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대안
요 6:10-15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
천명이나 되었더라.
여러분, 만화를 좋아하십니까. 만화는 아이들이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른들도 이 만화를 참 좋아 합니다. 그래서 성인만화방도 있습니다. 만화를 읽을 때 보면 황당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무기를 들고 밤하늘을 맘대로 날다가 적들에게 떨어뜨려 적을 무찌르고 차 한 대에 별 기능이 다 있어서 요술 부리듯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비행접시를 타고 우주공간을 맘대로 날아다니는 내용들이 있는데 그래서 만화의 세계에서는 상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만화는 그렇게 황당해야 합니다. 공상의 세계의 이야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꿈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면 만화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 만화의 내용들이 실제로 현실로 만들어지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주비행의 기초도 만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컴퓨터 전쟁도 만화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만화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황당한 것 같은데 그것이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만화를 열심히 보십시오. 읽으면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지고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하나의 가능성의 길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바로 이것이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날도 들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성인 남자 수만 5천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루 종일 굶주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유명한 5병 2어로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만 읽으면 참 신이 납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이 시대에 하나의 대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할 때 꼭 거짓말 같은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5병 2어의 사건은 사복음서가 동일하게 모두 증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확실한 대안입니까. 5천여 명이 모두 배고픔에 지쳐있을 때 예수님은 예수님의 방법으로 그 사람들을 먹이시고 남겼습니다. 그날 그곳의 풍성한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흐뭇해지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까. 그리고 그날 사람들이 얼마나 만족해하였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날 그곳에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왜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이유가 있었겠다고 생각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날 사람들이 그렇게 굶어가면서도 많이 모인 이유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말씀이 아니고 생명의 말씀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교훈과 말씀이 다른 율법사나 랍비의 가르침과 달랐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고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었다고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배가 고픈데도 그래서 광야까지 사람들이 따라와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이 말씀이 없어서 굶주림이 있고 길 잃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말씀이 여기 계시매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그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고 세상을 지으신 말씀이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가슴에 박힐 때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쇄신이 일어나고 개혁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말씀이 없기 때문에 기갈이 나타나고 갈증이 나타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가슴속에 이 생명의 말씀, 변화시키는 말씀이 존재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살아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나를 도려내고 쪼개고 긁어내는데 누군들 그 앞에서 잠잠히 있겠습니까.
1700년대 영국에 노예상선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붙잡아서 노예로 팔아먹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운영하는 배였습니다.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먹는 배의 선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막대하게 벌어들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노예는 짐승처럼 생각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뉴턴이 우연하게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볼 때 그것이 우연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때 뉴턴이 성경을 읽다가 문득 자기 자신이 죄의 노예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성경말씀을 읽는 순간 성령께서 가만히 계셨겠습니까. 그가 말씀을 읽는 동안 성령께서 감화하셔서 순간적으로 그 마음에 죄를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엄청난 큰 죄를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셨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고 노예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합리화해서 노예를 팔아 돈을 벌어들인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을 손에 드는 순간 성령이 가만히 두셨겠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 순간 가슴에 비수가 꽂히듯 큰 아픔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뉴턴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죄의 노예 됨을 깨닫고 예수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을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용서함을 받고 영혼의 자유 해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예장사를 청산하고 그때의 감격을 시로 옮긴 것이 오늘 우리들이 잘 부르는 찬송 405장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입니다. 그를 그렇게 완전하게 변화시킨 것은 돈도 아니고 힘도 아니고 누구도 아닌 성령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알고 깨닫고 보니까 이런 힘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만 읽어도 이렇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가슴이 뜨겁게 되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셨으니 얼마나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굶주려가면서도 광야로 광야로 몰려나와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말씀을 듣고 따라다녔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깨달음도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듣기를 싫어합니다. 귀를 막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길을 잃고 방법을 잊고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보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항상 기적이 동반했습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려 왔지만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 기적들을 보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 마다 살아 움직이는 말씀을 들려 주셨고 동시에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눈먼 사람들이 눈을 떴습니다. 육신의 눈도 뜨고 동시에 영적인 눈도 떴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또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누구도 고칠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셔서 가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 분이야 말로 메시야“라고 말했습니다. 또 귀신을 내쫒으시고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영적 포로자인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사람에게서 나온 귀신도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그때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이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니고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을 먹이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공개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사람들 중에는 물론 심심풀이를 위해서 따라 다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가 기적들 속에 들어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피곤해도 여전히 예수를 따라 다니며 주시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시대의 길을 제시받았습니다. 희망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 기적들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건들을 통해서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보고 알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는 것을 보면서, 귀신들린 사람이 자유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 재해들,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시대에도 하나님은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그 시대에 하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 나무처럼 된다”고. 기적이 보일 때마다 그곳에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 중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보려고 쫒아 다녔습니다. 신앙 안에서는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봄으로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배부름 얻음”
그렇게 예수님을 쫓아다닌 사람들은 마침내 배부름을 얻게 됩니다. 그들이 얻은 배부름은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배부름”입니다. 그들은 모두 굶주렸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모두 굶주렸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광야입니다. 그곳은 먹을 방법이 없는 곳입니다. 돈이 있어도 음식을 사 먹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5병 2어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또 남기셨습니다. 예수께 오면 누구든지 굶주리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 육신적인 배고픔을 극복했습니다.
