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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믿음 (1)

by 【고동엽】 2022. 1. 16.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믿음 (1)

 

롬 13: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불신앙인들은 예수를 열심히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는데 편견이 있습니다. 뭔가 약한 사람이거나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허기를 채우려고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자립심이 결핍된 사람이거나 매사 누군가를 의지해야 살아가지는 미성숙자들이거나 죄책감이나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약 자나 심약자들이거나 아니면 몽상가나 환상가가 심리를 이용해서 뭔가 이득을 얻으려고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 동기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조금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깊이 보면 신앙의 세계는 참으로 신비한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의 믿음생활을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롬 5장15-17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오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선물은 일방적으로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선물에는 뇌물성이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선물이라는 좋은 개념이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또 구원은 예수의 공로로 주어진 것입니다. 롬 5장17절을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을죄로부터 일방적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순전히 예수의 공로로 구원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나 대속 받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고 죽음입니다. 히 9장22절을 보면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신 피 흘리시고 희생함으로 이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골 1장14절에는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구원받은 존재들입니다.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에덴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야 다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요 3장3절을 보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마귀의 자녀였습니다(요일 3:10, 요 8:44). 불순종의 자녀였습니다(엡 2:2).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3). 자연인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가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 상태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세례를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물로 씻는 결례라는 예식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물세례를 죄 사함의 내적 사함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이렇게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내적 체험자들에게 베푸는 의식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변화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내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죄인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과 접촉될 때 말씀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죄 사유함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모두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거듭나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거듭나는 일일 뿐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타락한 인간의 노력이나 애씀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율법의 수고로도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지니는 한계입니다. 오직 예수의 구속의 피로 구원받고 의로워집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롬 3장28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 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믿게 하고 그 믿음이 구원을 이루고 의롭게 됨을 이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베드로의 고백처럼 믿음으로 예수는 유일한 구세주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오직 죄인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마 20:28, 막 10:45),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용서와 구원사역을 이루셨음을 믿어야 합니다(눅 23:34, 42-43), 숨을 거두실 때 구원사역을 완성하여 “다 이루었다”고 하셨음을 믿어야 하고(요 19:30), 또 주님은 다시 오실 구세주로, 재림 예수로, 심판 예수로, 보상과 결산의 예수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와 같은 믿음의 내용들이 자꾸만 희박해져 갑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기초들과 믿음의 지반이 약해져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생활

 

그러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의 삶의 지표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즉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정하고, 방탕하지 말고, 시기와 쟁투하지 말고, 육신의 일을 극복하라“고 했습니다. 이 삶을 당분간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평생 이 삶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이 삶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내용을 삶의 규칙으로 지켜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내용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는 감사생활입니다. 감사생활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는 삶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표현해야 합니다. 먼저 속죄의 은총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됨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속죄의 은총을 감사하는 감사의 내용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은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생활에는 감격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좋은 조건을 주심도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훌륭한 감사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속받았음을 감사하는 감사는 또 다른 감사입니다. 얼마나 깊고 원숙하고 차원 높은 감사입니까.

