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비유와 하나님 나라
김택상
[각주]
들어가는 말
몰트만에 따르면 교회 공동체는 평화의 공동체이며 자유한 자들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1)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라면, 올바른 교회라면 바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나타내며 그리고 전파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이 땅에 실현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언제나 몸부림치면서 치열하게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 나라와 동떨어진 삶을 요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피안의 세계로만 이해하기를 강요한다. 또한 많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전파하는 것보다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친교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본 발제는 하나님 나라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시면서 전파하신 예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를 알아보고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나라가 어떠한 나라이고 무엇이 하나님 나라의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많은 비유를 다룰 수 없으므로 재산과 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흔히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비유', '최후의 심판의 비유'로 불리우는 세 개의 비유를 분석하여 이 비유들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며 이 비유들을 통해서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교회는 어떠한 공동체가 되어야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현재인 동시에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인 시간성에 대해 '소 계시록'이라고 불리우는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비유들을 분석하면서 이야기하고 필자의 생각을 서술해 보고자한다. 이를 위해서 본 발제문에서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본 후에 각각의 비유들을 분석하고 본 발제자의 의견을 덧붙이는 것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몸 말
1. 하나님 나라의 개념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의 두 가지 용어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구약의 (malkuth shamayim)의 동일한 헬라어 번역이다(2). 마태복음에서 유독 하늘나라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은 유대 기독교적 특성이 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경건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술을 하였기에(3) 이러한 완곡적인 표현이 사용된 것(4)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신다(5)는 것은 변함이 없다.
또한, 여기에서 나라라는 말은 헬라어의 와 히브리어의 (malkuth)로서 이 낱말은 통치, 다스림, 왕권, 왕국, 영토(영역)을 의미하는 말이다(6). 이러한 어원적인 이해에서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우선 통치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7).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물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동적이며 역동적이고 구속적인 통치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8) 이는 또한 Not Yet와 Already의 두 측면이 똑같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9)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10). 그러나 통치권만 있다면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일 수 없다(11).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통치뿐만 아니라 영역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12). 예수께서 주기도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구할 때(13) 그것의 의미는 통치를 의미하지만 통치가 추상적으로 이 땅에 임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반드시 그 결과로 형성된 질서의 세계가 나타나게 되며 이 세계가 바로 왕국이며 이 왕국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나라이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온 우주를 포함하므로 우주의 전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죽어서나 가는 피안의 세계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4).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 진 것은 아니고 앞으로 되어질 것이므로 Already와 Not yet의 두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 바탕으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의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인 근거에 기초를 두고있기 때문이다. 즉, 그 나라가 '임박했다'라든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는 말이 구약에 나타난 예언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15).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절대로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되었던 예언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예수는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인정하시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기초로 삼으신 것이다.(16) 예수의 산상설교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함 이로라."(17)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이나 선지자의 교훈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교훈이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명은 이것을 이루는데 있다는 것이다.(18)
2. 비유를 위한 전이해
비유를 살펴보기 이전에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비유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를 가진 의미의 독립왕국이 아니며(19)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그 때, 그 자리의 청중들에게 어떤 일을 선명하게 알게 하기 위하여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므로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 즉, 삶의 자리를 고려해서 비유를 해석하여야 하며 그것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처지에 있는, 어떠한 사람을 겨냥하여 쓰여진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20). 그런데 여기에서 이천년전의 역사적 상황 즉, 삶의 자리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그 자리, 그 청중을 백퍼센트 확실히 알기는 힘들다 할지라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 나타난 큰 줄기를 통해서 그 의도를 살핀다면 비유자체를 의미의 독립왕국으로 보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정확히 아니 거의 확실히 예수의 비유의 뜻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문제제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본다.