두 번째는 “정신적인 배부름”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당한 굶주림 상태였습니다. 나라 없는 서러움, 미래를 잃고 살아가는 정신적 아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 이방인으로부터 압제를 받고 살아가는 현실의 아픔이 그들을 모두 뭔가 굶주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초능력의 모습은 그들의 짓눌린 자존심 회복과 정신적 배고픔을 충족시키는데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얼마나 희망이 솟아났을 것이며 기다리던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배고프고 삭막한 땅 광야에 까지 굶주리면서도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적 배부름”입니다. 그날 사람들은 또 말씀을 통해서 배를 불렸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율법사들로부터 형식적인 가르침을 받았고 제사장들로부터 위선적인 가르침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굶주렸던 그들은 마침내 예수께로부터 진정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영생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죄 사함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지금까지 듣지 못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배가 고프다고 그냥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예수께 찾아가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육신의 배가 고파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심심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에게 오직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주어져야 내가 살고 내 영혼이 살기 때문에 예수께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배고픔의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의 배고픔이 강합니다. 갈증도 심합니다. 이성의 갈증도 심합니다. 문화의 갈증도 심합니다. 영적인 갈증은 더욱 심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빈 공간을 채우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요술 램프인 알라딘을 주었습니다. 속에서 작은 거인이 나타나더니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소원 한 가지만 말씀하십시오. 그럽니다. 얼마나 이때를 기다렸습니까. 이 남자가 돈도 필요하고 예쁜 여자도 있어야 하겠고 빨리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돈 여자 결혼을 달라” 그래서 마침내 이 남자가 소원이 이루어져서 “돈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 가지만 구하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욕구가 너무 심합니다. 그만큼 마음에 욕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날 광야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배고픔을 채웠습니다. 육신의 갈증도 해갈했고 정신적인 갈증도 해갈하였고 또 영적인 갈증도 해갈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에 모인 것입니다.
“그날 사람들은 오직 주님이 대안임을 발견함”
당시 사람들은 그 시대를 위해서 대안을 절박하게 찾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민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존심도 상하고 주어진 현실과 미래가 너무나 암담해서 그들은 이 현실을 타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께서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권능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예수께서 그들의 굶주림을 제대로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육신의 배를 채워 주었습니다. 영적인 배도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그 시대에 정신의 굶주림을 채워 주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압제받는 정신적 아픔, 미래를 잃고 방황 대던 정신적 배고픔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시대의 대안은 오직 예수”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니까 그날 사람들은 굶주려 가면서도 광야로 광야로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는 어느 시대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시대에도 주님은 “길이었고 진리였고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되니까 생명 되시고 길 되신 예수를 부정하고 배반하고 죽여서 스스로 굴러온 꿈을 버리고 길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예수님은 길 되시고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시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를 포기하고 불신하고 외면합니다. 오늘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는 것만 아니고 그를 또 죽이고 있습니다. 그를 모르는 체 하는 것이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를 고집스럽게 부정하는 것도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를 배반하는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그 옛날에도 있었지만 오늘도 있습니다. 그 예수를 죽이는 사람이 바로 오늘 나 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고 우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시대나 오늘이나 유일한 대안은 예수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싫어하고 외면하고 부정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길을 잃고 생명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오늘도 미래에도 여전히 오직 대안은 예수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그를 보내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믿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를 믿고 잃어버린 길을 되찾고 진리를 되찾고 생명을 되찾으라고 말입니다. 그 예수가 여러분 삶속에, 생명 속에 충만하게 계셔서 안내하시고 인도하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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