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에스겔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대선지서 또는 대예언서라고 하고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소예언서나 소선지서라고 합니다. 여기 대와 소의 구분은 분량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이사야를 대예언서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이사야는 대예언자가 되는 것이고 호세아를 소선지서라고 하면 호세아는 소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대와 소라고 하면 본문의 중요성이나 인물의 능력에 따라 구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량에 따라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로 구분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66장, 예레미야가 52장, 에스겔은 48장입니다. 분량이 다 깁니다. 이런 것들을 대예언서라고 하고, 소예언서 중 분량이 긴 것이 스가랴가 14장이 있습니다. 이처럼 분량이 작은 것을 소예언서 분량이 긴 것을 대예언서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에스겔은 대예언서의 마지막 본문입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비슷한 시기에 사역했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모두 남유다가 멸망할 시점에 사역했는데 사역의 공간은 다릅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땅에서 에스겔은 바벨론 땅에서 예언 사역을 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이스라엘 바깥 이방 땅에서 예언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은 직업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부모의 직업을 자녀가 거의 그대로 물려 받습니다. 예레미야도 제사장이었고 에스겔도 제사장이었는데 예레미야는 아비아달의 후손이고 에스겔은 사독의 후손입니다. 아비아달의 후손이었던 예레미야는 아나돗이라고 하는 지방 성소의 제사장이었고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에스겔은 어떻게 보면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당대의 제사장의 자녀들은 25살부터 인턴을 시작하고 30살에 본격적인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에스겔은 25살이 되던 주전 597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바벨론에 느부갓네살 왕이 등극한 이후에 남유다 백성들이 몇 번에 걸쳐서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이 나옵니다. 첫 번째가 주전 605년입니다. 이때 갈그미스 전투가 있습니다. 바벨론과 이집트가 전쟁을 하였는데 여기서 바벨론이 승리합니다. 주전 605년까지 남유다는 이집트의 봉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가 시키는대로 충성하고 순종했던 남유다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가 패하는 것을 보면서 그때부터 남유다는 바벨론의 봉신이 됩니다. 마치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가 이제 조선은 청나라의 봉신 국가라고 하면서 소현 세자를 인질로 잡아간 것처럼, 남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주전 605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의 봉신 국가가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몇 사람을 포로로 잡아 갑니다. 그때 끌려간 사람이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이것이 1차 포로입니다. 2차 포로가 주전 597년입니다. 이때는 여호야긴이라는 왕이 사로잡혀 갑니다. 왕이 잡혀갔으니까 엄청난 사건입니다. 왕, 귀족, 제사장, 전문직 기술자 등 약 만 명 정도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데 이를 2차 포로라 합니다. 이때 여호야긴 이라는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공교롭게도 주전 597년에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그의 나이가 25살입니다. 25살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에스겔이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본격적인 인턴을 시작할 나이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역하지 못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로로 끌려간지 5년이 지나고 즉 30살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는 그때, 에스겔은 그발 강가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자로 세움을 받습니다. 에스겔이 끌려갔던 주전 597년이 2차 포로 시점입니다. 3차가 남유다가 바벨론에 저항하다 완전히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벽도 무너지고 성전도 무너진 주전 586년입니다. 그리고 그달랴 총독이 암살된 이후에 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와서 남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를 4차 포로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1~3차 포로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등장하면서 주전 605년에 1차 포로, 이때 끌려간 사람이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주전 597년에 2차 포로, 이때 끌려간 사람이 여호야긴 왕과 약 1만 명의 사람과 에스겔입니다. 그리고 3차 포로가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했던 주전 586년에 일어나게 됩니다.
에스겔이라는 사람은 25살이던 주전 597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5년이 지난 주전 592년에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이방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포로로 끌려간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이 주로 끌려갔냐면 왕족, 귀족, 제사장 가문,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끌려 갔습니다. 많고 많은 제사장 아들 가운데 에스겔이 끌려 갔다는 말은 에스겔이 능력 있는 인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라는 인물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가문 출신이고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미래가 보장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것을 보면 나름대로 능력 있는 인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86년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멸망을 당합니다. 이때 남유다 백성들의 충격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남유다 백성들은 실제 일상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믿지는 못했지만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자시고 세계 역사의 주관자이고 섭리자이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하나님만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이방의 우상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고백과 삶에 괴리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국가의 군사력의 충돌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인들은 현대인들에 비해서 훨씬 더 신앙적입니다. 이 말은 뭐냐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신과 연관시켜 사유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세계관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검증이 안 되고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들면 신이 진노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했는데 자녀를 갖지 못하면 신이 축복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다 신과 연관시켜 사유했습니다. 