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1-14절
'삼십에 입지(立志)'라는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 나이 서른이 되면 자기 생에 대하여 그 어떤 뜻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자기의 일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적어도 나이 서른 즈음에는 어떤 확신이 서야만 그 생애를 값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를 하필이면 '서른 살'로 잡은 것은 아마도 그 당시는 보통 한 육십 세 정도까지밖에 살지 못하던 시대였으므로 그런 결정이 적어도 인생의 반이 지나가기 전에는 세워져야만 그 뜻을 따라 나머지 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구원역사에 크게 쓰임 받았던 모세 역시 그 같은 결단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의 나이 80세 되던 때, 그의 120년 인생의 삼분지 이를 막 지나고 있던 때였으므로 결코 빨랐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생후 첫 40년은 모친 품에서 또 바로의 궁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겠다고 '입지'는 했지만 그 방법이 서툴렀습니다.
애굽 사람 하나 몰래 죽이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 결과 그는 오히려 바로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피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모세는 그의 두 번째 40년, 즉 그의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만한 때를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허송세월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해보겠다고 세웠던 그 귀한 뜻은 점점 더 잊혀갔고 그러다 보니 벌써 인생의 노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렇게 인생을 마치도록 버려두지는 않으셨습니다.
그의 나이 팔십이 다 되었을 때, 뜻을 세우고 어쩌고 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뜻을 세운다 하더라도 이제는 아무 남아 있는 힘도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과 그 소명하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사명으로 인하여 모세는 나이 팔십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그의 인생을 펼쳐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저 늙어 죽을 일만 남았다고 여겨졌던 모세를 그처럼 생생하게 일으키고 그로 하여금 남은 인생을 오히려 영적인 전성시대로 살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본문에 의지하여, 우리의 남은 인생을 지금부터라도 본격적인 영적 전성기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될 때 새 인생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calling)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분을 만나 뵙게 되는 체험입니다.
모세의 '입지' 역시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1절로 6절의 말씀에 "1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라고 기록했습니다.
미디안의 처갓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하루하루를 지극히 평범하게 보내고 있던 모세를 불러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기회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이었는데 이것은 '시내산'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하나님의 산"이란 수식어가 첨가된 이유는,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한 후 다시 이 산에 돌아와서 바로 여기서 십계명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호렙산의 어느 한 "떨기나무" 있는 자리를 모세를 부르는 자리로 정하셨습니다.
떨기나무는 시내산 부근에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지만, 그 나무에 불을 붙이시고 타지는 않게 하심으로써 모세의 호기심을 자극시키셨던 것입니다.
자연히 모세는 그 신기한 장면을 자세히 보려고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오게 되었는데, 바로 그 떨기나무 사이에 "여호와의 사자"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4절과 5절에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가리켜 "여호와" 또는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을 보아서, 이는 바로 제2위 성자이심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분은 바로 성자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제일 먼저 자각해야 할 바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은 악하고 더러운 존재이나 하나님은 선하고 거룩하신 존재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곧 자기의 신을 벗어야만 했었습니다.
신이란 사람이 돌아다니면 점점 더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무슨 일을 행할 때마다 점점 더 죄가 쌓이게 되고 그로 인하여 인생 전체가 오직 더 더러워지는 가운데서만 살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모세가 그 신을 벗는다는 것은,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더러움을 벗어버리는 자세가 필요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의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고 그 음성을 듣게 되는 장면에 있어서 모세는 그 무엇보다도 이 점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6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 뵈옵기를 두려워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금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고 있다는 사실, 그 앞에서 자기 더러움의 상징인 신을 벗기는 했지만 따져 본다면 그 정도만 가지고서는 감히 설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부름 받고 서 있다는 그 자체만 생각해도 모세는 두렵기 그지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뿐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게 되면 그 첫 순간에 바로 이 점을 반드시 깨닫고 절실히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뵙게 된 첫 순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만나 뵈었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절로 튀어나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기 전에는 자신이 그렇게 더러운지를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았었습니다.
