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감동의 예배
창 15:9-21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아버지 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참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진정한 신앙인이요 지도자였던 것은 그에게 다음의 3가지 자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용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병을 이끌고 가서 적과 싸워 찾아옵니다. 얼마나 큰 용기입니까. 둘째는 아브라함의 무욕입니다. 지도자는 이 무욕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조카 롯이 재산가지고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창피스러웠을 것입니다. 나이 먹은 어른이 나이 어린 조카와 재산가지고 갈등하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그래서 조카를 불러놓고 “내 재산 중에서 좋은 것을 다 가지고 나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이 철없는 조카 롯이 삼촌 집에 있는 알짜 재산을 다 가지고 떠나버립니다. 부모 없는 자식을 길러놓으니까 재산에 욕심내더니 가지고 가라 하니까 다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아주 좋은 지도자이고 신앙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잡혀간 조카를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좇아가서 구해옵니다. 소돔 사람들 재산과 포로까지 다 찾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포로와 재산을 다 소돔 왕에게 돌려주니까 소돔 왕이 백성만 돌려주고 전리품은 당신이 가지라고 그럽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소돔 왕이 나를 부자 되게 했다는 말을 듣기 싫다, 실오라기 하나 갖지 않겠다” 하고 다 돌려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무욕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11조를 드립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자질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자질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는 곳 마다 따라가셔서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에서 또 한번 감동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세입니다. 아브라함은 일평생 동안 참 많은 복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복을 받은 것은 순전히 예배드리는 삶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방법은 이 예배생활을 통해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예배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예배생활에서”
아브라함은 언제나 이 예배생활에 충실했습니다. 창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납니다. 가다가 가나안에 이르자 맨 먼저 제단을 쌓는 일부터 합니다(7). 또 가다가 머물면 그곳에 또 제단을 쌓았습니다(8). 또 13장 4절을 보면 가다가 벧엘에 장막을 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제단을 마련하고 제물을 드립니다(4). 또 조카 롯이 재산을 가지고 가라고 하니까 재산을 다 가지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때 마음이 허전하고 배신감에 쌓였을 것입니다. 그 때도 아브라함은 조카를 원망하지 않고 또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18).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칩니다. 그 모습은 아브라함의 예배생활의 극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 마다 따라가시며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더 이상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만큼 만족해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 은혜를 입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이 제단 쌓는 일 즉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머리로 살고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머리로 살아지고 꾀로 살수 있습니까. 하늘의 도움과 은혜와 복을 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부작용이 없고 사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브라함이 이 제단 쌓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예배정신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예배자의 수고”
예배생활에 무슨 수고가 필요한가 하겠지만 상당한 수고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에 제물을 드리고 불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워야 그 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신 것입니다. 그 제물이 열납되기까지 아브라함은 온종일 기다리고 앉아있었을 것입니다. 남들은 지금 그늘에서 쉬고 편히 놀고 있는데 나는 햇빛아래서 땀을 흘리며 제물을 드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도 내리쪼이는 강렬한 햇빛 아래서 땀을 흘리며 기다리는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예배자에게는 이런 수고가 수반합니다.
사람들은 주일날 놀러갑니다. 잠도 자고 쉬고 산으로 들로 골프로 낚시로 시골로 놀러 갑니다. 예배자는 이런 것 모두 포기하고 일찍 나와서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자에게 요구되는 수고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예배를 서비스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제물만 드리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루한 기다림도 있어야 합니다. 당시는 제물을 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그 제물이 열납되면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태웠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응답받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불이 언제 내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불이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아침부터 밤늦게 불이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갈멜산 위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제물을 놓고 기다리지 않습니까. 그들은 불이 내리지 않아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때로 예배자에게는 이런 기다림의 수고와 인내가 요구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기다림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한두 번 예배에 참석해본 분들이 한번 와 보고 재미없더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구경거리도 없습니다. 설교를 한번 들어보고 재미있다 없다를 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성도들은 목사가 매주일 설교를 재미있게 잘 해 주기를 기대하는데 그것은 참 무리입니다. 그렇게 매주일 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설교학에서는 목사가 1년에 서너 번 설교를 잘 하면 그것이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매 주일 잘 하길 기대하니까 목사는 주일 설교준비 때문에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예배자에게는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예배에, 어느 설교에 큰 은혜가 주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물을 드렸더니 금방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면 얼마나 쉽고 좋겠습니까. 제물은 드렸는데 언제 불이 내릴지 몰라 하루 종일 어떤 때는 밤늦게 까지도 기다려야 합니다. 매주일 은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이 기다림, 인내의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에 따르는 시험”
11절을 보면 “솔개가 그 사체위에 내릴 때에 아브라함이 쫓았더라"고 했습니다. 짐승 피 냄새를 맡고 솔개가 찾아와 먹으려고 했다 그 말입니다. 여기 솔개는 예배드리는데 따르는 방해물을 말합니다. 불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힘든 일인데 자꾸만 솔개가 내려와 제물을 뜯어 먹으려고 합니다.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습니다. 날은 덥고 시간은 지루하고 솔개는 내려오고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솔개를 좇기에 바쁩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예배드리려고 하면 원치 않는 이 솔개들이 찾아옵니다. 오늘의 솔개가 무엇인가 하면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려고 하면 방해물이 뒤따릅니다. 때마침 손님이 찾아옵니다. 주일날 놀러갈 일은 왜 그렇게 잘 생기는지 모릅니다. 내일 주일 예배 드려야 하는데 친구들이 자꾸만 유혹을 합니다. 골프 가자, 낚시 가자, 산에 가자, 온 가족이 함께 놀러가자, 별 유혹을 다 합니다. 안 들었을 때는 괜찮은데 듣고 나니까 자꾸만 마음이 쓰입니다. 솔깃합니다. 미련이 남습니다. 골프가고 싶어 죽겠습니다. 산에 가고 싶어 죽을 지경입니다. 낚시통 들었다 놨다 합니다. 이것이 모두 솔개입니다. 이 솔개를 좇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예배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이벤트는 대부분 주일과 수요일 저녁에 일어납니다. 주일날, 수요저녁 예배시간에 맞춰 축구 경기가 열립니다. 한일전이라도 열리면 참 마음에 갈등을 느낍니다. 이것도 솔개입니다. 이것을 효과 있게 다스리지 못하면 그만 무너지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솔개는 “잠”입니다. 12 절을 보면 “해질 때에 아브라함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또 죽을 맛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기다립니다.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한편 솔개가 내려오고 또 졸음이 쏟아집니다. 뙤약볕에 앉아 기다리니 땀이 흐르고 뜨거움이 몰려오고 눈이 부시고 솔개는 찾아오고 그것으로 다가 아니고 이번에는 졸음이 사정없이 쏟아집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그날 얼마나 수고하며 힘들었겠습니까.