이러한 전이해를 가지고 예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야기되는지 비유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3. 예수의 비유 해석
1) 최후의 심판의 비유(마25:31-46)
먼저 '최후의 심판의 비유'라고 불리우는 비유를 살펴보자면 이 비유의 서두는 원시교회에 귀속되는 요소들과 예수의 진정한 말씀으로 간주되는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데 이는 마태에 의해서 예수의 본래의 말씀이 기독론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변형된 것이다(21).
이 비유는 성서의 맥락상으로만 보자면 '이 세상의 끝날 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22)는 제자의 물음에 이은 여러 비유중의 하나로 나타나므로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 때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비유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23)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이 내려질 것인가에 중점을 둔 이야기이며(24) 언제나,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심판이다(25). 이 심판에서 판단의 척도는 살아온 신앙(26) 즉,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다른 습관 때문에 두 무리를 목자가 갈라놓듯이(27) 심판자인 인자가 사람들을 심판할 때의 기준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느냐, 기독론적인 이해가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28) 얼마나 정의와 인간성과 자유를 창조하고 행사했느냐, 가장 보잘것 없는 자처럼 여겨지는 예수의 형제들과 어떤 관계를 가졌느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29).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 속에서, 국가주의, 진보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속에서 인간을 잊어버렸고 인간 속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이 전혀 계시지 않는 종교와 신학, 도그마 속에서 그 분을 찾고 있으며 그 분이 계시는 인간 속에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것 속에서는 찾지 않고, 경건 속에서 찾고 있으며 그의 나라의 의 속에서 찾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인자의 심판이 이 비유에서 이야기되고 있다(30).
이 비유에서 가장 작은 자들과의 예수의 자기동일시(31)는 통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판단을 180도 돌려놓는 것으로 종교적인 것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의 의가 오는 것이 아닌 인간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생각을(32), 고난 당하는 자들이 예수의 형제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예수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므로 그로 인해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다(33)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이 부르거나 찾는 것에 의해서가 아닌 그분의 의가 이루어지는 그 곳에 계시며 하나님 앞에서는 "그의 이름이 불려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가 실행되는가?" 만이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종교를 초월하여 계신다(34).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의가 실현되는 곳에 계시지 단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계시지 않으며 심판의 판단의 기준은 종교적인 경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를 통해 인간을 만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인간성과 자유를 창조하고 행사하였느냐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2)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눅16:19-31)
두 번째로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라 불리우는 비유를 살펴보자. 이 비유를 흔히 현존하는 사회적 상태를 합리화하려는 '민중의 아편'적인 이야기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이는 비유를 이해하는 전이해가 없는 상태에서의 해석이며 피안을 이야기한다는 견해도 잘못된 것이다(35).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기 위해 예레미아스는 이 비유를 '육형제의 비유'라 부를 것을 주장한다(36). 이 이야기는 내세에서의 운명의 역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신인을 부자로 상정하고 부자들에게 닥치게 될 비극적인 운명을 경고하고 있는 비유(37)라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엄청난 재력과 최고의 사치를 누리고 있는 부자가 가난한 나자로에게 부스러기조차도 건네주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나자로가 부스러기로라도 배불리 먹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를 채울 수 없었다(38).이러한 부자의 죄악으로 인해 운명이 역전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벌을 받은 자요 부자는 축복 받은 자 라는 생각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린다(39).
라가츠에 의하면 이 비유의 비교 점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큰 구렁(예레미아스는 큰 구렁을 라가츠와는 달리 지옥과 천국으로 심판이 내려진 하나님의 결정의 불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며, 인간의 역사가 한 쪽에서는 차고 넘치고 한쪽에서는 궁핍한 이 분열과 구렁에 의해 심판이 생겨나서 사회와 문명이 파괴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분열과 구렁이 생겨나지 않기를 원했으므로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으며 성서에서는 이러한 구렁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극복된 실례가 기적으로 일어났다(40).(행 2:43-46) 그리고 비유 속의 피안은 땅에서 일어나는 혁명을 통한 완전한 상황의 역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이는 힘센 자, 큰 자의 멸망을 가져오는 약한 자와 눌린 자를 위한 공의와 심판의 날을, 그러한 혁명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41).
