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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24-32 /제목: 하나님의 차가운 진노: 내어버려두심

by 【고동엽】 2022. 1. 15.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 말씀은 이방인들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방인들 가운데 즉 이방인과 유대인이 나누어지기 전에 그러니까 이방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닌 인류의 원시 역사 속에 나타난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거거든요. 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 역사는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9장까지 이스라엘이 아직까지 세계 민족 한복판에서 제사장적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 나타난 하늘로부터의 진노의 역사거든요. 그게 노아홍수였고 바벨탑 축조세대의 좌절감이었고 소돔과 고모라 심판사건이죠. 그런데 이 모든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는 뿌리가 우상숭배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우상숭배는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 새겨놓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는, 도말하는 가장 치명적인 죄입니다. 그래서 1장 23절을 보니까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니까 고대인들과 오늘날에 가장 큰 차이는 고대인들은 지금 이런 모양의 우상숭배를 했단 말이죠. 동물 모양을 그려놓고 거기에다 절을 했어요. 여러분, 동물 모양에다 절을 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히고 어리석은 일이죠. 동물 형상을 새겨놓고 절을 했다는 것이 너무 어리석죠? 근데 오늘날 우리는 추상화된 수로 표현되는 부, 재산, 내가 만지지도 못하는데 내 은행에 있는, 내 은행에 잔고로 있는 그 돈, 우리는 수를 믿고 있거든요. 우리는 우리의 구매력을 믿고 있고, 우리의 재산을 믿고 있고, 우리의 욕망을 믿고 있는데 문제는 고대인들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동물 형상 앞에 절을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불합리한 일을 했듯이 오늘날 탐심을 숭배하는 모든 종류의 죄악 고대인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모든 종류의 욕망을 다 충족시키려고 하는 이런 욕망충족의 백태들이 전부다 우상숭배라는 거죠. 오늘 24절부터는 동성애로 대표되는 인간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24절 26절 28절 보면은 3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버려두사, 버려두사, 버려두사…….그니까 내어버려 두사라는 뜻입니다. 이 버려두사, 내어 버려두사라는 말은 신적유기를 가리킵니다. 신적유기를 가리킨다는 말은 하나님이 진노를 폭발할 때까지 진노의 대상, 심판의 대상이 될 때까지 내어버려 두시는 거거든요. 1장 24절을 보세요. 1장 24절을 보면은 “하나님이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사,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더러운 마음속에 내어버려 두니까 드디어 더러운 마음의 마지막에 이렇게 동성애가 나타났던 거죠. 오늘날 이 동성애가, 오늘날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동성애랑 이 로마의 동성애가 다르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함부로 정죄해선 안 됩니다. 로마가 말하는 이 동성애는 그야말로 성적문란의 극치로써의 동성애를 가리킵니다. 근데 세상에는 성적문란의 극치가 아니라 동성애 성향 외에는 나머지가 다 말짱한 아주 윤리적인 고상한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되는 것은 동성애를 한다고, 동성애 성향이 나타났다고 바로 로마서를 가지고 정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헨리 나우엔 같은 사람, 헨리 나우엔은 위대한 영성가죠. 상처 입은 치유자란 책을 썼던 헨리 나우엔은 자기가 끝까지 동성애, 그 동성애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워하고 동성애적 성향을 표현하고 나서 괴로워했고 동성애 성향이 있는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이걸 필립 얀시가 끝까지 헨리 나우엔이 동성애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알고 그를 이해하는 책을 썼죠. 내 영혼의 스승들이란 책에서요. 그러니까 동성애 빼고는 나머지가 모두 다 윤리적으로 고결한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바울이 말한 이 동성애는 성적문란을 겸한 동성애이기 때문에 정죄를 받고 있는 거죠. 제가 볼 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성애 정치그룹, 동성애 하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볼 때 참 난잡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분들은 동성애만 하는 게 아니라 양성애도 하고 온갖 종류의 성적 실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그런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종류의 동성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84가지의 사이성, 간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니까 남남남남성, 남남남남여성, 이렇게 84가지의 경우의 수가 나오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을 “너 남성이냐? 여성이냐?” 이렇게 묻는 것에 대해 첨단 인류학에서는 굉장히 무례하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을 해야 되고 대비를 해야 합니다. 저 또한 창조질서는 남성과 여성으로 됐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창조질서가 이렇게 됐다 해서 동성애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동성애 때문에 자살하려고 하고 동성애 때문에 린치를 당하고 공동체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다 심판하는 데 앞장서서는 안 되겠죠. 조심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역리대로 남자 또는 여자를 쓰는 동성애를 이방인 사회에 나타나는 가장 대표되는 신적유기, 하나님이 잘못된 것은 알지만은 신적유기, 즉 내어버려 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즉각 초래하지 않습니다. 