이 졸음이 문제입니다. 특히 예배 때 찾아오는 졸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인정사정 체면 없이 쏟아집니다. 밤에 자려면 잠이 잘 오지도 않는데 왜 예배시간만 되면 잠이 그렇게 쏟아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오죽하면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 앉았다가 떨어져 죽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려고 하는데 이런 시험이 오고 수고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배자에게 요구되는 수고입니다. 예배자는 반드시 이런 수고,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인내의 결실”
기다림에는 반드시 결실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이 결실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응답”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소식이 옵니다. 응답이 주어집니다. 결실이 주어집니다. 17절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응답이 왔습니다. 불이 내려와 고기를 쪼개서 올려놓았는데 그 사이로 연기가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제물이 응답되고 열납되고 하나님이 받으셨다 그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뭐든 응답이나 성취는 마지막에 가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쉽게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귀한 것은 한결같이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해가 저서 어두울 때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여기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고 연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상징하고 지나갔다는 것은 응답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연기나 구름이나 횃불로 상징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습이 없으시니 임재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의 제물은 그렇게 응답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임하셔서 그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응답되었는가 하면 맨 나중에 임했습니다. 모든 응답은 맨 나중에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진정한 예배자의 정신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배도 드리면 모두 받아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 형식적 예배가 얼마나 많습니까. 형식적인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응답 없는 기도는 주문에 불과합니다. 밤새워 기도해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밤새운 기도, 금식하며 드린 기도, 눈물로 드린 기도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염불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응답은 맨 나중에 끝머리에서 이루어지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배의 생명은 맨 나중 축도에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예배 말미에 그냥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한 시간을 참지 못해서 그냥 나가버립니다. 그러니 그 예배가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까. 아브라함의 제물은 맨 나중시간, 끝 시간, 아브라함이 지친 그 시간에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습니다. 그 말은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응답이 주어집니다.
두 번째는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어두울 때에 횃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계시가 주어집니다. 무슨 계시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의 미래에 대한 계시입니다. 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애굽에서 400년을 살게 될 것이다.”14절을 보면 “애굽에서 나올 때는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게 되리라.” 15절을 보면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죽으리라”는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제일 중요한 복은 미래를 알고 사는 복입니다. 나의 운명을 알고 나의 종말을 알고 사는 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나의 자식들이 복을 받고 살 것을 미리 알고 사는 것이 복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가장 큰 근심이나 걱정이나 불안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고 불확실성 때문에 오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날 하나님께 진정으로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확실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 내용은 너는 애굽에서 400년을 살 것이고, 애굽을 나올 때는 큰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오게 될 것이고, 또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죽으리라는 계시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미래를 미리 알고 산다는 것처럼 복된 일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미래를 알고 믿고 살면 참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즐거울 것입니다.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사람들이 왜 보험에 들고 건강진단을 하고 뭘 먹으면 안 좋다고 포기하고 그럽니까. 다 미래가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앞일을 미리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 은혜는 언제 입고 살아가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예배생활에 의해서 주어지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늘 예배드리는 중에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이유는 예배생활을 충실히 하였기 때문에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삶의 모습을 성경이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을 향해서 “보라, 너희도 이 예배생활을 통해서 복을 받고 은혜를 입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받는 교훈입니다.
오늘 이 시대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유혹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각종 삶의 요소들입니다. 예배경시 풍토가 문제입니다. 이 요소들을 효과 있게 대처하지 못하면 이 예배생활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은 이 예배생활이 형식적으로 되기 때문에 정신적 기반과 영적 기반이 약화되어 삶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과 물질에 집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갈수록 더 갈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 두려움이 많아지고 나약해지고 그 삶이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이 예배 생활을 통해서 은혜를 입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아브라함의 제단중심의 삶을 장황하고 자세하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늘보다 더 불확실한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 확신 있는 삶을 살았던 이유는 바로 이 삶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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