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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실수하면 안 된다! (삼하 6;6-15)

by 【고동엽】 2022. 1. 8.

두 번 실수하면 안 된다! (삼하 6;6-15)

 

 

같은 실수를 두 번 하면 안 됩니다. 두 가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같은 실수를 두 번 한 이야기이고 다른 이야기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성도가 귀가 발갛게 되어 목사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왜 귀가 그렇게 발갛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다림질하다가 다리미를 전화인 줄 알고 귀에 댔습니다.> <다른 쪽은?> <전화가 두 번 왔습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은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 고백입니다. 목사님은 낚시질을 좋아 하였습니다. 낚시를 좋아 한 다기 보다 차라리 낚시 광이었습니다.

어느 수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낚시질 갔다가 빨리 와서 수요예배를 드리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낚시를 좋아 하는 장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장로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장로님! 저 건너 저수지에 고기가 잘 잡힌다는 데 같이 낚시 갑시다.>

그러나 장로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날따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수요일이니 혼자 가셨다가 빨리 오시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고기가 잘 잡혔습니다. 정신없었습니다. 재미도 있었습니다.

한 편 교인들이 수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와 보니 목사님이 안 계셨습니다. 장로님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았습니다. 빨리 목사님이 가자고 한 저수지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정신없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론은 그 목사님은 그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마지막 결론은 아니었습니다. 그 날로 그 목사님은 그렇게 좋아 하고 그렇게 비싼 낚싯대를 꺾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는 낚시질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좋은 목회자로 목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좋은 간증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 실수는 안 됩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다윗이 왕이 되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궁궐을 백향목으로 건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일은 길르앗여림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를 자기 궁궐 옆에 모셔 놓고 그 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늘 물어 보면서 정치하려고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3만 명을 동원하였습니다. 작은 강대상만한 법궤를 운반하는 데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였습니다. 수레에 실었습니다. 잘 해보려고 새로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아비나답의 아들 아효가 소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웃사가 법궤를 잘 보면서 뒤따르고 3만 명의 무리가 그 뒤에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나곤의 마당 앞을 지나려는 데 소가 갑자기 펄쩍 펄쩍 뛰는 것이었습니다.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뒤에 가던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7)

웃사가 잘못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3만 명이 열광하던 축제장이 웃사의 장례식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법궤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윗도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9)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법궤를 오벧에돔이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서 잘 보관하고 섬겼습니다.

그 동안 오벧에돔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이었습니다. 3개월 지나자 사람들은 서서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법궤가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잘 보관하고 잘 섬기면 큰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오벧에돔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날라 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번에 법궤를 나르는 모습이 오늘 본문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13)

법궤를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첫 운반은 실패, 두 번째 운반은 성공하였습니다. 다윗은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실수를 거울삼아 두 번째 실수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실수를 두 번하는 것은 둔 한 사람입니다. 같은 실수는 한 번으로 끝내야 합니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한번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실수는 몰라도 같은 실수를 두 번 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전에 실수하였으나 지금은 실수하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 법궤를 나를 때와 두 번째 법궤를 나를 때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세 가지가 확실하게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메고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13)

석 달 전에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앞에서 뒤에서 감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깨에 메고 날랐습니다. 하나님은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메고 나르라고 율법을 정하여 주셨습니다.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4;15)

두 가지 법칙이 분명합니다. 법궤는 메야 합니다. 그리고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두 가지 확실한 법칙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아효도 웃사도 법궤를 메야하는 법칙을 어기고 지금 행진하고 있습니다. 둘 다 실수하고 있습니다. 첫 실수입니다.

그러나 웃사가 법궤를 만졌습니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6)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실수를 하니까 웃사는 죽었습니다. 모르고 어쩔 수 없이 첫 실수를 할 때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고 계시다가 실수를 두 번째 하니까 웃사를 즉석에서 즉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복되는 실수를 엄하게 다스리십니다.

법궤는 고생스러워도 메야 하는 것이지 수레에 편하게 나르는 성물이 아니었습니다. 편의주의는 교회를 망치고 편의주의는 그 사람을 망치게 합니다. 편한 것을 좋아 하고, 안락한 것을 좋아 하면 망합니다.