날마다 죄를 지어도, 날마다 신에 때를 더 많이 묻히게 되어도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심각하고 더러운 것인 줄을 모르고 무심히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신고 다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거룩한 땅을 밟게 되면,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 뵈옵게 되면 자연히 그 순도 100퍼센트의 거룩하심 앞에서 반영되는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한 순간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뵙기 전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극단적인 거룩함과 그 극단적인 더러움이 한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당연히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오히려 붙잡아 주십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신을 벗기시고,' 우리의 '부정한 입술을 제단 숯불로 정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도록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성도는 바로 그 같은 감격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는 그 어디나 다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니,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그 심령에 모시게 되는 순간마다 바로 그 같은 감격을 누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악한 죄인인 내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소명을 받고 서게 되었다는 이 감격스러운 체험이 있을 때, 성도의 생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매년 각 대학교 수석 졸업생들이 그 부모와 함께 대통령의 초청을 받는 자리가 있는 모양인데, 제 어머니께서도 제 여동생이 수석 졸업하는 바람에 청와대를 다녀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기념품으로 '청와대'라는 세 글자가 문자판에 찍혀 있는 손목시계를 하나 받았는데, 이게 나중에 상당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외국 다녀오시면서 공항 세관을 통과할 때 세관원에게 그 시계를 흘낏 보여주기만 해도 짐 검사도 없이 그냥 통과시켜주었던 것입니다.
딸 덕에 대통령 얼굴 잠깐 만난 사람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대통령과 어떤 특별한 연분을 가지게 되고 언제든지 청와대로 전화 한 통만 하면 대통령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아니, 세상의 대통령을 만난 사람도 그 입지가 그렇게 달라지는 것이라면, 하물며 저 위대하신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로'와만 상대해야 하고 '미디안 족속'들 중에서 섞여 살 수밖에 없는 신세, 그저 같은 죄인들끼리 유유상종할 수밖에 없었던 속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단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을 상대하고 살게 됩니다.
그 인생의 차원이 다르고 그 존재의 입지가 당장 격상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면서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그 앞에 서게 되고, 죄인에 불과한데도 당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양자로 삼아주시는 이 은총을 입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참된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위한 새로운 뜻을 세울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 될 때 인생의 바른 목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일단 소명, 즉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 다음에 사명(mission), 즉 자기 생에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만 할 것이며, 이 점에 대하여는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7절로 10절의 말씀에 "7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9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7절부터 9절까지에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내려와서 내가 건져내고 내가 인도해 들이겠다"는 말씀을 반복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구원 사역을 순전히 "내가" 즉 하나님 자신께서 하신다고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 제일 끝 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너를 보내어 너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결론짓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오로지 하나님 당신께 속한, 순전한 하나님의 일이었는데 바로 그것을 이제부터는 모세를 통하여 이루게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이런 일에는 전혀 상관없이 팔십 년의 세월을 보내어 왔습니다.
그는 순전히 자기 먹고 살고 자기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양치는 일 이것 한 가지만 알고 그것만 하면서 그의 청장년기 40년의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보내어왔던 것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제 전혀 다른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는 자기 민족 전체를 구원해내는 엄청난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남은 모든 생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수행해야 하는지도 또한 가르쳐주셨습니다.
본문 11절로 14절에 "11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시는 사명을 받고 기가 찼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처럼 엄청난 일을 해낼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누구관대" 즉 '나같이 이미 나이 늙고 힘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누가 나 같은 사람 말을 듣고 따라주겠느냐'고 하나님께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스스로 계신 자가 너를 보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스스로 계신 자'란 말은 바로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의 이름 뜻을 풀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스스로 계신 자" - 아무리 다시 보아도 너무나도 멋있는 이름입니다.
'당신의 존재를 다른 그 어떤 존재에도 의존하지 아니하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 원인은 오직 하나님 당신에게만 있는 것이지, 사람이 신의 존재를 인정해주어서, 사람이 신의 형상을 만들어주어서, 사람이 과학적인 연구로 증명해주어서 존재하게 된 신이 결코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계신 자" - 어떤 존재자를 나타내는 표현 중에 이보다 더 완벽하고도 멋진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이름을 이처럼 당당한 자기계시로써 선포하실 수 있는 것만 보아도 우리의 하나님이야말로 유일하신 참 신이심이 더더욱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위대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 바로 이것을 깨닫게 될 때 모세는 더 이상 '내가 누구관대'라는 약한 마음을 품을 필요가 전혀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은 그 사명을 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본인의 지위가 결정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기 전에는 애굽의 바로 앞에서 도망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계신 자' 이 지극히 높으신 절대자의 보냄을 받은 후부터 이 모세는 당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바로보다 훨씬 더 윗자리에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을 