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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끝이 좋은 사람들 (딤후 4:16-22)

by 【고동엽】 2022. 1. 4.
끝이 좋은 사람들 (딤후 4:16-22)
  금년을 맞이 한 지가 엊그제같습니다. 그런데 벌써 12월 마지막 달입니다. 금년에 무엇을 하였나 허탈하기만 합니다. 또 한 살 더 먹었구나하고 허전하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 달을 어떻게 지내야 할 가요?
성경을 보면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모세는 시작도 좋았고 끝도 좋았습니다. 시작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종살이 할 때에 인구 번성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아이를 잘 낳는 지 미드라쉬를 보니까 나일강가에 가서 산소만 마시면서도 <아! 아이를 낳고 싶다>라고 외치기만 하여도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들 인구 말살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현장에서 죽여 버리는 작전이었습니다.
성경은 몇 명 정도 아들이 죽었는 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드라쉬는 당시 약 60만명 아이들이 죽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을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이 때 살아난 유일한 아이가 모세였습니다.
모세의 시작은 이같이 우렁찬 축복속에 태어났습니다. 40년을 궁중에서 살았습니다. 초호화 생활을 하였습니다. 200만명이 다 노예 생활을 할 때 모세만은 노예들을 부릴 수 있었습니다. 80살부터 120 살까지는 이스라엘 200만명의 최고 지도자로서 살았습니다.
어느 누가 40년간을 대통령으로 지내겠습니다. 모세의 일생의 멋진 일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산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미드라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데리고 가려고 하실 때 모세는 땅에 원을 그려놓고 500번 정도를 기도하였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릴가 두려워 하면서 하늘의 창들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였던지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나는 너를 데리고 오려고 한다. 그런데 너는 더 살고 싶다고 기도하고 있다. 너를 데려 오는 대신에 네 장롓식에는 내가 필히 참석하마“ 그래서 모세 장례식에는 하나님이 참석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없는 전설이니까 참고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모세는 느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눈이 흐리지 않고 건강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일생 건강하게 살다가 멋지게 죽었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이 다 좋다면 얼마나 좋은 인생이 되겠습니까?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2) 시작도 안 좋고 끝도 안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헤롯왕과 같은 사람입니다. 헤롯은 하스모닌 가문에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고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세례요한의 목을 자른 사건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헤롯왕에게는 빌립이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는 너무나 예쁜 절세 미인이었습니다. 헤롯은 동생을 죽이고 헤로디아와 살았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세례 요한이 이를 지적하였습니다. 헤로디아도 세례요한 미워하였습니다. 죽일 명목만 찾았지만 도무지 꼬투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세례 요한을 존경하고 따라 다니기에 그를 죽이면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이었습니다. 헤롯왕의 생일이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멋지게 추었습니다. 모두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헤롯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막6;23) 딸은 어머니에게 가서 무엇을 구할 지를 물었습니다. 어머니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의 목을 구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악한 왕이었습니다.
헤롯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명을 쓰고 쓸쓸히 죽어 갔습니다. 그가 죽을 때 우는 사람이 없을 것만 같은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의 유명한 사람들 수 백명 잡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유언을 하였습니다.
<내가 죽거든 저들 모두를 죽여라. 그래서 온 가족들이 울게 하라. 사람들은 내 죽음을 백성들이 슬퍼하는 줄로 알리라> 이렇게 죽은 이가 헤롯 왕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도 종으로 태어나 죽을 때도 이렇게 외롭게 비참하게 죽은 이가 헤롯입니다. 시작도 안 좋고 끝도 안 좋은 사람입니다.
(3) 시작은 좋은 데 끝이 안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12 명 제자중에 하나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일생 영광중에 영광입니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은 30 냥에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후회하고 자살하였습니다. 나무에서 끈이 끊어져서 시체가 떨어지며 배창자가 흘러 내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행1;16-18)
시작은 화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끝이 안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공을 차듯이 차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4) 시작은 안 좋은 데 끝은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바울은 예수믿은 사람을 핍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데도 동참하였습니다.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다메섹에 살고 있는 예수믿는 이들을 잡으로 떠났습니다. 살인자였습니다. 핍박자였습니다. 다혈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온 일생을 복음을 전하는 데 바쳤습니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이 많은 이었습니다. 한 곳에 머믈러 있는 항성이 아니라 항상 다니는 유성이었습니다. 바울은 네 번 전도여행을 하였습니다. 복음에 온 생애를 걸었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2-28)
이렇게 복음에 살고 복음에 죽는 심정으로 살다가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이 순교당한 자리가 지금도 로마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마지막 소원은?> 사형시키는 이가 물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단 칼에 베어 다오> 그렇게 죽었습니다. 시작은 안 좋았으나 끝이 좋은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우리는 네 종류의 사람중에 모세 같은 사람이 되면 더더욱 좋겠지만 바울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작은 안 좋아도 좋습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아 집니다.
