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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by 【고동엽】 2022. 1. 12.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1969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1) 교회 역사를 배우는 것의 중요성
그리스도인은 교회 역사를 배움으로써 신학서적을 읽는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매우 명백하고 분명하게 보이지만, 실제 사람들의 상태와 조건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는 이행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배워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배우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 서적을 읽는 것에서 오는 부족을 보충한다면, 우리는 이미 준비가 된 셈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반드시 빠질 여러 가지 함정과 위험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2) 16-17세기의 특징
하나로 연합되어 있던 서구 교회가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프로테스탄트는 교회 연합의 개념을 흩어버렸고,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분리된 이후 프로테스탄트 내에서도 여러 분파(루터파, 스위스 개혁파 교회, 재세례파, 영국 국교회, 청교도, 장로교, 분리주의자, 퀘이커교도 등)가 생겨서 그러한 비난을 받을 만한 요소를 가진 듯합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 내에서도 여러 분쟁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다만 로마 교회가 가진 권력 때문에 그 문제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꼭 프로테스탄트라고 해서 그 자체가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프로테스탄트 내의 몇몇 종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포용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분쟁들이 왕이나 권세자들에게 고통이 되어 종교 개혁 자체를 무산시키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포용에 특히 관심이 있었습니다.
3) 분쟁의 원인 - 포용을 바라면서도 나누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① 국가 교회 관념 : 모든 나라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유서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고, 개혁이 일어날 때 자신들이 처한 국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본능적이었습니다.
② 독특한 국가적․민족적 특징 : 나라마다 교회 형태가 서로 다른 것은 각 나라의 서로 다른 특징들 에서 왔을 수 있습니다. ex) 잉글랜드 vs. 스코틀랜드 cf) 개인적인 기질 - 루터
③ 정치적 요인 : 루터가 재세례파를 반대했던 이유,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을 작성한 멜랑톤, 엘리자 베스 여왕과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④ 전통의 문제 : 변화를 싫어하는 전통으로 인해 로마교회에서 본받은 어떤 의식들을 지키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감독제도입니다. 사실 1560년부터 1660년까지의 역사를 볼 때 포용주의를 이룩하려는 모든 시도에 있어서 큰 거침돌이 되었던 것이 궁극적으로 감독제도였음 알게 됩니다.
⑤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정의 문제 : 그리스도인 신앙과 관련하여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사이 의 구분선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찬식 문제로 인한 루터와 개혁파 교회들 사이의 분열
4) 역사적 교훈 &오늘날의 상황
오늘날은 정치가 더이상 주도적인 요인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교회가 분리하고 싶어하는 바람이 커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교회의 연합에 대한 이야기와 활동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들이 전혀 갖지 못했던 (연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칼빈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연합을 위한 불타는 열망을 갖고 있습니까? 이러한 열망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교회의 분쟁은 추태이고 분열은 엄청난 죄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교회의 이상을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① 국가 교회 사상에 대하여 영원한 작별 인사를 해야 합니다.
②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것들에 대한 정의 문제를 공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 부정해야 할 두 가지 입장
사무엘 존슨 “제 입장에서는 교황주의자든 프로테스탄트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일치한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차이란 사소한 것이며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리챠드 백스터 “사도신경을 신앙의 요약으로, 주기도문을 기도의 요약으로, 십계명을 의무의 요약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두 참그리스도인이요, 우주적이요, 보편적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③ 전통에 묶이는 위험을 피해야 합니다. 16-17세기에 작성된 신앙고백서에 율법주의적으로 묶일 위험을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들을 지침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그것이 작성된 역사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식하고 성경의 빛에 비추어 시험해야 합니다.
5) 오류와 이단, 참다운 복음주의적인 입장과 가톨릭을 구분하는 구분선
멜랑톤 “우리는 오류를 범했으나 그 오류를 옹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로서 용납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근거를 전혀 갖지 아니한 교훈들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이들을 형제로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로버트 해리스 “나는 구원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어서 그것이 없이는 아무 소망이 없는 것을 규정짓겠다고 장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확신합니다. 첫째로, 근본적인 것은 양편의 사람들이 만드는 것보다는 적습니다. 둘째로, 지붕이나 상부 구조가 기초를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챨스 헬레 “우리와 우리 독립파 형제들 사이의 차이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아브라함과 롯이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공통의 적을 겨냥해야 할 때마다 서로를 구출할 채비가 되어 있었듯이, 우리의 차이란 고작해야 작은 주름살 정도의 차이밖에는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1971 청교도주의와 그 기원
청교도주의란 무엇이며, 영국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일시적이고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차이에 불과한 것인가?
