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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치지 않았다. (행 28:11-16)

by 【고동엽】 2022. 1. 8.

그래도 지치지 않았다. (행 28:11-16)

 

 

글자를 잘 모르는 좀 무식한 어머니에게 자녀가 휴대폰을 사드리고 사용법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 보내는 법도 가르쳐 드렸습니다. 조금 후 어머니가 싱글벙글 웃으셨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회사에 있는 네 아빠에게 문자 메시지 처음으로 보냈다> <무엇이라고 보냈어요.> <여보! 사랑해!> 아들은 어머니에게 문자 메시지 보내는 법을 가르쳐 드린 것에 대하여 기쁨을 가졌습니다.

조금 후 아빠에게서 엄마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 오는 신호가 울렸습니다. 같이 보았습니다. <여보! 이것이 뭐요? ‘여보! 사망해!’라고 찍혔어> 첫 번 문자 메시지는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이 실수가 귀감이 되어 실수하지 않고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지치지 않았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참새도 죽을 때에는 꽥한다.> 지렁이는 밟아 죽게 되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참새는 죽을 때에도 지치지 않고 꽥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자세입니다. 오늘 바울 이야기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사형당할 것입니다. 바울이 사형당한 자리가 로마에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죽기 직전에 사형집행원이 물었습니다. <마지막 소원은 무엇인가?> 바울이 말했습니다. <단 칼에 죽여주십시오.> 당시 사형수에게 고통을 주려고 일부러 안 드는 칼로 여러 번 목을 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 칼에 목을 베어 달라고 유언을 한 것입니다.

사형집행관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단 칼로 바울의 목을 베었습니다. 바울의 목에 세 번 탕 탕 탕 튀었습니다. 머리가 튄 곳마다 샘물이 솟았습니다. 그 샘 세 곳이 지금은 바울 사형 집행 터에 그대로 있습니다.

바울이 사형을 당하러 로마로 끌려 갈 때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갔습니다. 보나 마나 사형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인간이기에 바울은 몹시 지쳐 있었고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석 달을 배를 타고 로마로 갔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온다는 소식을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압비오 저자까지 마중 나갔습니다.

지도를 보니까 압비아 저자는 로마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입니다. 그 곳까지 바울을 마중 나가자 바울을 이들을 보고 지쳤던 마음에 다시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담대함을 다시 얻은 바울은 죽기까지 복음을 증거하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형판결을 받아 사형을 당하기까지 2년 동안 집을 세로 얻어 살면서 자기에게 오는 자를 다 예수를 영접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인 28장 30절 31절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0-31)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지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극단적으로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 지쳤던 마음에 능력이 생기고 지쳤던 마음이 언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언제 지쳤던 마음에 담대함이 소생된 것일까요?

 

1. 동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로마로 사형 당하러 오는 바울을 200리까지 와서 맞는 동지들을 만나자 바울은 담대함을 얻었다고 성경은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걱정하고 같이 동거 동락할 동지가 있으면 지치지 않는 법입니다. 본래 동지라는 말은 아주 좋은 말인 데 공산당이 사용하여 좋지 않은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지는 좋은 것입니다.

메린랜트 의대 교수 제임스 린치 박사는 그의 명저 <깨진 가슴>에서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뜻이 맞고 언제나 의논할 수 있고 마음으로 의지되는 가까운 친구가 있는 사람은 건강하고 오래 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의 주장은 생물학적인 근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동지가 있는 사람은 오래 살았습니다. 꿀벌은 집단적인 곤충입니다. 여러 마리 꿀벌들이 힘을 모아서 거대한 꿀을 모으는 것입니다. 만일 한 마리만 잡아 두면서 고립시키면 동지 꿀벌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일할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다가 몇 마리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리고 맙니다. 동지애가 가장 강한 곤충은 꿀벌입니다. 꿀벌들은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피곤을 모르고 온 종일 일합니다. 그러다가 둥지로 돌아와서 동지 꿀벌들을 만나고 즐거워하고 피곤을 잃어버리고 일하는 보람을 가집니다. 동지들과 헤어져서 꿀을 모으다가 돌아 와서 동지를 만나는 기쁨으로 일하는 것이 꿀벌입니다.

