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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돌봄의 삶/ (3)벧전 4:7-11

by 【고동엽】 2022. 1. 7.

위로와 돌봄의 삶 (3)

 

벧전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할지

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신앙인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마치 산위의 동네와 등경위의 등불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산위의 동네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조금만 비가와도 마치 홍수를 이룹니다. 그래서 집을 높은 언덕이나 산위에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반대로 이스라엘에서는 산위의 집이 좋은 집입니다. 동네가 산위에 있다는 말은 숨길 수가 없는 나타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등경위의 등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은 대개 높은 곳에 놓아둡니다. 그래서 등불도 나타난 존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세상에 나타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가 많습니다. 조금만 어긋나면 비판을 서슴지 않습니다. 나타난 존재이고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백성으로 그리고 먼저 된 자로서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세상을 깨우치고 정신을 깨우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가야 하고 때로 필요하면 헌신도 하고 희생도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 삶이 중보의 삶입니다. 그 삶의 내용이 본문에 보면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의 삶”

 

이 세상에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병으로 지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한창 갈등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각종 무거운 정신적인 짐을 진 사람들도 있고 가난의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맹장수술을 받은 분이 잘못 치료해서 복막염이 되어 장기간 병원에 입원한 분이 있었습니다. 심방을 갔더니 “이제 퇴원하면 병자들만 찾아다닐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으면 그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의 독자가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의 말이 모두 비웃는 말로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와서 위로하는데 그분은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다가 그냥 말없이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분도 몇 년 전에 아들을 잃은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의 위로가 진정한 위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삶의 모습은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입니다. 그 삶을 오늘 성경에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만물의 마지막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그 말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뜨겁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일입니다. 이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마음만 열고 기도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은 참 무안합니다. 서먹합니다.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릅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여전도회나 남전도회에 나갔습니다. 그 참석 사실만으로도 당사자에게는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관심이 없습니다. 저희들끼리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먼저 온 사람들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참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그들을 돌보고 안내해 주고 말벗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차적인 중보의 삶이고 돌봄의 사역입니다. 직장에서, 동네에서, 교회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삶이 중보의 삶입니다.

그리고 때로 세상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 실패해서, 낭패를 당해서, 큰일을 당해서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겠습니까.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고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삶 그 삶이 중보의 삶이고 예수의 삶을 모방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세련된 삶입니까. 그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삶”

 

우리는 이상과 같이 소극적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에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구현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해 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갈 때 함께 모여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불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원수 맺게 되고 증오하게 되고 갈등하게 됩니다. 이 관계의 갈등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웃, 교우, 형제, 시부모, 며느리 등 이 관계는 참 좋은 관계입니다. 하늘이 맺어준 특별한 혈육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또 이 관계는 많은 문제들이 파생되는 불화의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댁식구”, 여기서 참 많은 문제가 파생됩니다. 시댁식구 하면 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싫다”는 것입니다. 왜 싫으냐하면 이유 없이 싫습니다. 그냥 “시”자가 붙어서 싫습니다. 그래서 시집, 시부모, 시누이는 참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은 이 차원에 머물러 있어서 이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문제에 매여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신앙 상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이 세상을 신앙인으로 맛을 지닌 채 살아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신앙인으로서 그 이상의 역할은 불가능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집안에서부터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어디 가서 누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앙의 삶은 말로 글로 이론으로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되니까 10년 20년 신앙생활 했는데도 그 모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원수 맺고 살면서 주일날 와서 엎드려 내게 복을 주세요하고 기도가 나옵니까. 형제간에 원수 맺고 나와서 찬송할 때 힘 있게 찬송할 수 있습니까. 교우 간에 서로 원수 맺고 나와 예배할 때 무슨 감동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현실을 보면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앙인들로서 별로 작용을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한번 맘먹고 찾아가면 다 풀어질 것을 서로 자존심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괘씸해서 그냥 그 마음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무모에게 실망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는데도 부모는 그 자식 마음하나 받아주지 못하고 그냥 놔두고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에게 실망해서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데도 그냥 보고만 있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이웃이 상처를 입고 신앙에서 떠나가는데도 모른 체 그냥 놔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누굴 위해서 용서하고 전도하고 천국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이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날 한번 독한 마음을 먹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상대방도 마음을 열게 되어 있습니다. 나만 의롭고 옳고 인심 쓰는 것처럼 생각하면 상대방도 마음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가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앙생활 10년, 20년 했다는 그 이력이 무슨 힘이 되고 내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된들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본문 8절을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요리조리 따져보면 흠 없는 사람 없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누굴 탓할 수 있습니까. 내가 누굴 심판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 삶이 참 어려운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흉내라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흉내 내는 삶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고 그 삶이 중보의 삶입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고 신앙의 내용이고 신앙을 꽃피우는 삶입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내가 먼저 나서서 문제를 풀었다고 하면 큰 은혜와 기쁨과 즐거움이 주어질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는 삶”