1) 청교도주의의 시작
청교도라는 용어는 1567년에 쓰여졌지만 청교도주의는 1524년 윌리암 틴데일에게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청교도주의는 일종의 사고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주의는 태도요 정신입니다. 그는 감독들의 승인이나 재가를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기 위해 왕의 승낙없이 영국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의미했으며,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2) 청교도주의와 국교도주의
 
3) 청교도와 국교도의 차이
① 교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의 문제 - 완전하고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
② 국제적인 시각 vs. 국가적인 시각 ; 성경의 가르침 vs. 이성(전통, 관습)
③ 복음적인 관점만이 유일하다 vs. 복음주의는 하나의 관점이요 하나의 강조점이요 하나의 태도이다
④ 예배의 신령성 강조 vs. 예배의 형식성 강조
▶ 청교도는 일차적으로 순전한 교회, 진실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청교도의 가르침의 여러 국면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청교도주의의 국면들을 아무리 존경한다 할지라도 그의 첫번째 관심이 순전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으로써의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자신을 청교도라고 부를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1972 죤 낙스 - 청교도의 창시자
청교도주의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윌리암 틴데일을 만나게 되지만, 그 사상이 조직화된 하나의 체계로 된 것은 낙스에게서였습니다.
1) 독창성과 독립성 : 청교도는 그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결코 “기성화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에 관계없이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 때문입니다.
2) 청교도주의의 주도 원리들을 명백하게 제시 : 낙스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그 전통 및 성경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우선합니다. 두번째 주도 원리는 철저한 개혁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교리를 개혁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교리의 개혁에만 멈추지 아니하고 개혁이 실제의 영역에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신약이 말하는 교회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3) 주도 원리들의 적용 : 청교도주의의 가르침을 하나의 사상으로만 생각하고 그것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청교도주의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후퍼 vs. 낙스) 낙스는 교회의 본질 및 의식 그리고 규율의 실행 등에 대해 신약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을 양심적으로 적용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뛰어났습니다 - 공기도서를 사용하지 않음, 성찬을 받을 때 앉은 자세로 받으라고 가르침, 출교 처분을 받았던 사람의 자녀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함, 토마스 크랜머에 의해 작성된 신앙 조항 반대(제2공기도서는 거룩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의 성경에 의해서 입증되었으며, 모든 의식과 모든 예식, 공기도서와 성찬 예식과 그밖의 다른 모든 일반적인 규례들에 관해서 모순된 것이 하나도 없다“), 기도서에 흑색 규정 삽입, 성례의 본질의 교리를 바꾸려고 노력(낙스 vs. 크랜머), 로체스터의 감독직 거절
4) 잉글랜드 청교도주의의 창설자 : 낙스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모이고 있는 잉글랜드의 피난민 교회의 두 목회자 중 한 사람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음-> 그와 휘팅함은 공기도서를 거부하고 대신 예배 모범을 작성-> 기도서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진술하자 리챠드 콕스의 비난을 사게 되었고 프랑크푸르트를 쫓겨남-> 제네바에서 잉글랜드 사람들로 형성된 최초의 진정한 청교도교회 세움, 예배 모범 사용.
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후에 잉글랜드의 감독들에게 청교도들을 핍박하지 말 것을 탄원함. 잉글랜드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당분간 연합과 화평을 위해서 일상적인 질서를 깨뜨리거나 어렵게 만들지 말라고 권면(잉글랜드의 입장이 특이하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당국자들이 아직 전체적으로는 진리를 설교하고 있는 한 특별한 문제 때문에 그들과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챨스1세의 사형 판결을 정당화하는 글을 쓴 죤 밀턴에게 영향, 낙스가 죽은 후 111년 후인 1683년에 그의 저작들이 소각되고 읽지 못하도록 금지령 발표, 국가와 통치자들에 대한 필그림 파더의 태도에 영향.
5) 겸손 : 낙스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담대하게 서서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이 겸손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담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 담대히 일어섰습니다.