이 비유는 이러한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부자들에게 그것을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42). 단지 부자이거나 가난하기 때문에 지옥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정해진다는 것을 이 비유의 둘째 부분(아브라함과 부자의 대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데 부자들이 그냥 제 갈길 대로만 간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 비유의 부자처럼 될 것이며 구약성서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으며 구약의 경고에 귀기울이지 않는 자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며, 회개하지 않음에 대한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43).
3)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3-21)
세 번째 비유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 불리는 것으로 주제를 잘 부각시키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44). 그러나 제목이 주제를 잘 부각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석가들이 14절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는 단지 영혼에만 관심 하셨으며 소유를 공격 하시지도 않았고 탐심만을 경고하셨다고 주장한다(45). 그러나 이는 예수가 재판관이 되기를 거부한 것과 비유가 독립된 전승이며 이 두 개의 이야기가 후대에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 그리고 유대의 재산 관리의 관습(46)을 모르거나 간과한 해석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47).
이 대답에서 가장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예수는 탐심과 소유욕을 거부하시고 배척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삶의 안정을 위해서, 권세와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서 갈구하는 소유욕이 선의 본질인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것 자체를 거부하신 것이다. 바로 이 소유욕에 의해서 인간의 곳간은 작아지게 되었고 부자의 현관에는 나자로가 누워 있으며 구렁 저 편의 빈곤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평안히 쉬며 향락을 추구하려는 부자에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심판의 멧세지를 던지시는 것이다. 성서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것으로만 정당성이 있으며 관리의 책임만을 인간은 가진 것이다(48).
그리고 이 비유에서 재물에 대한 소유욕이 아무 소용이 없음은 바로 재물의 무효용성, 악마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재물이 인간의 삶의 질을 참된 것으로 변화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49) 오히려 자기자신만을 위하여 쌓아올린 재물로 인하여 자신을 이웃과 단절시키고 더불어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악마성까지 가짐으로 인하여 올바른 의미의 참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배제된 삶은 아무리 풍족하여도 헛된 것이며 어리석은 삶일 수밖에 없으며 이기적으로 쌓아 올린 재물은 인간을 단절시켜 그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참된 의미의 즐거운 삶과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이 비유는 말하고 있다(50).
4)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13:1-9)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농부의 파종에 관하여 특별히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듣는 청중들은 실제로 들판에서 밀이나 보리를 파종하고 있는 농부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나 무리들은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거나 직접 경험을 했을 것이다(51).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이다(52).
이 비유에서 예수는 팔레스타인의 파종법을 배경으로 하여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기억하여야 할 것은 팔레스타인의 파종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파종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농부가 밭을 일구기 전에 씨앗을 먼저 뿌리고 그 다음에 밭을 간 뒤 추수를 한다(53). 그리고 농부가 씨를 뿌릴 때 갈지 않은 밭에 씨를 뿌리므로 농부가 뿌린 씨앗은 길가, 흙이 얇은 돌밭, 가시떨기 위, 좋은 땅 등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추수 때가 되면 30배,60배,100배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농부는 수확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씨를 뿌린다(54). 예수님은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농경법을 배경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예수의 삶의 자리에서 볼 때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요점은 예수자신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한 변증이다(55). 마태복음 11-12장에서 유대군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그리고 예수의 대적자들(막3:6)과 예수로부터 떠나는 자들(요6:66)로 인해 예수의 사역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예수는 이러한 상황에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사역이 사람의 눈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56). 즉, 어렵고 힘든 실패의 순간에도 추수의 순간을 믿는 큰 확신(57)을 지닌 농부의 마음을 통해 결국에는 오고야 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실패와 성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성공이 실패를 압도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으며 이는 실패한 경우에 뿌려진 씨는 단수인데 반해 성공한 경우에 뿌려진 씨는 복수로 표현되어 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58). 그리고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지금은 실패와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고 있지만 이 부분적인 성공이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곡식처럼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5) 가라지의 비유(13:24-30)
가라지를 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 히브리어로는 zoun, 아람어로는 zouna 혹은 zanah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이다. 이 단어의 뜻은 '간음하다', '연애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헬라어에서는 를 번역한 말인데, 이것은 밀과 흡사한 털이 있는 독보리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라틴어에서는 lolium temnlentum이라 번역한다(59).
