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의 조건
행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
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
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심
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처음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울은 일생에 3차에 걸쳐 세계선교여행을 했습니다. 1차는 구부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등을 여행하며 전도했습니다. 2차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을 여행하며 전도했고 3차는 주로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전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러 전도지역 중에서도 특히 에베소에 대해서 애착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지역 가운데 가장 많은 성공을 거둔 지역이 에베소 지역입니다.
이제 바울은 인생도 황혼기에 와 있고 선교할 시간도 얼마나 남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평소 꿈대로 바울은 로마에 가서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다시 에베소에 방문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 바울은 드로아에 머물고 있는데 약 50km 거리에 있는 에베소를 방문하기가 시간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기별하기를 중간기착지인 밀레도로 나오라고 기별해 놓았습니다. 밀레도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반갑게 만나서 해후하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 17-35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3년 동안의 에베소에서의 삶을 결산하는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설교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도하려 결심했다, 그런데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분명 순교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죽게 되면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하겠다, 그러니 당신들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잘 돌보라, 내가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 은이나 금 그리고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 나로 인해서 손해보고 억울한 일 당한 사람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고했습니다. 그 말씀이 35절 말씀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십시오”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근심하며 전송했다고 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방법과 조건을 제시받게 됩니다. 여기 보면 몇 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즐거움으로 일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참 즐거운 마음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원해서 아주 즐겁게, 만족하게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마지막에 가서 고백하기를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만족한 고백입니까. 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자신이 사역한 것을 평가하면서 만족하게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을 소중히 알고 열심히 일한 사람은 마지막에 이런 고백할 자격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 삶이 바로 창조주의 사역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바로 이렇게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삶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도우십니다.
성경에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시간이 모두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과 아모스는 들에서 잠자지 않고 양을 치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도 12마리 소에 겨리를 하고 밭을 갈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형제도 밤새 고기를 잡던 그 시간에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열심히 일할 때 부름을 받습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소를 찾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도중에 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열심히 타작하던 중에 부름을 받습니다. 느혜미야는 왕명을 받들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중히 알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은혜를 입습니다. 그것이 쉼이라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일하는 사람에게 이 쉼의 시간이 얼마나 달고 시원하고 상쾌한 시간입니까. 군에 가서 훈련받다가 “10분간 휴식” 이라는 말이 얼마나 신납니까. 군에 가지 않은 분은 이 기분을 모릅니다. 이 기쁨은 일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맛이고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지만 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일 일하고 하루 쉬라고 하셨습니다(출 20:8). 쉬되 종들까지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종들도 이 기쁨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다 그만 죽었습니다. 악보에 쉼표가 없어서 계속 부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하는 시간이 영적인 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자신의 사역에 재창조를 이룬 시간입니다.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학기가 끝나고 곧 방학이 주어집니다. 그 방학을 일컬어 “Vacation"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청소하다, 준비하다”라는 뜻입니다. 방학은 노는 것이 아니고 다음 학기를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또 휴가라는 말을 “Recreation"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Re"는 “다시”라는 뜻이고 “creation"이라는 말은 ”창조한다“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휴가”라는 말은 “재창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휴식이라는 말과 방학이라는 말은 새롭게 일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두 사람이 산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가서 한사람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10분간 쉬었습니다. 그 10분간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니까 “나는 그 10분 동안 도끼날을 갈았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누가 더 일의 능률이 나타났겠습니까. 바울은 소명 받은 후 주의 일을 참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백하기를 “나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고백은 할일 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들이 임종시에 가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전하는 일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명을 받은 후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린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나는 죽든지 살든지 예수만 전하노라.” 깨달음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깨달음이 있으면 그 마음에 감사함의 마음이 솟아나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에 이 마음을 품고 살면 그 삶이 행복하게 됩니다. 주어진 현재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은 조건이나 환경이나 소유에서 오는 것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행복하면 무엇이든지 즐겁고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떤 지역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찬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감사는 같은 뜻입니다. 그 감사함의 내용이 그 삶에, 얼굴에, 생각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Charles Spurgeon은 신학생들에게 설교자의 표정을 강의하면서 말하기를 “희망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위를 쳐다보라, 은혜와 감사와 영광을 말할 때는 눈을 크게 뜨고 빛나는 눈동자를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그러면 지옥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스펄젼은 “그 표정은 지금 자네의 그 얼굴이 적당하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는 데는 얼굴 근육이 72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소를 지을 때는 14개만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사는 사람이 주름살이 그만큼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명심하십시오. 사람이 정말 세상을 감사하며 살고 행복해 하며 살 때는 구겨졌던 얼굴의 주름살도 펴지고 마음의 주름살도 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원망도 사라지고 늙음도 방지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삶이 가장 좋은 약이 되고 보약이 되고 화장술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장은 얼굴에 바르고 치장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마음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외모는 왜소했지만 그 마음에는 아주 넓은 천국을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아주 만족하고 행복한 여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 다음 우리들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삶”입니다.