 

사람은 살아가는 데는 함께 모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 삶을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이렇게 모여서 살고 단체를 이루어 살고 가족을 이루어 살고 이웃을 이루어 살아갑니다. 그 삶에 꼭 필요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조화이고 협동이고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는 삶입니다. 그 삶이 모두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즐겁게 만듭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노력해야 하고 그 공동체를 부드럽게 운영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데 아주 서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을 서툴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판단과 처세를 서툴게 하고 행동을 생각 없이 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모나게 행동을 합니다. 어느 공동체를 가 보아도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들고 갈등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깨진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조화를 이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참 좋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조화가 이루어지고 부드러움이 만들어지고 모두를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 보아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왜 싫어하는가.” 생각해 보고 수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부드럽게 운영되도록 자신도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외롭고 서툰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참 불행한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의 삶은 누군가를 섬기는 삶입니다. 가정을 섬기고 형제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동료를 섬기고 교우를 섬기는 삶, 그것이 중보의 삶입니다. 그렇게 헌신하며 살아갈 때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삶에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신앙인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제 친구 목사님 한분은 성품이 소극적인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늘 변두리를 전전합니다. 그런데 그 사모는 참 이 섬김의 삶이 아주 원숙한 분입니다. 읍내교회에서 목사님을 청빙하고 있습니다. 청빙조건은 목사님보다도 사모의 인격을 제일로 보기로 했습니다. 교회 여전도 회원들이 근방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돌면서 사모들을 살폈습니다. 마침내 친구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 가서 전도하다가 왔는데 냉수 한 그릇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는 우리가 전도해야 할 곳까지 오셔서 수고하시니 부끄럽다면서 점심식사를 준비해서 정성껏 대접해 보냈습니다. 참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어쩌다 한번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섬기는 삶이 생활로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읍내교회에서는 그 점심한번 얻어먹고 목사님은 얼굴도 보지 않고 청빙해 갔습니다.

얼마나 향기 있는 삶입니까. 내가 대접할 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그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그러면 그 행복한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길을 형통한 길로 안내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지그시 참고 인내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헌신의 삶을 살고 때로는 희생의 삶도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모두 급하고 생각도 여유도 없이 조급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앉아 생각하기만 해도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있는 일을 놓고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속단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고 실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대체적으로 성격이 급한 편에 속합니다. 그래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말해버립니다. 외국인들은 자판기에서 커피가 다 나온 후에 불이 꺼지면 커피 잔을 꺼내는데 우리는 자판기에 손을 넣고 기다립니다. 사탕을 먹을 때도 빨아 먹는 것이 아니고 깨물어 먹습니다. 그러다 이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버스 정류장에 가 보면 외국 사람들은 줄을 서 기다렸다 타는데 우리는 차도에 까지 내려가 있다가 탑니다. 지그시 참고 기다리고 수고하는 모습이 우리의 삶에 없습니다.

추운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달팽이가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데 나무껍질 사이에서 벌레 한 마리가 얼굴을 삐쭉 내밀더니 하는 말이 “이봐 이 바보야, 너는 지금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있어, 저 위에 올라가 봤자 사과는 없어“ 라고 합니다. 그러자 달팽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 쯤 되면 사과가 열릴 거야.” 이 정신이 오늘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충청도 사람들을 느리다고 흉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충청도 갈매기들 까지 느리더라고 말합니다. 강화도에 가서 먹이를 주면 경기도 갈매기들은 날쌔게 날아와 먹이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채 가는데 삽교천에 가서 먹이를 주었더니 한결같이 먹이가 땅에 떨어진 뒤에야 날아와 주워 먹더라고 충청도 갈매기들도 느리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충청도 갈매기들이 얼마나 점잖고 신사적입니까. 먹이가 땅에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날아가 먹이를 집어 먹는 충청도 갈매기들이 싸워가며 서로 먼저 먹겠다고 치고받고 하겠습니까.

오늘 문제가 있다면 모두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와서 서로 먹으려고 해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살아가야 할 이 공동체가 깨지고 부서지고 원수 맺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모두 급하고 결과를 금방 얻으려고 하니까 원수 맺게 되고 말 한마디를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헌신의 삶에는 언제나 상대방이 우선입니다. 상대방을 우선할 수 있다면 세상에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삶이 중보의 삶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중보의 삶을 살고 돌봄의 삶을 살고 안내하고 헌신하고 때로 필요하다면 희생의 삶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치유하고 고치고 싸매는 삶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 좋은 성품과 섬김의 삶을 달라”고 말입니다. 기도하며 그렇게 살려고 다짐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자질을 주실 것입니다. 그 용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영적 자질을 발휘하면 충분히 예수님의 중보의 삶을 흉내라도 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이 세상을 치료하고 고치고 싸매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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