150년 전 영국 에든버러 의과대학 교수였던 제임스 심슨(James Young Simpson)이라는 분이 마취제 클로로포름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분이 마취제를 발견하기 전에는 수술할 때 생살을 찢고 수술을 했을 것입니다. 그 교수는 그 공로로 영국에서 귀족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나는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의사다”라는 한마디만 하면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이 찾아와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평생을 통해 가장 위대한 발견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마취제를 발견한 것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뜻밖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발견은 예수께서 불쌍한 죄인인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구속자 예수의 발견”, 얼마나 심오한 발견이고 위대한 고백이고 대답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감사의 삶입니다.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마음 깊이에서 나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찬송생활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노래로,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속받은 성도의 영원한 찬송(시 33:1, 34:1, 41:13)을, 성령의 감동을 받아 부를 수 있는 찬양(엡 5:18-19)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푸신 은혜를 찬양(시 103:1-5)하고 몸과 마음을 쏟아 입술로 노래하고 생활로서 구원받음을 기쁨으로 찬양(히 13:15-16)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 자유인 됨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로부터, 세속으로부터 자유해짐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43장21절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엡 1장6절을 보면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찬송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기쁨의 생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감격의 삶이고 기쁨의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고 했습니다. 성령이 지배하실 때만이 기쁨의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 9편2절에서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라”고 했습니다. 기쁨의 생활은 환경을 초월하게 합니다. 감사의 삶도 환경과 처지를 초월합니다. 그래서 기쁨의 생활은 신앙인의 삶이고 성도의 의무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20세기 중국의 선교사였습니다. 그분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합시다. 당신이 예수 믿고 정말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당신의 부모는 물론이고 처자와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의 집에서 키우는 개와 고양이 까지도 모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의 구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내 삶에 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집 마당에 있는 개와 고양이까지도 어쩔 줄 몰라서 뛰놀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구원의 축복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감사함이 없다면 내가 정말 구원받았는가를 한번 재고해 보라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봉사생활입니다. 봉사는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봉사생활은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삶입니다. 이 봉사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 중생한 후에 나타나는 삶의 내용입니다. 중생 이전에는 대부분이 이기적 욕망의 삶을 살고 자신 위주로 살아갑니다. 중생 이전에도 봉사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봉사생활은 이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봉사이고 단순히 보람을 얻기 위한 봉사생활입니다. 인간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변화하여 이타적이 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발휘하기도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가 없어지고 내가 그의 안에서 살아갈 때 나타나는 정신입니다. 그가 있음으로 내가 존재하고 그가 이롭게 됨으로 나도 이롭게 되는 삶이 사랑의 삶입니다. 고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필수적으로 이 봉사의 정신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저녁 잡수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종이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봉사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봉사는 사랑과 기도가 동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봉사는 그냥 하면 봉사활동입니다. 동정해서 하는 봉사는 자선활동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는 봉사는 예수의 사랑으로 하는 신앙적인 봉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봉사는 자신을 드리는 예배행위라고 말합니다. 롬 12:1절을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너희 몸을 제사의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입니다. “나의 재능, 나의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바쳐야 합니다. 그때 그곳에서 진정한 봉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생 나병환자와 산 사람 다미엔(Joseph Damien de Veuster)은 임종할 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친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지금은 완전히 가난한 그대로 죽고자 한다, 지금 내 자신의 것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 나는 행복하다”하고 운명했다고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봉사는 예배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봉사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이고 그 삶을 주님이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는 순종의 생활입니다. 순종은 믿음생활의 필수요소 입니다. 롬 6장17-8절에서 사도바울은 ”복음에 순종해야만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순종의 삶이 필수로 요구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순종이 이루어지려면 3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지적요소입니다. 십자가와 복음에 대해서 지적으로 깊이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지적으로 믿어야 순종의 힘이 나옵니다. 그래야 복음의 세계로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감정적 요소입니다. 마음으로 기뻐하고 복음에 내 자신을 의뢰해야 합니다. 복음을 지적으로 수용하고 가슴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의지적 요소입니다. 인격을 통해서 복음을 나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신앙은 감정적인 것만 아니고 지적인 것도 아닙니다. 내 가슴으로 내 의지로 나의 삶을 전폭적으로 바치고 헌신해도 아깝지 않다는 의지적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대학교 때 “나는 찾아야 한다, 나의 인생, 나의 시간, 내 인생의 전 존재를 바쳐도 아깝지 않을 그 절대적인 목적이 되는 절대자를 만나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갈구하며 찾는 사람은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효과적으로 적용될 때 비로소 우리에게서 흡족한 순종이 나옵니다. 순종은 전인적인 행동입니다.

오늘 구원받은 성도들은 전에는 모두 죄의 종이었고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주 안에서 거듭남으로 비로소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순종의 삶을 거부하는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내안에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자연인인 내가 예수 안에 깊이 들어와 거듭나고 예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께 순종하는 순종의 영적 자질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우리는 순종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너무 많기에 개중에는 중심 없이 탈락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눈물로 고백하고 간증하고 헌신한 사람들도 얼마 못가서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의지적 신앙이 아직 형성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직 이론적으로 믿는 신앙이거나 감정적으로 믿는 신앙이거나 일시적 고백으로 끝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깊이 인식할 때 삶에 진정한 영적 고백이 있고 헌신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에서 나오는 고백이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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