가라지의 특성을 살펴보자면 길이는 60cm정도이고, 풀 같으며 검은 이삭을 낸다. 씨앗의 크기는 밀 이삭보다 조금 작다. 그리고 밀과 흡사할뿐더러 뿌리가 사방으로 넓게 퍼져있기 때문에 뽑을 때 밀이 다치기 쉽다(60). 또한 가라지를 먹었을 경우 역겨움과 경련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심하면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다(61). 팔레스타인에서는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며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예수는 이 비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삶의 자리에서 볼 때 가라지의 비유는 청중들에게 아직 심판의 날이 오지 않았으므로 인내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62). 당시의 열심당원의 경우 당장에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려고 했으며, 바리새인들은 죄인을 구별하는데 집착하여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죄인들을 심판하지 않고 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했으며,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도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태워버리자고 요청한 요한과 야고보가 있었다(63).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청중들에게 심판의 날은 오고 있지만 지금은 심판의 날이 아니므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것은 마지막 때, 추수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한다(64). 이것이 이 비유의 요점이며 이 비유의 해석이 후대에 삽입되었다(65) 할 지라도 결국 종말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비유에서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두라는 것은 가라지를 뽑아서 버리는 일이 불필요한 것이어서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가라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가라지에 대한 애정보다는 밀이 다칠까 두려워하는 밀에 대한 애정 때문이며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던지는 메시지는 심판의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가라지로 판명 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와 위협인 것이다(66).
6) 겨자씨의 비유(13:31-32)
겨자씨를 언어학적으로 볼 때 히브리어로는 chardal, 아람어로는 chardel이다. 유대교의 문서 미쉬나(Mishna)에 따르면 겨자씨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보통의 것과 애굽에서 온 종류이다. 그 중에서 특히 애굽종류는 라파네( )라고 하는데 작아도 자기의 개성을 강하게 지키는 것으로 다른 것과는 서로 혼종되지 않는다(67). 이는 다른 것과는 결코 같거나 섞일 수 없는 하나님 나라 운동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예수 당시에 겨자씨는 집집마다의 정원이나 밭 가장자리에 흔히 심어지는 식물이었다. 그리고 겨자씨는 씨의 크기에 비해 엄청나게 크게 자라난다. 그리고 자라난 겨자씨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날아와 검은 빛나는 작은 겨자씨를 즐겨 먹기 때문에 많은 새들이 모여든다(68).
예수가 이 비유를 말할 때에는 예수의 사역을 많은 사람이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던 시기였다(69).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하나님 나라는 세계의 열방이 모두 피난할 거대한 나무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와 소수의 제자들로 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질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작은 겨자씨에서 큰 가지가 생겨나는 것 같이 참으로 확실하게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구원의 때에 모든 민족을 다 포용하는 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고 가르친다(70). 이 비유의 요점은 언젠가 큰 나무가 될 하나님 나라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형태(겨자씨,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로 이미 세상에 현존하고 있다는 진리이다.
겨자씨의 비유는 대조와 성장이 강조되고 있는 비유이다(71).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미미한 시작과 커다란 결말 사이의 대조에서 이 비유의 강조점을 찾는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가장 큰 나무가 되는 가장 작은 씨이다. 그리고 이 씨앗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옴으로서 관심이 집중된다. 마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다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새가 깃들만큼 다 자란 큰 나무는 마태에게 있어서 자기시대에 크게 성장한 교회와 비교 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례요한, 예수,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선포되어진 하나님 나라는 작고 보잘 것 없이 시작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이방인까지 몰려드는 큰 결과로 성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72).