한 번 만나기만 해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만, 대통령을 만났을 뿐 아니라 그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직무를 받게 된 사람은 그냥 만나서 인사 한 번 하고 돌아온 사람과는 완전히 한 차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장을 받고 대사가 되거나, 대통령이 달아준 별과 쥐어준 지휘봉을 받게 된 참모총장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바뀐 인생, 지극히 격상된 지위에서 훨씬 보람된 일을 하면서 자기 인생의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잠시 만나고 그냥 돌아온다면 별 다른 인생이 시작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서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고유의 사명을 받게 된 사람은 진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사명 수행 쪽으로 바꾸는 결단이 없이는 결코 우리 인생에 참된 전성기가 찾아올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장망성에 종으로 매여 있는 죄인들의 고통을 아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해주고자 원하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최고 급선무의 과제, 곧 구령을 위한 전도와 선교를 내 인생의 사명으로 받는 결단의 순간이야말로 바로 모세와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 인생의 진짜 황금기가 시작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미디안에서 양만 치면서' 살다가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사명을 받게 될 때 먼저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또한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이 사실만 상기해도 큰 힘을 얻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회사 사장이 시키는 일 하기 위하여 출장 나온 일개 사원의 심정과 대통령의 신임장을 가지고 파견된 특사의 기분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선언하시는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고 사명을 수행하는 성도의 뿌듯한 감격과 자신감이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제갈공명도 초야에 묻혀 살았더라면 그저 이름 없는 한 촌로로 그 인생이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국의 왕의 부름을 받게 된 후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을 받들고 살게 된 성도는 더 이상 자기 먹을 것만 위하여 밭 한 뙤기나 갈면서 사는 평민이 아니라 세계사의 유명인보다 훨씬 더 높은 구속사의 명사요 위인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직분을 받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의 '바로'보다는 훨씬 높은 사람이 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 '예수 목적, 내 인생 수단'이라는 방향을 설정하고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구령사명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서원하는 성도는 이미 더 이상 '미디안의 양치기'가 아니라 순식간에 '하나님의 대사'의 신분으로 격상된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구속사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귀중한 사명을 받음으로써, 혼자 겨우 먹고 살던 인생에서 탈바꿈하여 세상의 권세 있는 자와 부한 자들보다 훨씬 높이 앉아서 민족을 상대하고 세계를 품는 최고 최전성기의 생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모세의 인생 전성기는 그의 나이 팔십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진짜 황금기는 그가 "나 같은 사람이 이제 와서 무얼 할 수 있을까?"라고 한탄할 수밖에 없던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멋진 인생의 새 출발은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소명을 받음으로써, 그가 그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위하여 보내고자 하시는 사명을 목표로 살게 됨으로써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십'이라는 무슨 나이 숫자보다는 '입지'라는 결단이 진짜 중요합니다.
자기 인생을 참으로 보람 있게 채워줄 만한 어떤 큰 뜻을 비록 때는 좀 늦더라도 한번은 제대로 세울 수 있는 사람과 죽을 때까지 끝내 세울 수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입지'라는 결단이 자신의 인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명감 속에서 이루어질 때에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모세와 같은 영적 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까?
그 같은 진짜 인생 전성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찾고 그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기 남은 인생을 통해 섬겨야 할 사명을 수행해나가는 바로 이 두 가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왔습니까?
살아가는 날이 늘어 가면 갈수록 그 신고 있는 신이 더욱 더러워지기만 할 수밖에 없는 곳에만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당신의 보혈로 그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총의 십자가 밑으로 자신의 현주소를 옮길 때 우리의 인생은 그때부터 '높은 곳을 달리는 사슴' 같이 격상됨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면서 나이를 먹어왔습니까?
'양치며 먹고 사는' 단조로운 일과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며 한 평생을 다 보내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계신 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도 당신의 구령 사업을 이루기 위하여 찾고 계신 추수 일꾼이 되어 그 사명을 위하여 남은 평생 살기로 작정함으로써, 자신의 진짜 새 인생, 아니 청년시대를 다시 누리는 것과 같은 영적 최전성기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좀 잘 해보겠다고 애를 쓰고 자기 인생을 어떻게 업그레이드시켜보고 싶다는 소원은 가지면서도 '내가 누구관대'라는 장애물에서 걸리고 맙니다.
그러다보면 평생토록 '내가 왜 아직 요 모양 요 꼴일까?'라는 자학적인 푸념만 되뇌다가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관대' - 맞기는 맞는 말입니다.
나라는 인생에 무슨 '별 볼 일'이나 '잘난 것'이 있습니까?
하지만 그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완전 딴판의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무 한 사람'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아주 '특별한 한 사람'으로 나를 지정하시고 소명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사명을 주시면 이제 그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 그 '나'는 '왕 같은 백성, 세상의 제사장'의 지위를 받아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최고 수준의 차원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관대'라고 결코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이미 나이 들어서 아무 쓸모없다고, 나는 지금 돈 한 푼 없는 신세여서 아무 능력 없다고, 나는 지금 내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 처지이니 하나님의 일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결코 한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은 우리 평생 중 그 어느 시기라 할지라도 이미 늦었다고 할 때란 결코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부름을 받은 감격과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확신을 가지고 남은 평생을 바로 지금부터 진짜 영적 전성기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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