고대인들이 현대인들에 비해 훨씬 더 신앙적이었습니다. 모든 사건에 대해서 신앙적인 해석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국가와 국가가 전쟁하는 것도 고대인들은 A국가의 후견신과 B국가의 후견신의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남유다와 바벨론이 전쟁한다면 누가 더 군사력이 강하고 막강한 무기가 있는지,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지, 탁월한 리더십이 있는지, 아마 현대인들은 이런 것들로 누가 이길지를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A나라와 B나라가 전쟁을 한다면 A나라 사람들이 섬기는 주신, 이것을 A나라의 후견신이라 생각하고 B나라 사람들이 섬기는 주신, 이를 B나라의 후견신으로 봅니다. 이스라엘의 후견신은 야훼 하나님입니다. 바벨론의 후견신은 마르둑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바벨론이 전쟁을 하면 이 전쟁은 야훼 하나님과 마르둑의 전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두 신 가운데 더 강한 신, 위대한 신이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결국 남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한 것은 단순히 남유다가 바벨론 보다 군사력이 약하고 무기가 약하고 전략과 전술이 부족해서 패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마르둑이 야훼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 위대한 신이다, 상위 신이다 라고 하는 판정이 되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했을 때 남유다 백성들의 신학적 충격은 엄청난 겁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 하나님이 마르둑에게 패했다, 이런 것들을 남유다 백성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학적 충격을 받은 겁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남유다 백성들은 이런 신학적인 혼란을 어떻게 정리했냐면 야훼가 마르둑 보다 약해서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떠나있던 남유다 백성을 심판한 사건이다, 이렇게 남유다 백성들은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남유다 백성들을 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 민족이 아니라 언약 백성을 칠 수 있는가, 여기서 남유다가 패망하면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시 붙잡은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언약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였는데 르호보암 왕 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먼저 망했습니다. 남유다도 주전 586년에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죠.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언약은 피로 맺은 약속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 약속이 언약입니다. A와 B 두 당사자가 언약을 체결한다고 했을 때 이 두 당사자가 짐승을 반으로 쪼개고 쪼개진 짐승을 양 옆에 두고 그 사잇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그러면 언약이 체결됩니다. 왜 이런 예식을 행하냐면 ‘내가 너에게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쪼개어 죽임당한 짐승처럼 나를 죽여도 좋다’는 겁니다. 이만큼 언약은 엄중합니다. 목숨을 걸고 맺는 약속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이스라엘 왕이 되겠다고 약속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만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충성을 바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 남유다가 멸망하고 남유다 백성들은 뭐를 깨달았냐면, 그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 남유다 백성을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들어서 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과 자신들이 체결한 언약이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에 근거해보면 하나님께만 충성하고 순종하겠다는 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를 지키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전 586년에 남유다가 무너졌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겁니다. 왜 심판 받았습니까? 남유다가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과의 언약이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여기서 남유다 백성들, 특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은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심판의 매를 맞고 있는데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언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언약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고 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자각합니다. 자신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이방의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랜 세월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죄된 삶을 지속하다가 바벨론이라고 하는 막대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때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매를 맞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오랜 세월 망각했던 언약 개념을 기억하면서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고 있지만 다시 언약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라는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언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집대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 때와 포로기 이후에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이 집대성되고 정경으로 확정된 겁니다. 역설적으로 바벨론 포로기라는 고난의 세월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신학적으로 가장 풍성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에스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있을 때 불 전차를 타고 자신을 심방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기 전까지 남유다 백성은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자와 주관자라 고백은 했지만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을 가나안 땅, 더 적게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한시켰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들 중에서도 고백을 할 때에는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자이고 세계 역사의 주관자라고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은 믿는 자들 하고만 상관이 있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공간은 교회라는 공간에만 제한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그 위대한 고백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가나안 땅에서만 역사하시는 것처럼 제한적으로 생각한 것이 사무엘상 26장 19절, 룻기 1장 15절, 그리고 요나서에 나옵니다. 요나서를 보시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경고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그냥 니느웨로 가지 않으면 될 텐데 요나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안 가면 되잖아요. 