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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조국애 /시 102:1-11

by 【고동엽】 2022. 1. 16.

어느 시인의 조국애

 

시 102:1-1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응답하소서.

 

여자 골프 선수 중에 오초아라는 멕시코 출신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현재 세계 랭킹 1위입니다. 이 선수가 우승을 하면 인터뷰 할 때 꼭 하는 말이 “나는 멕시코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영광을 멕시코 국민에게 바칩니다.”하고 응답합니다. 참 대견하고 예쁘고 사랑받을 만한 정신을 가진 선수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어려가지 일수 있습니다. 목숨을 바쳐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큰 공헌을 해서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큰 방법만이 나라사랑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오초아라는 선수처럼 마음과 생각과 말 한마디로서도 얼마든지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멕시코인은 천시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미국인과 세계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멕시코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애국자입니다. 그것이 나라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내 나라가 최고 좋은 곳입니다. 외국에 나가 보면 며칠 못되어 빨리 내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집도 내 집이 최고이고 나라도 내 나라가 최고입니다. 이 세상에 내 나라만한 곳이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뺏기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를 가끔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인들이 나라를 뺏고 감시하고 핍박하고 교회에도 못 가게하고 그랬습니다. 거기다 농사를 지어 놓으면 공출한다고 다 뺏어가고 무시하고 억압하고 그랬으니 그때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그렇게 36년간을 살다가 가까스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는가 했는데 6,25가 터졌습니다. 6,25 전란 때 비참함은 또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엊그제까지 이웃 사람이었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빨갱이 프락치로 변해서 동네사람들을 감시하고 고발하고 끌어다 구타하고 죽이고 그랬습니다. 공산당은 평소 불량자들, 소외 자들을 불러내서 그들에게 완장을 채워 주고 동네사람들을 처단하게 했습니다. 그때 점잖게 살아가던 동네 어른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순교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해서 발생했습니다. 이 땅에 공산당은 없어져야 합니다. 인륜을 파산시키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껄끄럽게 한동네에서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운명이 얼마나 기구합니까. 우리나라는 참 불운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 역사는 이 땅에 다시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내 나라가 잘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도 잘 뽑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백성들이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나라의 기반도 든든해야 하고 흔들림도 없어야 합니다.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사회문제든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본문은 나라를 잃고 서러움에 눈물짓는 한 시인의 절규하며 기도하는 한탄 시입니다. 바벨론으로부터 침략당해서 예루살렘이 불타고 성은 무너지고 성전은 짓밟히고 황폐해지고 쓸 만한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가 포로 신세로 살았습니다. 본문은 그때의 상황을 시로서 시인이 그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탄식의 기도 1-5

 

이 기도문을 보면 구구절절이 가슴을 저미게 하는 내용입니다.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부르짖음을 들으소서”(1). 고통이 너무 길어집니다. 기도하는 일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부르짖음을 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 부르짖는 기도에 속히 응답하소서”(2). 이제는 더 이상 지탱하고 살아갈 힘이 소진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속히 응답해 달라고 촉구합니다.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3). 여기 냉과리는 “모케드” 즉 석쇠를 의미합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용광로라고 해석했습니다. 용광로의 불이 얼마나 뜨겁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쇠붙이들을 그곳에 넣으면 모두 새빨간 쇳물로 변해버립니다. 지금 시인의 심정이 마치 그렇게 불타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음식 먹기도 잊고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나이다”(4). 사람은 먹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고통스럽고 심려가 많으면 먹는 일도 잊어먹습니다. 먹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의 고통이라면 알만하지 않습니까. 이 시인이 처한 지금 상황이 그런 상태입니다. “나의 탄식소리로 인하여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5). 욥기 19:20절을 보면 “욥이 가죽이 뼈에 붙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하고 고민스러우면 이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이런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이런 기도하기 전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내 영혼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내 신변정리도 잘 해야 합니다. 지금 좀 편안하다고 잠자고 놀고 생각 없이 살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렇게 고민스런 기도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찾아옵니다. 신앙인에게도 찾아옵니다. 교회에도 찾아옵니다. 가정에도 찾아옵니다. 내 나라에도 찾아옵니다. 또 내 영혼에도 반드시 옵니다. 우리민족이 그렇게 준비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잠자고 있을 때 일본은 세계화를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육성했습니다. 그래서 1860년대에 명치유신 혁명을 일으켜 근대화를 이루고 세계화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서구세계가 4-500년 전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영적 눈을 뜨고 넓은 세계를 알고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참으로 어둑하게 살았습니다. 사색당파싸움이나 하고 쇄국정치를 했습니다. 그러자 영조 때 흰색나물, 노랑나물, 푸른나물, 빨강색나물 등 4색 야채를 넣고 밥을 비벼서 신하들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먹고 제발 사색이 이 비빔밥처럼 하나가 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정신 차리지 않고 있다가 일본에게 나라를 뺏겼고 그때 정신 차리지 않고 살다가 6,25를 당한 것입니다. 한번 뺏기면 되찾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한번 갈라지면 봉합하고 하나 되기가 너무 힘듭니다. 나를 지켜야 합니다.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본시는 전통적으로 비탄적인 참회 시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서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백성들에게 우상에게서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외치다가 죽임을 당한 선지자도 있습니다. 눈물로 호소하다가 눈이 시력을 잃은 선지자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못들은 척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거대한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쓸 만한 사람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시인도 그때 포로로 잡혀가 그 포로의 삶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수난을 개인적 아픔으로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포로생활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에스더서를 보면 포로생활 하다가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다니엘이 포로생활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습니까. 애급에서의 노예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시인도 그 생활을 지금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절규의 기도가 나옵니다. “내 부르짖는 기도에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사 속히 응답하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시인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처량했겠습니까.

