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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한 자! (고후 4:7-15)

by 【고동엽】 2022. 1. 11.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한 자! (고후 4:7-15)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 새벽예배 때, 탈북 청소년을 위한 학교인 하늘꿈 학교 손금주 자매가 간증한 후에 기도하지고 하면서 남한의 청년들이 술취함과 방탕한 문화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북한에 살다고 남한에 오니 그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이고 무책임한 일이고 더러운 죄악인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북한에만 살다가 와도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보인다면 부활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나면 어떻겠습니까? 돈 주면서 술 마시고 방탕하게 살라고 해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북한 김정은 정권이 하는 행태를 보면 마귀가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마지막 발악을 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북한 정권이 마지막 때에 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이 악해지는 것을 볼수록 주님의 나라도 다가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2,000년 전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실이며 엄청난 일입니다. 인류 역사상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여 영원히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신화이거나 1%라도 거짓이 포함되어 있다면 기독교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도 부활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14절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지만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부활의 믿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무엇인가가 더해져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도 한동안 무기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이 두려워 숨어 지냈고, 여전히 믿지 못하는 이도 있었고,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믿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유혹이나 시험거리에 무너지고 맙니다. 이것은 부활의 믿음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8-9절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부활의 예수님이 마음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정도 제자들과 지내셨는데, 제자들에게 “뭐하고 있어, 빨리 나가서 나의 부활을 전해야지.”하고 몰아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 1:4 ...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그러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행 1:8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후 4: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보물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고 질그릇은 우리 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회개가 터지고 찬송이 터지고 영생이 믿어지고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저 2,000년 전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기념하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분이 계십니까? 부활의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시기를 기도해 보십시오.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은 다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실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셨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다 부활의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인가 답답한 것은 왜 일까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산다는 신앙 고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10-11절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이 고백, 이 믿음이 부활 신앙의 비밀인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떻게 죽음도 두렵지 않고 평안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롬 6:6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백하십니까?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고백합니까?

사도 바울은 믿으면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3절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이 말은 고백하지 않으면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기에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을 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까?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꺽어본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의 생명과 능력이 되십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사도행전 19장에서 악귀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악귀가 예수님을 안다고 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왜 그렇게 꼼짝하지 못한 것일까요? 사람이 어떻게 악귀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악귀가 사도 바울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 고백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입니다.

악귀는 바울을 보면 예수님을 본 것 같기에 꼼짝을 못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으면 자신의 믿음이 분명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여도 우리 믿음은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베드로는 온갖 기적을 다 경험하였지만 죽음의 두려움에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것은 기적도 능력도 체험도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고 고백함으로 부활의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젊은 시절 꿈은 훗날 야구 선수가 되어 메이저리그 스타디움에서 만루 홈런을 때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잡하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인생을 바칠 때, 야구 선수의 꿈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빌리그래함 목사님을 야구 스타디움에 세워 주셨습니다. 미국 어느 도시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는데, 밀려드는 인파를 강당에서 다 소화할 수 없어 주최 측에서 집회장을 야구장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 야구장에 마련된 강단에 설 때,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뇌리에 소년 시절의 꿈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비록 야구 방망이를 들고 서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영광스러운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채 성경을 들고 강단에 선 순간. 관중석을 꽉 메운 팬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파킨슨병을 앓으며 죽음을 앞 둔 93세에 [새로운 도전] Nearing Home 이란 책을 썼습니다.

나이드는 것을 느끼는 모든 분들과 청년들에게도 강력 추천하고 싶습니다.

“끔찍한 노년. 과연 그렇다. 얼마 전부터 늙으면 나타난다는 질병이 하나둘씩 내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부르실 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기다려진다. 하늘에 쌓인 상급은 둘째 치고 지금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심신의 짐을 어서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늘 집에 갈 날이 기다려지는 또 다른 이유는 64년 가까이 내 곁을 지켜준 사랑하는 아내 루스(Ruth)와 상봉할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 아내는 그토록 사랑하고 충실히 섬겼던 주님의 곁으로 떠나갔다. 아내의 눈물과 고통이 마침내 끝난 것은 기쁘지만 아내가 떠나가던 날 내 존재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아내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다. 그렇다. 끔찍한 노년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성경은 노년을 미화하지는 않되 이를 갈며 죽지 못해 사는 끔찍한 시기로 여기지도 않는다. 성경에서 그리는 노년은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까지 무익하고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억지로 사는 세월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붙잡아두시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작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셨을 것이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어떻게 해야 점점 약해져만 가는 육신의 한계를 이길 뿐 아니라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수많은 증인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과 모세, 여호수아 갈렙 등 수많은 증인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노년을 잘사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젊어서부터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햇습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노후 대책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사람, 일어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듯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익숙해지면 늙어서도 놀라운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때 어디서 살까 걱정합니다. 그 집을 마련하려고 평생 개미처럼 일합니다. 죽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어느 부자는 자신의 묘자리를 수 억원을 들여서 마련하였다고 만족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식이 교회 나가니 죽으면 누가 귀신이 된 자기를 위해서 제사상을 차려 줄까 탄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귀신이 되어서 밥 굶을 걱정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남기셨습니다.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라! 는 명령을 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광경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완벽한 노후 대책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생 최대의 승리는 죽을 때 옵니다. 죽음을 상대로 한 승리보다 더 위대한 승리가 또 있을까요?

이 시간 부활의 믿음을 가진 한 분을 소개합니다. [이선호집사] 간증.

베드로에게 물어 봅시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당신이, 어떻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물어 봅시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당신이, 어떻게 예수 때문에 순교하는 자가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도마에게 물어 봅시다. “당신은 그렇게 의심이 많았는데, 어떻게 충성스런 종이 되었으며,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한 자들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오신 부활의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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