이스라엘 땅에 머물면 되는데 왜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을 치려고 한 걸까요? 이것은 요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대다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신학적 사고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스라엘 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통치와 지시와 간섭과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않는 이방 땅으로 도망치려 한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높았지만, 고백은 하나님이 세계 역사를 주관하는 것처럼 했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가나안 땅만을 다스리시는 신인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지극히 축소시켰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포로들의 가장 큰 서글픔과 고통, 안타까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되는 것을 그들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이해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고, 만남을 가질 수 없는 것이 포로로 끌려가는 이들의 가장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방 땅에 머무르게 되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에스겔 1장에서 그발 강가에 있는 에스겔을 하나님이 불 전차를 타고 심방오신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백성이 어디에 있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바벨론 포로들이 깨달으면서 그들은 바벨론 땅에 회당이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원한다면 원래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을 때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안 돌아 옵니다. 왜 안 돌아왔을까요? 신학적인 사고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만 다스리는 분이야, 이스라엘 땅에 있어야만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 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왔을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합니다. 왜 안 돌아왔을까요?.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어떤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첫 출발이 에스겔 1장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신학적 사고가 굉장히 성장하고 건강하게 전환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에스겔 본문을 보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에스겔이라는 사람은 25살이던 주전 597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5년이 지난 주전 592년에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이방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포로로 끌려간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이 주로 끌려갔냐면 왕족, 귀족, 제사장 가문,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끌려 갔습니다. 많고 많은 제사장 아들 가운데 에스겔이 끌려 갔다는 말은 에스겔이 능력 있는 인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라는 인물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가문 출신이고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미래가 보장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것을 보면 나름대로 능력 있는 인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86년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멸망을 당합니다. 이때 남유다 백성들의 충격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남유다 백성들은 실제 일상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믿지는 못했지만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자시고 세계 역사의 주관자이고 섭리자이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하나님만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이방의 우상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고백과 삶에 괴리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국가의 군사력의 충돌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인들은 현대인들에 비해서 훨씬 더 신앙적입니다. 이 말은 뭐냐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신과 연관시켜 사유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세계관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검증이 안 되고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들면 신이 진노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했는데 자녀를 갖지 못하면 신이 축복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다 신과 연관시켜 사유했습니다. 고대인들이 현대인들에 비해 훨씬 더 신앙적이었습니다. 모든 사건에 대해서 신앙적인 해석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국가와 국가가 전쟁하는 것도 고대인들은 A국가의 후견신과 B국가의 후견신의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남유다와 바벨론이 전쟁한다면 누가 더 군사력이 강하고 막강한 무기가 있는지,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지, 탁월한 리더십이 있는지, 아마 현대인들은 이런 것들로 누가 이길지를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A나라와 B나라가 전쟁을 한다면 A나라 사람들이 섬기는 주신, 이것을 A나라의 후견신이라 생각하고 B나라 사람들이 섬기는 주신, 이를 B나라의 후견신으로 봅니다. 이스라엘의 후견신은 야훼 하나님입니다. 바벨론의 후견신은 마르둑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바벨론이 전쟁을 하면 이 전쟁은 야훼 하나님과 마르둑의 전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두 신 가운데 더 강한 신, 위대한 신이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결국 남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한 것은 단순히 남유다가 바벨론 보다 군사력이 약하고 무기가 약하고 전략과 전술이 부족해서 패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마르둑이 야훼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 위대한 신이다, 상위 신이다 라고 하는 판정이 되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했을 때 남유다 백성들의 신학적 충격은 엄청난 겁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 하나님이 마르둑에게 패했다, 이런 것들을 남유다 백성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학적 충격을 받은 겁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남유다 백성들은 이런 신학적인 혼란을 어떻게 정리했냐면 야훼가 마르둑 보다 약해서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떠나있던 남유다 백성을 심판한 사건이다, 이렇게 남유다 백성들은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남유다 백성들을 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 민족이 아니라 언약 백성을 칠 수 있는가, 여기서 남유다가 패망하면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시 붙잡은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언약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였는데 르호보암 왕 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먼저 망했습니다. 