그래서 영국에 속담이 있습니다. <벌 한 마리는 붙잡아 둘 수 없으나 여러 마리는 붙잡아 둘 수 있다> 엘리야 시대는 바알 선지자들이 득세하던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참 신인지 바알이 참 신인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갈멜산에 바알 선지자들을 모이게 하였습니다. 송아지를 제물로 잡아 놓고 기도하여 불이 떨어지는 신이 참 신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이 갈멜산에 모였습니다. 아합 왕도 모였습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 신에게 기도하였습니다.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몸에 피가 흐르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알 선지자들이 잡아 놓은 송아지 제물위에 불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차례가 되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450명이 합심하여 기도하였지만 엘리야는 혼자 기도하였습니다. 바알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송아지를 다 태우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450명 바알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당시 아합왕 왕비 이세벨은 독실한 바알 신봉자였습니다. 이세벨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왕상 19;2)

엘리야는 지쳤습니다.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로뎀나무 밑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지친 기도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엘리야는 나만 혼자 남았다고 한탄하며 지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엘리야는 자기 혼자인 줄 알았는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의 동지가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시 일어나 다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동지가 있다는 하나님의 격려를 받고 다시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도 로마에 지쳐서 갔을 때 동지가 있음을 보고 용기를 다시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동지가 있으면 새로이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믿음의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폭풍에도 넘어지지 않는 두 나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메스퀴트라고 하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사막에서도 잘 자라고 폭풍 중에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데 나무뿌리를 보통 30 m 까지 땅속으로 내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풍에도 끄떡이 없습니다. 또 삼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130m 정도까지 자랍니다. 그러니까 50층 정도 건물처럼 자랍니다. 그러나 뿌리는 아주 얕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강풍에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삼나무 뿌리끼리 얽히고 설 켜서 엉겨 자라기에 서로 버티어 주기 때문입니다. 같이 동지애를 가지고 살아가면 같이 사는 비결입니다. 동지가 있으면 지치지 않습니다.

 

2. 죽을 때까지 할일이 있기에 지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바울은 비록 로마에서 곧 사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할 일을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도 셋방을 얻어 놓고 그 곳에서 죽기까지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같이 내일도, 내일같이 모레도 같은 삶이었습니다.

<영원히 살 것같이 계획하고, 내일 죽을 것같이 일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지난 주간 공주 연합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집회 중에 나는 영명 중고등학교에 잠간 들렀습니다. 98년 된 학교입니다.

미국에서 하퍼 선교사가 이곳으로 파송되어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을 다니며 복음은 증거하였습니다. 차도 없었습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한적한 마을에 가서 전도하도 돌아오는 길인 데 소낙비가 쏟아져 냈습니다. 마침 옆에 상여집이 있었습니다. 그 곳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여는 마침 장티프스로 죽은 시신을 매장하고 갖다 놓은 상여였습니다.

하퍼 선교사는 장티프스 균에 감염되었습니다. 의료 시설이 전혀 없는 때였습니다. 장티프스는 엠병입니다. 당시 엠병은 불치병이었습니다.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36살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지역의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곳에 100년 가량된 선교사집이 있었습니다. 산기슭에 있었습니다. 그 집을 은퇴하신 장로님이 구입하셨습니다. <이 집은 선교하는 선교사의 집이었다. 나도 이제 평생 선교하다 죽으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그 장로님은 은퇴 금으로 전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등산로 입구에 있는 집이기에 등산하러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평생 동안 자기 집에서 이 집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다 죽겠다고 작정하시고 사시는 장로님을 보았습니다. 평생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그 일을 하다가 죽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120살 되도록 지치지 않고 살았습니다. 신명기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

죽기까지 일할 것이 있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이며 교육학자인 죤 듀이가 90세 생일을 맞았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제야 말로 쉬실 때인데 무엇을 하시며 소일하시겠습니까?> 듀이 박사가 말했습니다. <산맥은 아직도 깊고 넓습니다. 90개째 봉우리를 넘었으니 100개 째 봉우리를 향하여 열심히 걸어가야지요.>

그렇습니다. 할일이 있는 사람은 할 일이 있기에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나는 지지난 주간 미국에서 돌아 올 때 새벽 5시 3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누구에게 차를 가지고 나오라고 말하기가 미안하여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운전기사는 64세였습니다. 아내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딸 결혼시켜 내보내고 운전기사를 즐긴다고 하면서 아주 즐겁게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느니 평생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운전하며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평생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3.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지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환란이 많아도 이 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다 보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많을 것을 소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많은 상급을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평생 그렇게 일하고 아가야 파트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한 말을 기억합니다. <내 주님이 십자가에 바로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처럼 바로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습니까? 나를 거꾸로 못 박아 죽여주십시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죽기까지 결코 지치지 않고 당당하게 죽는 베드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일 목을 잘리는 참수형에 처하여질 복음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사형집행관이 감방으로 가서 물었습니다. <간밤에 잘 잤나?> 비꼬면서 물은 것입니다. 사형수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너무나 잘 잤습니다. 황금의 집 하늘나라로 이사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좋아서 푹 잤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여유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서울 한국에서 제일 좋은 집을 새로 지어 놓고 내일 이사 간다면 오늘 밤 마지막 살던 집에서 자면서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나게 잘 것입니다. 내일 사형당할 사형수도 내일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로마로 사형 당하러 끌려가는 바울은 지쳐 있다가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담대함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1. 동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았습니다.

2. 죽을 때까지 할일이 있기에 지치지 않았습니다.

3.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지치지 않았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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