4. 결론 - 비유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나라
먼저 재산과 부에 대한 세 가지 비유들 중 첫 번째 비유인 최후의 심판의 비유에서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 자기주변의 가장 작은 자에게 어떻게 대접하였는가에 따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다른 이들을 소중히 여겼는가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받게된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는 항상 주변을 돌아보면서 주위의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도우며 살아가기를 권하고 있으며 두 번째 비유인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는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분열의 구렁을 극복하라는 것이며 세 번째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사람이 가진 재물의 유(有),무(無), 다(多),소(小)에 따라 인간의 삶의 내용은 변하지 않으므로 재물에 집착하여 이웃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기보다는 이웃과 함께 잘 살아가는 삶을 택하라는 것이다.
이상의 세 비유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재산의 많은 정도에 따라 등급이 지워지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르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을 위해 재산을 쌓아두거나 자신만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죄악시되고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 비유들에서는 인간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의 관리자일 뿐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재물을 써야하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주변의 모든 이웃들의 자유와 인간성의 실현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여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실패하더라도 종국에는 커다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니 실패와 고난에도 아랑곳하지 말고 큰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것이며,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혼재된 특성과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순수하고 화려한 완성 즉, 종말 때에 심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다는 것과 그 심판에서 가라지로 판명 나지 않도록 행동하라는 것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성장과 발전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에는 보잘 것 없으나 나중에는 심히 커진다는(욥 2:1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73).)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개요들을 통해 볼 때 마13의 비유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관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한마디로 "현재적이다.", "미래적이다." 라고만 말할 수 없다.
13장의 비유들은 그 내용상으로 볼 때 서로 반대되는 개념들을 대조시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대조는 비유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각 비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대조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함께 심판 혹은 완전성장 등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관한 것이다. 비록 비유들에 현재적 하나님 나라나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존재방법, 형태, 혹은 그시기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서로 대조를 이루는 현재와 미래가 서로 분리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암시해 준다(74).예레미아스는 이 비유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과정 속에 있는 종말(75)"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시기는 현재 이 곳이라는 점이 하나님 나라의 근본적인 메시지이지만(76) 이것이 전체적 의미가 아니며 완성의 때를 가리키는 미래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이 현재의 성취와 미래의 완성은 현재가 미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라는 관계에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전자는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비유에 나타나는 현재적인 요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한다. 후자는 슈바이쳐의 "철저한 종말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비유의 미래적인 요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3장의 비유들이 특정한 하나의 시간적 배경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특히 겨자씨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실재로서 미래의 완성'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3장의 비유들을 살펴볼 때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시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으며 가라지의 비유는 하나님의 심판은 최종적 도래인 마지막의 때에 있다는 것이며 겨자씨의 비유는 현재의 세상 안에서의 활동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더욱 충실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나타나는 시간성 문제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실재로서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통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현재의 진행과정 속에 있는 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나가는 말
이상으로 간단하게나마 예수의 비유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가를 잠시 살펴보았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사도로서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 하고 그냥 인식하거나 다른 이에게 말로만 전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가라지'로 판명 받을 것이며 마25장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 나타나는 입으로만 '주여'라고 외치는, 주님이 외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본다면 자신들의 교재에만 대부분의 예산을 배정하고 있는 현재의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친목단체의 모습이라고 밖에 이야기 할 수 없으며 교회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려면 선교와 구제에 거의 모든 예산이 배정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장의 전주 안디옥 교회에서 어느 정도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선교와 구제에 많은 예산을 배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예산이 제대로 쓰여지도록 지켜보아서 일회성사업이나 이벤트성 행사로 치우치기보다는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수 있는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곳에 쓰여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조차 부자는 존중되고 가난한자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현실이 예수님 당시의 율법주의자의 모습은 아닌가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교회의 현실들로 인해 그 날에 우리가 '염소'로 '가라지'로 판명 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이제 알게된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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