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서와 다른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부활 후 제자들 고향으로

 

본문은 모두 7명의 제자들이 베드로의 고향인 디베랴 바다로 내려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베랴 바다를 갈릴리 바다, 긴네렛 바다,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구지 디베랴 바다라고 한 것은 갈릴리 지방의 수도가 디베랴였기 때문입니다. 여기 7명의 제자는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를 말하고 두 제자는 빌립과 안드레를 말하고 거기에 베드로와 도마 그리고 나다나엘이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베드로 형제와 야고보 형제가 고기 잡으면서 살던 고향입니다.

고향은 참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실패자는 갈 곳이 못되는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은 성공한 사람이 금의환향해서 가는 곳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살 때 보니까 실패자는 밤에 살짝 왔다가 새벽에 조용히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향은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명절 때 고향 가는 사람들을 보면 렌터카를 빌려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냥 가면 체면이 안서기 때문입니다. 여기 제자들도 고향에 갈 때 대낮에 당당하게 가지 못하고 밤에 조용히 갔을 것입니다. 가서 몇 일간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다 너무 무료하니까 고기 잡으려 갑니다.

 

다시 그물 잡음

 

3절을 보면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 고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제자들도 우리도 가겠다고 함께 따라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 제자들이 바다에 가서 밤새 그물을 던졌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패배의식이 문제입니다. 이 패배의식은 참 위험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은 정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 의식에 사로잡히면 용기도, 의욕도, 희망도, 의지도 다 빼앗겨 버립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나머지 제자들은 우리도 고기나 잡으러 간다고 따라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다에 나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온통 패배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상태로 고기가 잡혔다면 그 고기들은 모두 눈먼 고기들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지 말고 기도원으로 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전후해서 제자들은 큰 실례를 했습니다. 너무 큰 시행착오를 겪었고 너무 큰 실패를 했습니다. 마땅히 기도원을 갔어야 하는데 무슨 고향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왜 고향으로 갔는가 하면 고향에 아직도 배와 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향을 떠날 때 배도 불살랐어야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고 쟁기를 부수고 밭갈던 소를 잡아 동네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엘리야를 따라 나섰습니다. 선지자가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도중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로마인들 중 참신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에서 삶을 사는 것에 염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배를 타고 칼타고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칼타고에 도착하자마자 자기들이 타고 온 배를 불 질러 태워 버렸습니다. 여기서 살아가다가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죄로 찌들은 세속도시 로마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지가 있어야 새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들이 건넌 후 홍해의 물은 다시 합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지 홍해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옛날생활이 그리워서 애굽으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때로 이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기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나설 때 배와 그물을 그냥 두고 떠났습니다. 그것은 유사시에는 다시 돌아와 그 그물을 들고 바다로 나갈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물을 다시 들고 바다에 나간 것 아닙니까. 그날 밤 그들이 그물 가득히 고기를 잡았더라면 또 큰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또 유혹을 받아서 고된 제자의 길을 완전히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제자들은 그날 밤 밤새워 그물을 던져보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하는 철저한 실패를 또 경험하게 됩니다.

 

오른 편에 던져 보라

 

그때 누군가가 왔습니다. 와서 6절을 보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순간적으로 그물 가득히 고기가 잡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순간 들뜬 마음으로 감탄하였고 탄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둔감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3년 전에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건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날 밤도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어쩌면 한 마리 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예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해서 던졌더니 오늘과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었습니다. 이미 한번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그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랬으면 혹시 이 사람이 주님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오늘 또 그런 현상이 벌어졌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고기가 많이 잡힌 것에 대해서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패배의식입니다. 실패와 패배가 얼마나 큰 충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패배하거나 실패하면 생각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능동적인 대처의식이 발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하고 패배해서 충격이 컷을 때는 빨리 털고 일어서서 생각을 바꾸고 뭔가 다시 시도해야 합니다. 이 패배의식이 길어지면 폐인이 되고 마침내 회복이 안 되어 우둔해지거나 중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노숙자들을 보면 이런 패배의식, 실패의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의욕도 다시 일어나려는 의지도 다 잃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실패를 안 할 수는 없지만 실패한 후에는 자기 관리가 중요합니다. 빨리 회복시켜야 합니다. 베드로와 기타 제자들이 모두 지금 이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4년 전에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었는데도 누구도 그곳에 주님이 오셨으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남은 열정

 