 

현재의 처량한 모습 - 6-11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습니다, 그리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습니다”(6) 부엉이, 올빼미를 당아새 라고 부릅니다. 부엉이 올빼미는 생김새나 울음소리가 기분 나쁩니다. 그래서 부정한 새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현재 우리의 존재 가치가 그만큼 초량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이방민족에게 마치 부정한 새인 올빼미 신세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밤을 새우는 지붕위의 참새 같습니다”(7). 참새는 짝을 지어 다닙니다. 그런데 짝을 잃은 참새 한 마리가 밤새워 혼자 처량하게 지붕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 시인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민족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도 위로할 자가 없는 이방 땅에서 무시당하며 살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종일 훼방하나이다.(8). 이방인들이 와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놀립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분노와 비참함은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말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이것이 유대인에게 최고의 놀림입니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나이다”(9). 재는 수치와 회개의 상징입니다. 욥이 고통스러울 때 재위에 앉아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다말이 압논에게 겁탈당하고 돌아가 재에 머리를 처박았다고 했습니다(삼하 13:19). 본문은 시인이 자신들의 모습이 너무 처량해서 재를 먹는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은 재를 먹는 기분일 것입니다. 일제 때 우리의 딸들이, 누이들이 위안부로 끌려갈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마치 재를 먹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군대에 끌려갈 때, 농사를 다 지어놓으면 다 뺏어갈 때, 그 모습을 눈뜨고 그냥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심정이 재를 먹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심정이 지금 이 시인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극소수 사람들만 이런 기도를 할 뿐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 없이 그냥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대다수 사람들은 나라생각, 나라걱정, 나라를 위한 기도는 안합니다. 지난 대선 때 투표안하고 해외로 골프 치러 간 사람이 25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25만 표 때문에 오늘 우리는 지난 5년 동안이 모양으로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 때는 인천공항에 나가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골프백 들고 공항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물어야 합니다. “여행을 포기하고 투표할거냐, 아니면 아예 나가서 들오지 말고 골프나 치며 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 사람들이 너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감이 없습니다,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 나라가 이 모양 이골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탄식해 보아야 뭐합니까. 눈물 흘리고 땅을 친들 무엇합니까.

본 시인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곳에서 온갖 참상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선지자들의 피를 토하는 외침을 외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외침을 못들은 척 했던 사람들입니다. 생각 없이 살고 경고도 무시하고 그날그날 놀며 우상 섬기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바벨론의 침략을 당해서 예루살렘이 불타고 억압당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다 붙잡혀갔습니다. 가서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평소 선민이라고 자부하고 자존심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평소 이방인들을 짐승처럼 바라보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 이방인들로부터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놀림을 받고 있으니 내 지금의 모습이 마치 짝 잃은 참새 같고 부정한 올빼미 같고 먹지 못하여 피골이 상접한 비참한 모습입니다.

 

이 고난의 의미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10). 이 시인은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유배 생활할 때 그 고통은 옛날 선지자들의 외침을 외면한 죄라고 믿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얼마나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쳤습니까. 예레미야는 눈물로 회개를 외치고 돌아오라고 호소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창녀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가출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찾아가 돌아오라고 호소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때마다 아내를 돈 주고 다시 속량해 왔지만 며칠 있다가 아내는 또 나갔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울어대는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집나간 아내를 기다리다가

그는 무릎을 쳤습니다. “지금 내 이 심정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구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그렇게 외쳐도 못들은 척 우상을 찾아가던 백성들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나가서 외쳤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는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14:1).” 그렇게 선지자들이 눈물로 호소하며 외쳤는데 들은 척도 안하더니 그런데 오늘은 그 징벌로 나라는 풍비박산 되고 백성은 포로로 잡혀가고 현재 모습은 짝 잃은 참새 모양으로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고 부수고 파괴하고 죽이는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탄식하고 눈물 흘리고 고통당하도록 골탕 먹이는 하나님은 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때로 하나님은 그렇게 회초리를 드실 때도 있습니다. 무섭게 심판하실 때도 있습니다, 무섭게 징벌하실 때도 있습니다. 무섭게 때리고 꺾으시고 부수고 고통을 안겨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사랑의 매입니다. 시인은 현재 상황을 그런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여기서 미래에 다가올 소망, 희망,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 회복의 믿음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이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 이다”(13).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버리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제 때가 오고 있다고 시인은 믿었습니다. 그 근거가 슥 1:12-17 예언한 내용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70년이 마치면 -- 돌아오리라“. 믿음에도 좋은 믿음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믿음은 다가올 희망, 믿음, 기대, 소망을 가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버리셨다가도 또 찾으십니다. 죽이셨다가도 또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다시 소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다시 소생시키십니다. 시인은 현재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영원히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망 있는 믿음입니다.

그 내용이 12- 22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14),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15),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며 그 영광중에 나타나시며(16), 여호와께서 저희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리로다(17),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18).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희망이고 소망이고 기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에는 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고 기대가 있고 응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 안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감사하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8,15 62돌을 맞았습니다. 8월은 나라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나라가 곧 나 자신이십니다. 내 가정입니다. 내 운명입니다. 나라 없는 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주신 나라이고, 우리 민족을 위해서 주신 나라입니다.

 

2007. 8. 1·2. 광복절 62돌 기념 예배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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