설교 요청이 왔을 때에도 낙스는 소명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오기까지 설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는 것을 무서워하는 모습이며 그리스도의 말로 할 수 없는 부요를 선포하는 자세입니다. 결코 회심한 모든 사람들이 설교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식의 태도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름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일의 신성함을 그처럼 깊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면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완고한 개혁자, 영주들과 군주들과 맞싸웠던 사람, 모든 당국자들과 거세게 싸웠던 이 사람은, 자신의 일생 중 많은 부분을 영혼의 볼거리와 홍역을 상세하게 연구하는데 보냈습니다. 그는 언제나 시간을 내어 영혼들의 개인적인 문제와 양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친절하고 상세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의 장모인 보우스와의 편지 내용이나 앤 로크 부인과의 편지 내용들은 그가 아주 자애로은 심령을 가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해 줍니다. 그것은 그의 겸손의 또 다른 표증입니다. 결코 스스로 감독의 지위에 서지 않았고 끝까지 설교자로 있었다는 것은 그의 겸손을 보여 주는 표증일 뿐만 아니라 그의 본질적인 청교도 정신의 표증이기도 합니다.
1960 지식 - 참지식과 거짓 지식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8:1~31) 목회적 적용의 중요성 - 지성과 지식의 자랑이라는 위험
만일 청교도 연구 모임이 우리가 함께 생각해 온 것을 적용하는 일이 없이 끝난다면 이 지식이 오히려 우리에게 덫이 되어 영적 생활에 실질적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쟁했던 원인도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우상에게 드린 제물의 문제였지만 사도 바울은 지식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즉 그릇된 지식관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분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이 연구 모임을 마치면서 우리가 직면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을 대면하는 것이 좋습니다.
2) 그릇된 지식관의 원인
-일반적 원인
① 마귀는 우리가 믿음을 갖지 못하고 무지와 마음의 어둠 속에 머물러 있게 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또한 마귀는 우리를 혼자 노력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분주한 행동의 위험을 우리가 깨달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지식의 문제의 극단에 빠지도록 합니다. 우리는 가장 선한 것들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 영혼을 파멸시키려고 항상 노리는 마귀와 대치하고 있습니다.
② 설배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조금 알고도 모든 것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③ 설교를 방해하는 독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서하는 데만 시간을 들이고 설교의 능력을 맛보지 않는다면 매우 실제적인 위험이 야기될 것입니다. 설교가 참된 설교라는 조건일 때, 책을 읽을 때 맛보는 것과는 다른 진리의 권세 아래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격을 사용하셔서 설교자로 하여금 적용이 반드시 일어나도록 합니다. 반면에 독서는 적용에 대한 강제성이 없어서 언제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덮어버릴 수 있습니다.
-특별한 원인
① 진리와 지식에 대해 순전히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관심을 갖는 것, 즉 지식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을 하나의 과목으로 전락하는 것, 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교회의 위대한 인물들과 운동들의 역사를 연구할 때 역사적, 이론적 접근법의 위험, 신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따르는 위험
② 지적 차원으로만 진리에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지성만을 따로 떼어놓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순전히 지적인 차원에서만 진리에 관심을 가지므로 진리의 능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또 감정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상태처럼 그릇된 지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어떤 주제를 아는 것이 위험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서”아는 것이 위험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과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얼마나 다릅니까? 복음을 우회적으로 설교하고 복음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복음을 전혀 제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만 실제로는 전혀 모를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실제적인 문제는 청교도들과 그들의 저작들을 사고의 대체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스스로 연구하고 생각의 과정과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 문제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분석과 사상들을 그저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한 생각과 영혼의 고뇌 대신, 청교도들을 설교하고 그 사람들의 저작들을 사용하는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3) 그릇된 지식을 가진 상태에 대한 표와 증거
그러한 경우에는 항상 균형이 깨어져 있습니다. 그가 언제나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저 그러한 종류의 지식일 뿐 다른 것을 알지 못하고 지엽적인 것만 붙들고 있으므로 균형을 잃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야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을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제약이나 교정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특히 반대되는 입장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반대되는 입장은 존재할 권리도 없고 심지어 고려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그 거만한 자세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우월감을 갖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실보다 지식과 이해력을 떠벌리고 자랑했습니다. 또한 그러한 지식이 모습을 드러내는 또다른 방법은 배우기에 더딘 사람들이 우리에게 장애가 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릇된 지식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진리를 토론하는 데 시간을 보내며 지식만을 즐기는 것이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힘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혀 쓸모가 없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4) 가상적 지식의 무용성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사실은 어떤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마땅히 알 바를 알고 있다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죠지 휫필드는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책에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섭리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연합시키고 신자로 하여금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게 하는 성령님께 대한 것입니다. 만일 성경으로만 스스로 만족한다면 마귀는 교리만 말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에서 칼빈주의자로 넘어가고, 충분히 정통적이 되면서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삶을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는 성령님을 모시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지식은 마귀에게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참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광대함을 깨닫는 순간 사람이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지식의 광대함과 끝없음을 깨닫는 순간 자기는 난장이요 초심자에 불과하며, 큰 대양의 해변에서 물놀이라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의 존재의 영광과 위엄과 거룩이 영원무궁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지식임을 깨닫게 되면 자기 지식을 어떻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47p~50p
5) 참된 지식을 소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몇가지 시금석
① 참된 지식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놀라움과 사랑과 찬양 가운데 빠지게 될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② 지식이 산출하는 성품을 보면 그 지식이 참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③ 하나님을 만난 성경의 인물들은 겸손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들은 자기가 그곳에 있을 수 없는 부정한 자라고 느끼며, 어느 사람도 비판하는 위치에 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참지식은 반드시 겸손하게 하며 또 거룩하고 경건하게 합니다.