예수님은 그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이 고생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부터가 편의주의를 버리셨습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그 좋은 궁중을 뛰쳐나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작은 것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큰 것을 버린 것입니다. 나쁜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좋은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낮은 지위에서 물러난 것이 아닙니다. 왕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을 물러난 것입니다. 최고에서 최하로, 최상에서 최저로 물러나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편의주의는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졸려도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아까워도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벽에 부딪쳐도 전도하여야 합니다. 고생이 되어도 일하여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작가 일 것입니다. 작품마다 인간의 내면을 진솔하게 그려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의 작품을 따라 갈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날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식당에서 식사하는 손님들은 그렇게 유명한 분과 함께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온통 시선이 그에게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 와서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식당 청소를 맡고 있는 젊은이가 투덜대며 빗자루를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구석진 의자에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들이 쉬고 내쉬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이를 본 셰익스피어는 식사를 멈추고 그 청년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자네. 왜 빗자루를 내던졌는가?> 그 청년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위대한 작품으로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존경을 받고, 저는 고작해서 바닥이나 청소하는 보잘것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제 자신이 한심할 뿐입니다. 너무나 열등감 때문에 내 신세가 한심하여 그럽니다.>

이 때 셰익스피어는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자네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야. 자네와 나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네. 나는 펜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의 한 부분을 표현하고 있고 자네는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청소하고 있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결국 우리는 같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야. 안 그런가?>

이 후 청년은 어떤 궂은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였다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법궤는 메는 것이지 끄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같은 실수를 두 번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2. 6걸음

첫 번 법궤를 나를 때와 두 번째 나를 때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첫 번에 법궤를 나를 때에는 수레를 그냥 끌고 갔습니다. 계속 걸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다릅니다.

말씀을 잘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13)

여섯 걸음을 걷고 나서 멈추어 서서 소와 살진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무조건 걸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여섯 걸음마다 멈추어 서서>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섯 걸음마다는 아닙니다.

불교에 3보1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3발을 걷고 나서 엎드려 한번 절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6보 예배라는 의미의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6발을 디디고 나서 쉬어 예배를 드렸을 가요?

구약은 짐승피로 제사 드리고 신약은 예수 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6발을 걸은 후 제사를 드렸습니다. 출발을 순조롭게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나머지 걸음을 사고 없이 축복해 달라는 예배였을 것입니다. 안식일 개념입니다.

하나님도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에 쉬셨습니다. 6걸음을 걷고 예배드리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게 됩니다. 여러 성도님들도 먼 거리를 갈 때에 문을 나서서 6발걸음을 띠고 나서 잠간 서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다윗도 사고 난 길을 가려고 할 때 6 걸음을 걷고 기도하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나머지 발걸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길도 위험과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길입니다. 6 걸음을 걷고 기도하오니 나머지 발걸음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6일 일하고 하루 쉬고 또 6일 일하고 쉬고 하는 것은 창조의 섭리입니다. 나는 문경에 있는 석탄 박물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깊은 탄광에서 석탄을 캐면 모두 전동차로 들어 올려서 전동차로 밖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전기가 없던 시대에는 탄광의 길을 넓게 팠습니다. 그리고 말 마차가 깊은 곳부터 입구까지 석탄마차를 운행하여야 했습니다. 갱안으로 말을 집어넣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지만 6일을 일을 시키고 말을 탄광 밖으로 꺼내서 7일 하루는 쉬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야 말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말을 갱안으로 넣고 꺼내기 힘들다고 그대로 갱안에 두고 일만 시키면 곧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계속 걷다가 웃사가 죽고 법궤를 예루살렘까지 가지고 오지 못 하는 비극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나를 때에는 그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6보 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법궤를 날랐습니다. 법궤가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3. 제사

다윗이 첫 번 법궤를 나를 때와 두 번째 나를 때에 차이가 또 발견됩니다. 첫 번 나를 때 안 하던 것 중에 하나가 제사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13)

