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온전한 헌신
롬 12:1-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본문은 로마서의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1-11장 까지가 로마서의 전반부인데 주로 내용은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12-16장까지는 후반부인데 여기서는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어 구원받고 의로워지고 제자가 되고 그리고 그 구원 후에는 어떻게 살 것이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냐”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사람들이다”라는 대 전제를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은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능력으로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사실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도취되어 실생활에서 도덕을 지키는 일과 삶을 등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영지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습니다.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사람이 영적으로 구원받으면 육신은 별 것이 아니고 행위의 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구원받은 사람의 일상적인 삶의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은 감사하는 삶, 찬양의 삶, 기쁨의 삶, 봉사의 삶, 순종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내용을 한층 더 넓고 깊고 원대한 뜻으로 다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온전한 헌신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일차적 삶의 목표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헌신하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왜 헌신하는 삶을 강조했는가 하면 그 헌신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헌신의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시 73편28절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성도들에게 온전한 헌신의 삶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온전한 헌신을 말하면서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몸은 단순한 육체를 말함이 아니고 헌신하는 사람의 인격과 지식과 정성과 정신까지 포함한 몸을 말합니다. 헬라적 사상으로는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 나아가 “온전한 몸의 헌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고전12:27)이고 성령의 전 (고전6:19)이기에 몸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섬김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6장13절에서 “너희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 중 하나는 “온전한 헌신”입니다.
헌신의 유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2)”고 했습니다. 헌신은 “기독교인으로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기초요 출발점”입니다. 고로 헌신의 삶은 일회적이 아니고 일생동안 끊임없이 나타내야 할 의무의 삶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교부였던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isostomus, 349~407)는 “주님을 위하여 한번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과 헌신의 삶이 중요하지만 그 삶을 지속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은 전폭적인 헌신을 강조합니다. 2절 말씀은 헌신의 유지를 강조합니다. 헌신의 삶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헌신이 중요한데 더 중요한 것은 오래 지속된 헌신의 생활입니다. 이 문제를 이루기 위해서 본문을 보면 한 가지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 나오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는 자기위주의 삶을 중시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이 곧 신입니다. 모두 자기를 가꾸고 섬깁니다. 오늘은 모두 자기 자신을 우상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늘의 세대를 따르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오늘 이 세대의 풍조는 헌신하고 경건 생활하는 이런 생활을 흐트러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부단한 애쓰고 노력 없이는 헌신의 삶을 살기 힘듭니다.
기독교적 인생관 확립
본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2)”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속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탄생한 사람들입니다. 고로 성도들은 생활 방식이나 가치관이 전혀 다른 삶의 목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변화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의 가치관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로 변화”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땅의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던 삶의 기준이나 무신론자의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기독교적 인생관을 확립하는 삶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의무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합당하게 사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1) 내적 의무
신앙생활에서 내적 의무는 환란 중에 즐거워하며 인내와 연단 속에서 소망을 가지는 삶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다가 때로 조그만 고난이나 어려움에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 삶이 자기본위의 삶이고 자기입장이 먼저일 때 우리는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어설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막 8장34절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자기부정”처럼 중요한 신앙의덕목이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고 내적 의무에 충실한 삶의 덕목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자기부정을 통해서 성령의 사람으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2) 외적 의무
이 외적인 의무가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의 내용들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본문 내용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수한 도덕적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선한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웃과 조화 있는 삶을 상당히 강조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내용을 보면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만큼 이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은 모두 나와 가장 가깝게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각 없이 생각하면 모두 나와 상관없는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이웃 사람들은 모두 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웃 사람의 불행이 나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이웃이 기쁘면 우리 집도 기쁨이 옮겨옵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삶입니다.
북한은 분명 우리의 적이고 원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외적인 의무입니다. 탈레반도 우리의 적입니다. 그들은 우리 백성을 억압했습니다. 피눈물 나게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 가져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도 구원받을 대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고 구원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외적 의무의 삶입니다. 아프리카 난민이 굶주림으로 죽어갑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이 죽거나 살거나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 상관이 없습니까. 아니기에 우리들이 TV를 통해서 그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헌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외적 의무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나와 다 상관이 있다고 생각할 때 이 외적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연대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무한 사회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 즉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남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자질
1) 소망의 자질
인간의 삶에는 소망의 자질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소망은 삶의 원동력이고 능력이고 에너지이고 목적이고 뜻이고 힘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 심판 받을 세상입니다. 누구도 이 세상의 미래를 믿을 수 없는 정이 떨어지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망할 세상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까지 보내셔서 구원하신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누구든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소망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을 믿기에 이 세상의 미래도 믿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미래도 소망의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서를 보십시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멸망을 예고합니다.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렇지만 예언서 말미에는 또 한결같이 희망을 말하고 소망을 말하고 은혜를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지만 또 소망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한마디로 “소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소망을 말해야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다 절망하고 비관하고 멸망을 말해도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소망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타락할 대로 타락하였지만 이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타락한 인간의 역사는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골자입니다.
2) 사랑의 자질
소망이 아무리 좋아도 소망 그 자체만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미래적인 안목과 기대와 꿈을 줄뿐 현재의 삶 자체는 아닙니다. 소망은 오늘 현재 우리에게 밥을 주지 않습니다. 빵도 주지 않습니다. 옷을 주지도 않습니다. 오늘 배부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소망은 단순히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정신적인 양식일 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내일을 위해서 소망이 있어야 하지만 오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을 위해서는 살아가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믿음도 소망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 사랑입니다. 천국은 미래이고 소망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소망이나 희망만 가지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미래에 갈 천국에 가려면 오늘 사랑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 나타나는 모든 삶의 자질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끌어안고 하나 되고 헌신하고 중보하고 연합하게 하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곳에 변화가 일어나고 일치가 일어나고 하나가 이루어지고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의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믿음의 자질
신앙은 절대적 기준을 신뢰하고 믿는 생활입니다. 그 절대적 믿음의 기준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 절대적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고 생명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 종교인들의 섬김의 기준과 섬김의 강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교해 보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형식적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불교인들은 불상 앞에서 수천 번씩 합장해서 배례하는 모습을 보면 지성이 극심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저런 정성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기독교는 수고와 정성으로 구원받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래도 신앙적 수고나 헌신이나 애씀은 신앙심과 비례합니다. 또 이슬람교인들과 한번 비교해 보아도 마찬가지 답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루에 5번씩 기도합니다. 금식기간에는 철저하게 금식합니다. 회교 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금식기간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 때는 버스 운전사도, 어른은 물론 아이들까지 다 금식에 동참합니다. 일하면서도 금식합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 마음이 섬뜩하기도 합니다. 회교도들은 일평생 한번은 반드시 성지인 메카를 방문해야 합니다. 그 성지방문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 그 성지순례를 인생에 가장 큰 영광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타 종교로 개종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에 비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신조는 어느 정도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장래를 염려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고 운명을 맡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구원문제에 대해서 불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기에 나의 미래를 맡기고 나의 종말을 맡기고 나의 삶의 문제들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기초 위에 나를 올려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있기에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사랑하며 만족하게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주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자본을 가지고 삶을 구현하고 주님이 요구하신 진리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 삶이 헌신의 삶입니다. 봉헌의 삶입니다.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이 생각났더라 행11:15~18 (0) | 2022.01.16 |
---|---|
고생의 밥과 물 (0) | 2022.01.16 |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믿음 (1) (0) | 2022.01.16 |
영적생활의 장애 요소들 /눅 21:34-36 (0) | 2022.01.16 |
어느 시인의 조국애 /시 102:1-11 (0) | 2022.01.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