④ 참지식은 또한 이웃을 사랑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만일 이웃이 알미니안이면 어떻게 합니까? 은혜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머리, 즉 사고가 잘못되어 있더라도 참고 그를 도와주도록 애를 씁시다. 우리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 시간을 써서는 안 됩니다. 만일 자기가 옳고 다른 사람이 그르다고 믿는다면, 그를 사랑하고 용납하고 이해함으로써 그 사람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한 사랑하는 자세로 성경을 해석하여 그 사람의 머리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 참된 지식의 결과는 주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거룩한 열심을 가져야 하고, 그 결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는 온 세계가 하나님께 나오기를 바랄 것이고,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활동적인 설교자와 복음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크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성자께서 하늘에서 오신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영광에 관해 알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는 세상에 오셔서 그 일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6) 참된 지식을 얻는 방법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시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에게 한 말입니다. 내게는 해당되지 않습니까?” 자기 검증에 대한 더 좋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알았던 사람들의 일기를 읽어 보십시오. 또한 신학서적과 전기를 균형있게 읽으십시오. 신학 서적을 읽고 다른 사람에게 뽐낼만한 지식을 가졌다는 느낌이 들 때, 죠나단 에드워즈, 휫필드의 전기나 청교도들의 체험에 관한 책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그러한 사람들의 책을 읽고 금방 땅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어떤 이지적이고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정보를 많이 취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습니까? 스펄젼처럼 주님께 안기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 보셨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지식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
1961 요약-아는 것과 행하는 것
1) 삶에 적용하지 않고 이지적으로만 아는 것에 머무르는 위험
많은 면에서 우리가 만나는 가장 큰 위험은 영적인 일에 대한 이지적 지식과 이해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매우 귀중하지만 거기서 멈추어 버리면 전혀 소용도 없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해가 됩니다. 그러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삶에 적용을 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이유는 반작용의 위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적극적이어야 하지 어떤 것에 대한 반작용에 머무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반작용만 하고 멈춰 버리면 우리의 증거는 무력하고 효과를 상실해 버립니다.
성경 교리에 대한 이해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크게 불쌍히 여기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참된 열심히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우리는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그릇된지를 분명히 알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기도 생활은 어떠합니까? 기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칩니까?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의 진수인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진실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가능한가를 진실로 이해했다면 계속 나아가야 하고 이러한 일이 체험을 통해 살아있는 현실이 되기까지 안이하게 굴거나 쉬어서는 안 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문제에서 거짓된 기쁨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다소간 불행할 때에만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언제나 거짓을 경계하였으나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확실히 알았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되, 갈수록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자신의 체험의 차원에서 교리를 평가하고 판단하여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위험
휫필드의 일기에서 휫필드가 열을 쏟는 설교를 하는 중에 육신적으로 피곤하여 쉴 필요가 있어서 침대에 누웠는데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기 때문에 거의 잠들 수 없는 모습을 읽고는 “이것은 환각이다 이것은 지나치며 광신주의다”라고 말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러한 체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신약성경에 제시되고 약속된 것을 우리 체험의 차원으로 낮추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진실로” 기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나타나는 것,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불가항력적인 체험들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적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영적 인물을 비난하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신약성경으로 다시 돌아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가능하고 열려져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는 결국 기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리는 항상 믿음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계심을 알며 우리 가운에 계시는 성령님의 힘을 의식하는 그러한 지식, 그러한 친밀감, 그러한 깊은 체험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죽은 것처럼 들리고 단순한 문자로 들리던 말씀을 살아 있는 불꽃이 되게 하여, 그 불꽃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능력과 기름 부음을 하나님께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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