바울은 평생 남을 위해서 베푸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전도자의 삶은 100% 베푸는 삶입니다. 진정한 전도자라면 자신의 삶은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살다보면 전도자의 길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전도자의 길만 갔던 분들을 보면 그 가족들이 대부분 고난을 받습니다. 이성봉목사님은 부흥회 다니며 받은 사례비로 남들에게는 후하게 나누어 주었지만 가족에게는 참 인색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삶입니다. 내 가족에게 후하게 사용하고 배려하는 것이 죄송하고 죄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삶은 자신에게는 모두가 희생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삶에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자신을 다 바쳤습니다. 인생을 바치고 젊음을 바치고 정신과 혼을 송두리째 바쳐 전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바울에게 바리새인들이 “네 많은 학문이 너로 미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누가 뭐래도 자신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이 주는 데서 얻어지는 기쁨이고 행복이고 보람이고 감사함입니다. 그래서 행 20:35를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주는 삶이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행복한 삶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들을 보십시오. 선교사는 자신의 인생도 젊음도 시간도 자신의 영혼까지도 다 주려고 마음먹고 선교지로 갑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들은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합니다. 다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준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당당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얻으려 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없습니다. 때로는 비굴하기 까지 합니다. 돈을 꾸려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없습니다. 빚진 자도 어깨에 힘이 없습니다. 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준다는 것은 반드시 물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 말고도 줄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관심, 기도, 부드러운 조언들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물질보다 더 소중하게 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중보의 기도는 베풀고 나누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나누는 삶입니다. 내가 누군가 병들어 누워있는 이웃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상당히 소중한 것을 베풀고 주는 삶입니다. 교회에 새신 자가 들어왔습니다. 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처음에 얼마나 어색해 합니까. 그때 누군가 찾아와 반갑게 대해줄 때 얼마나 고맙고 반갑습니까. 그때 먼저 온 사람으로서 내가 처음 교회 왔을 때 어색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새신자들을 따뜻하게 안내해 주고 인도해 주고 함께 해 주며 배려하는 역할도 상당한 베풂이고 주는 삶입니다. 사실은 그 삶이 그 사람들 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중보의 삶이고 그것이 주는 삶입니다.
어떤 분이 영적으로 매우 약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먼저 믿은 분이 그분을 늘 염려하면서 배후에서 기도해 줍니다. 멀리서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주고 염려해 주고 지켜줍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에서 점점 이겨나가며 바로 서 나갑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겠습니까. 그것이 신앙인의 중보의 삶이고 기쁨의 삶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으로서 좀 약한 분들을 위해서 늘 기도해 주고 그 신앙이 잘 자라도록 안내해주는 역할, 그것이 주는 생활이고 중보의 생활입니다. 얼마나 귀한 삶입니까. 그 삶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삶이 가장 많은 것을 주는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주는 사람이 있고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결산할 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동안의 전도자의 삶을 결산합니다. 그래서 귀로에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내게 무슨 하자가 있는가, 내가 떼먹은 것, 원망들을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결산하고 바울은 마침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합니다. 그리고 아주 만족하게 헤어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37절을 보면 “다 크게 울고 바울의 목을 안고 입 맞추고 근심하며 배웅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작별입니까.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야 그 삶이 행복이고 성공입니다.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맺음은 더 중요합니다. 저도 이렇게 목회사역을 은혜롭게 끝맺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목회사역을 마치는 날 이렇게 끝맺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목회가 끝나는 날 모든 분들이 “아 시원하다”한다면 침 비참해질 것입니다. 오늘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추한 모습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국회의원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또 생각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일부이기는 하지만 평생 목회한 목사님들이 은퇴하는 시기에 당하는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면 더욱 이 사도바울의 결산하는 모습이 간절해집니다.
사도바울은 끝맺음이 참 은혜롭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을 이렇게 끝맺음 하려면 사람들과 관계를 잘 해야 합니다. 살면서 누구 것을 떼먹는 일, 손해 끼치는 일, 빚지는 일들이 없어야 합니다. 또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아무리 손해보고 보기 싫어도 원수지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 있으면 마음에 평화나 복이 없어집니다. 자유함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마지막 나의 삶을 결산하는 시간이 오면 만족한 것은 고사하고 사람이 초라해 집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삶의 모습과 그의 신앙고백을 보면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향기 나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이 같은 은혜가 여러분들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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