12월입니다. 이제 끝을 잘 마무리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쓴 약을 먹어도 끝에 사탕을 입에 넣으면 달게 끝나게 됩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본문은 바울이 죽기 직전에 쓴 글입니다. 인생을 멋지게 끝내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을 보며 어떻게 금년의 끝을 장식하여야 할가 생각하여 보십시다.
어떻게 끝을 맺는 것이 좋은 끝일가요?
1. 다 용서하고 끝내야 좋은 끝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
바울은 지금 사형수 몸입니다.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바울을 떠났습니다. 안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법정에 서셨습니다. 3년 동안 생사를 같이 하며 지내던 12 명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탕자가 돈이 떨어지고 나니 모두가 탕자 곁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좋을 때 많았던 이들이 상황이 불리하여 지니 다 떠나고 말았다. 바울은 고독을 느끼고 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 나를 버렸으나> 이 말 한 마디속에 들어 있는 바울의 심정은 착찹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 용서하고 포용하고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바울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 그럴 수 있다고 포용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잘 형성하여야 건강하고 오래 살게 됩니다. 마음이 즐거워야 참 삶이 됩니다. 짓눌린 분노나 억제된 슬픔이나 감정은 인생에 독이 됩니다.
미국 메사추세스 주 종합병원의 정신과 과장으로 <억제된 감정>이라는 책을 쓴 에릭 린더만 박사가 말했습니다. 한 여성의 아버지가 아팠습니다.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아버지 병을 돌보았습니다. 그 후 어머니도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 데 어떻게 될 가 두려워 하면서 살 얼음판을 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살았습니다. 슬픔이 있어도 감정이 나도 그저 참는 것뿐이었습니다. 위궤양에 걸렸습니다. 위암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픈 남편을 걱정하다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다 풀어야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12월은 다 풀어야 하는 달입니다. 모두를 포용하고 사랑하는 달입니다.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
2. 소망을 잃지 말아야 좋은 끝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기적이 있을 것을 믿으며 소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17)
바울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곁에서 떠나지 않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을 전하고 전도한 것에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을 것을 믿었습니다. 소망을 잃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적은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제 잔치가 끝나야 할 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더 맛있는 포도주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까지 하였습니다. 다른 잔치는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주다가 취하면 나쁜 포도주가 나오는 데 이 집은 나중 포도주가 더 좋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지막이 더 좋아 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이 더 좋은 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앞으로 나왔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로 잡아 가려고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진퇴양란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마지막까지 소망을 잃지 않고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모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12월에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을 때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그리고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 지 그물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이 곁에 계셔서 그 동안에 뿌린 수고의 결과가 나타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3. 끝은 승리일 것을 선포하여야 좋은 끝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 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이 말씀은 최후 승리를 확신하는 바울의 모습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아무리 아픔이 있었더라도 하나님이 다 건져 내주시는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교육자이며 사회사업가이며 목사인 J.F.오베랑(1740-1826)에게 어느 날 한 부인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호소하였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그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내 앞에 있는 두 보석을 보십시오. 이 두 보석은 색갈이나 투명도 그리소 순수함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는 눈부신 광채가 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흐릿합니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은 80번 깍은 것입니다. 그러나 흐릿한 것은 8번밖에 깍지 않았습니다.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고통으로 깍인 영혼은 광채가 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 할 지라도 참고 나면 찬란한 광채를 내게 될 것입니다. 부인은 용기를 얻고 돌아 갔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바울은 마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달입니다. 잘 마무리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바울처럼 하면 됩니다. 1. 다 용서하고 끝내야 좋은 끝입니다. 2. 소망을 잃지 말아야 좋은 끝입니다. 3. 끝은 승리일 것을 선포하여야 좋은 끝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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