구약은 제사드리고 신약은 예배드립니다. 구약은 짐승피로 제사드리고 신약은 예수피로 예배드리고 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살진 것으로 드렸다는 말씀 속에는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두 번 실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함부르크에 아주 고급스러운 호텔이 하나 지어졌습니다. 그 호텔에 새로 채용된 한 직원이 접객 주임이라는 보직을 받아 열심히 청소를 시키며 호텔 주변 정리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호텔 주변을 돌아보는데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고급스런 벤치에 인상도 그리 안 좋고 옷차림도 신통치 않아 보이는 한 늙은 남자가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접객 주임은 훌륭한 호텔의 분위기가 저런 누추한 사람의 모습 때문에 깨어질까 걱정되었습니다. 그는 슬며시 그 사람 뒤로 돌아가서는 종이쪽지 하나를 그의 앞에 놓고 가버렸습니다.

<여보세요. 미안하지만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즉시 이곳을 나가 주세요.> 그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접객주임에게 다음과 같은 쪽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여보세요. 미안하지만 남의 귀에 소문나지 않게 오늘 즉시 이 호텔에서 나가 주십시오. 남루한 옷차림의 주인공 백>

깜짝 놀란 이 접객주임이 그 남루한 옷차림의 늙은 남자가 누구인가 하고 알아보았습니다. 그 호텔의 주인인 스티너스였습니다. 그는 큰 회사를 12개나 가지고 있으면서 호텔은 부업 삼아 경영하는 굴지의 대재벌이었습니다.

이렇게 주인을 몰라보는 실수로 좋은 직장을 쫓겨난 접객 주임은 그 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고 정중하게 윗사람을 모셨습니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던 첫 실수를 두 번째에는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우리 교회 다니시다가 제천으로 이사 간 이 영신 장로님은 돼지고기를 한 번도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어려서 돼지고기 한번 먹고 체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두 번 다시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번 실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박 목사님과 같이 필리핀에 갔습니다.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일주일 연수를 받으면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먹기 힘든 망고가 그 곳에서는 흔한 과일입니다. 그 과일을 먹고 다른 사람들은 괜찮았는데 박 목사님은 두드러기가 났습니다.

망고가 체질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부작용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기가 잘 나는 부분이 남자의 가장 중요한 은밀한 그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도 바로 그 곳에 두드러기가 심하였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하였습니다. 영어를 전혀 못 하는 목사님이라 나와 같이 갔습니다. 갔더니 마침 의사가 여자였습니다. 할 수 없이 여자 의사 앞에서 옷을 벗고 약을 바르고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때 한번 혼나고 다시는 망고를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두 번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첫 실수를 거울삼아 두 번째에는 실수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습니다. 수레에 나르지 않고 메고 날랐습니다.

6걸음을 걷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두 번 실수하지 않은 비결입니다. 아담 이야기로 마치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첫 사람 아담은 너무나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죄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930살을 살았습니다. 만일 오늘 날 930살을 산 사람이 한 명만 생긴다면 온 세계인들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초청하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아담이 선악과 따먹는 실수를 한 후 다른 죄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다른 실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배경을 창조 미드라쉬는 이렇게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과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고 나서 무서웠습니다.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숨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왔습니다. 자연적인 밤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형벌로 준 흑암인 줄 알고 밤새도록 한 잠도 자지 않고 회개하였습니다. 아침이 왔습니다. 자연적인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들이 회개한 댓가로 준 선물인 줄로 알았습니다.

아침에 아담은 감사한 마음으로 뿔이 하나밖에 없는 소를 찾았습니다. 소뿔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뿔이 둘이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하느라고 갈등을 가지지만 뿔이 하나인 소는 이 뿔을 붙들까 저 뿔을 붙들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 그래서 뿔이 하나밖에 없는 소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 내가 선악과를 따먹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내 속에는 선악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결코 선악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선만 붙들고 굳굳히 외길로 살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93o 세로 죽을 때까지 결코 다시는 실수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았다고 미드라쉬는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담은 두 번 실수 기록이 성경에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두 번 실수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다윗처럼 두 번 실수하지 않는 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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