즉각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어 이거는 괜찮은 행동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너무 기가 막힌 어처구니없는 이런 창조질서의 일탈을 내버려 두십니다. 1장 26절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부터 임하여 무섭게 어떤 인간의 행동을 가로막는 하나님의 심판적 진노도 있고, 하나님의 진노는 신적유기 즉 내어버려 두는 형태로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 차가운 심판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그게 옳은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나쁜 행동을 하고 내가 이렇게 중독적인 행동을 하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내어버려 두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고, 나를 용납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기 때문에 이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차가운 진노가 내게 역사한다’라고 생각해야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신 결과 실제로 이방인 사회에서 나타난 죄들은 이런 죄들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 이때 수군수군한다는 말은 뭡니까? 음모를 꾸미고, 뭔가 주도면밀하게 악을 행하기 위해서 도모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개인이 이런 행동을 한 두 번 한다 해서 바로 하늘로부터 진노가 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버젓이 활보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합니다. “저렇게 악한 놈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을 활보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살아계시는가?” 이렇게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악행을 범하는 자들이 의로운 사람들 한복판에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이 상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차갑게 그들을 내어버려 두신 증거입니다. 진노에 맡겼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악행을 내어버려 두심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까 너무 조심해야 됩니다. 이 상태는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죄를 범하고 다니는데 하나님이 나를 전혀 심판 안하시네. 하나님 안 계시나 보다’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나는 지금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해 주지 않기 때문에 차갑게 진노를 경험하고 있으며 내어버려 두심, 신적유기를 경험하고 있다’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이런 신적유기 상태에 있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인간의 죄성을, 사회적으로 인간관계의 공동체성을 깨는 모든 죄를 지적합니다. 모든 죄는 죄를 짓는 자기에게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행위는 이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가는 것을 결정적으로 방해합니다. 관계성을 파손시키고 사회적 촘촘한 그 인간연대를 부서트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합니다. 이런 개인들에게 나타난 죄들이 즉각 심판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진노를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신적 불쾌감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죠. 이점은 우리가 진짜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도 우리 교우들이 거룩한 교우들의 공동체에 속하면은 이런 죄들은 짓고 싶어도 짓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하는 공동체가 우리를 보호합니다. 우리가 자주 만나는 사람, 내가 기뻐하고 자주 만나는 나의 친구가 나를 이런 죄로부터 건져줍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개인의 정신건강에 주는 그 유익은 진짜 큽니다. 좋은 교회가 일주일에 한 번씩 쇠붙이를 끌어들이는 자석처럼 여러분의 영혼을 끌어당기면, 강력한 소속감을 느끼는 한 교회가 여러분에게 있다면은 여러분은 진짜 복 받은 것입니다. 왜? 이런 신적인 내어버려두심을 당하는 죄를 경험하지 않는 거거든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현존이 여러분의 영혼을 지탱하고 부축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런 무섭고 차가운 신적유기 상태를 맛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인생도 아닙니다. 이제는…….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은 1장 24절부터 32절에 나오는 이런 창조질서를 감히 거역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파탄시키는 이런 무서운 죄에 가담하지 않죠? 여러분의 인생은 뭐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신적인 신실함으로 여러분 안에 신실함을 창조하셔서 오직 나의 의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붙들려서 사는 복된 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이 좋은 교회를 이루어서 내가 달려가고 싶은 감미로운 공동체가 여러분 인생의 한복판에 있기를 바라고 그 달려가고 싶은 공동체 한복판에 거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을 지탱하시고 긴 인생의 여정에 부축하시고 여러분을 죽음의 순간까지 인도하실 하나님을, 여러분 그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여기셔서 ‘저분과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같이 가는 우주선을 타고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친밀하게 서로를 아끼면서 서로를 축복하면서 똘똘 뭉쳐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차가운 진노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천지창조 질서를 파괴하면서까지 우리의 악을 도모하고 우리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도모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옳아서가 아니라 신적유기 상태임을 깨닫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의 차가운 진노의 위험성을 깨닫게 도와주옵시고 오늘 하루도 거룩한 위축감으로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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