그때 누군가 “주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순간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낮선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이 주님이신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이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이 오셨다고 소리쳤고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자 너무 반가워 바다로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베드로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때로 실수도 하고 실패도 많이 하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다혈질에 성격이 급해서 생각 없이 처신하기도 했지만 베드로는 악의는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베드로의 심정을 아셨습니다. “주님이다”라는 말에 바다로 뛰어 들어가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지금 그 마음에 예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에게는 이런 열정이 필요하고 그리스도인에게도 이 열정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이면서 너무 재고 따지고 계산하고 여러 번 두드려보는 신앙인들에게는 절대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베드로 같은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이런 열정이 있을 때 뭔가 이루어지고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가디언지가 젊은이들이 꼭 경험해 보라고 권고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모험을 해 보고 열정을 가져보라는 내용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톰스 강에서 서쪽으로 21㎞에 있는 블르크란스(Bloukrans) 다리에서 번지 점프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높이가 216m인 다리위에서 시속 111㎞로 7초 동안 떨어지는 그 쾌감을 한번 맛보라는 것입니다. 그 쾌감을 맛보는 것은 젊은이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모험심도 열정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재고 따지고 열 번 스무 번 두드려서는 평생 뛰어 내릴 수가 없습니다. 또 시베리아 철도로 아시아를 횡단해 보라고 했습니다. 북경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까지 밤낮 한 달 동안 기차를 타 보면 교만도 자만도 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페루의 잉카 유적지를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4천m의 고지에 조성된 3만 2,529 헥타의 마추비추 유적지를 돌아보면 생각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호주 시드니 항구에 있는 300m 나 되는 높은 다리위에 설치된 아치위의 등반코스를 올라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올라서게 되면 내 존재가 아주 작게 느껴지는 모습에서 겸허함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용기와 모험심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젊은이에게는 때로 이런 용기, 의지, 결단력, 모험심, 개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젊은이만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 대신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험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그는 다 버리고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시다”라는 말에 그냥 바다로 뛰어내릴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열정이 있어야 그의 삶에서 기적을 일구고 이런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사명을 명확하게 시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최고의 행복

 

제자들은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9절을 보면 고기를 잡고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생선도 떡도 이미 주님께서 준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13절을 보면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날 아침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거기가 천국이고 거기가 최고의 행복이 주어진 아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한 시간은 언제입니까. 여기 저기 흩어져 살던 자식들이 다 모이고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엊그제 아주 끔찍한 사건을 목격했고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과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배반하였고 도망하였고 두려움에 떨었는데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오늘 아침에 흩어졌던 제자들과 주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으니 그것도 그물 가득히 잡힌 고기를 구워놓고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먹는 이 아침이 천국 아닙니까. 제자들은 지난 3년 동안 이런 때가 없었습니다. 그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아침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욕심이나 탐욕을 줄여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행복을 창조하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이 주신 것으로 온 가족이 먹고 주안에서 살아가는 삶, 그 삶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것이 최상의 축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큰 것을 찾으려고 하면 때로 주님 곁을 떠나는 일도 발생하게 됩니다. 그날 아침 제자들에게는 일생에 가장 화려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먹은 후의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나 제자들에게는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먹은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에 속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조반을 다 마친 후에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15절을 보면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거기에 다른 제자들도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으시고 베드로에게만 물으셨습니다. 지금 베드로 마음은 복잡했습니다. 지금 실수를 저지른 것 때문에 마음이 사뭇 켕기고 있는 중입니다. 속마음으로는 죽을 지경입니다.

더구나 거기에 모닥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실 때 그 모닥불을 만지작거리며 물으셨을 것입니다. 그 모닥불 때문에 그날 밤 졸다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날 밤 모닥불만 쬐지 않았어도 졸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헛소리도 안했을 것입니다. 모닥불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는데 “너는 나를 정말 사랑 하냐”고 배반한 사람에게 물으시니 뭐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니 미칠 지경입니다. 그것도 다른 제자들 앞에서 이게 대망신 아닙니까. 그래서 대답하기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은 “다 알면서 왜 자꾸 물으십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이제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해 보라“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다시 한 번 더 믿어볼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베드로의 권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과정을 거쳐서 베드로가 비로소 사도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나가서 생명을 내 놓고 두려움 없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종횡무진 전도했습니다. 그 결과 3천 명 5천 명씩 회개하는 대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패는 때로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어떤 때는 없었던 것 보다 훨씬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그 실패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반전의 기회였고 다듬어지는 기회였고 성숙해지는 기회였습니다. 그 실패 후 베드로가 더 이상 후퇴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에게 실패는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위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 실패의 경험이 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실패를 통해서 위인의 소양을 발견하고 위인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제자들은 일생일대에 가장 큰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이 후에 성숙한 제자들로 거듭나게 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시듯 우리에게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가”, 여러분은 그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물으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형식의 삶이 아니고 때로 용기도 열정도 모험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배부른 후의 삶입니다. 우리는 배부른 후에도 여전히 더 먹을 것에 취해서 살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바닷가에서 고기 잡아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다음날 또 와서 고기 잡아 주님과 먹고 배부르게 마시는 것으로 끝났더라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배가 부른 후에는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 할 일이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일이고 다시 실패하고 후퇴하는 무력한 삶이 아니고 복음을 들고 도전하고 증명하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때 우리의 모든 실패가 승리로, 후퇴가 전진으로, 옹졸함이 모험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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