남유다도 주전 586년에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죠.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언약은 피로 맺은 약속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 약속이 언약입니다. A와 B 두 당사자가 언약을 체결한다고 했을 때 이 두 당사자가 짐승을 반으로 쪼개고 쪼개진 짐승을 양 옆에 두고 그 사잇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그러면 언약이 체결됩니다. 왜 이런 예식을 행하냐면 ‘내가 너에게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쪼개어 죽임당한 짐승처럼 나를 죽여도 좋다’는 겁니다. 이만큼 언약은 엄중합니다. 목숨을 걸고 맺는 약속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이스라엘 왕이 되겠다고 약속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만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충성을 바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 남유다가 멸망하고 남유다 백성들은 뭐를 깨달았냐면, 그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 남유다 백성을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들어서 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과 자신들이 체결한 언약이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에 근거해보면 하나님께만 충성하고 순종하겠다는 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를 지키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전 586년에 남유다가 무너졌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겁니다. 왜 심판 받았습니까? 남유다가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과의 언약이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여기서 남유다 백성들, 특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은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심판의 매를 맞고 있는데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언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언약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고 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자각합니다. 자신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이방의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랜 세월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죄된 삶을 지속하다가 바벨론이라고 하는 막대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때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매를 맞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오랜 세월 망각했던 언약 개념을 기억하면서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고 있지만 다시 언약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라는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언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집대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 때와 포로기 이후에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이 집대성되고 정경으로 확정된 겁니다. 역설적으로 바벨론 포로기라는 고난의 세월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신학적으로 가장 풍성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에스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있을 때 불 전차를 타고 자신을 심방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기 전까지 남유다 백성은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자와 주관자라 고백은 했지만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을 가나안 땅, 더 적게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한시켰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들 중에서도 고백을 할 때에는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자이고 세계 역사의 주관자라고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은 믿는 자들 하고만 상관이 있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공간은 교회라는 공간에만 제한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그 위대한 고백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가나안 땅에서만 역사하시는 것처럼 제한적으로 생각한 것이 사무엘상 26장 19절, 룻기 1장 15절, 그리고 요나서에 나옵니다. 요나서를 보시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경고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그냥 니느웨로 가지 않으면 될 텐데 요나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안 가면 되잖아요. 이스라엘 땅에 머물면 되는데 왜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을 치려고 한 걸까요? 이것은 요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대다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신학적 사고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스라엘 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통치와 지시와 간섭과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않는 이방 땅으로 도망치려 한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높았지만, 고백은 하나님이 세계 역사를 주관하는 것처럼 했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가나안 땅만을 다스리시는 신인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지극히 축소시켰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포로들의 가장 큰 서글픔과 고통, 안타까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되는 것을 그들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이해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고, 만남을 가질 수 없는 것이 포로로 끌려가는 이들의 가장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방 땅에 머무르게 되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에스겔 1장에서 그발 강가에 있는 에스겔을 하나님이 불 전차를 타고 심방오신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백성이 어디에 있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바벨론 포로들이 깨달으면서 그들은 바벨론 땅에 회당이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원한다면 원래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을 때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안 돌아 옵니다. 왜 안 돌아왔을까요? 신학적인 사고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만 다스리는 분이야, 이스라엘 땅에 있어야만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 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왔을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합니다. 왜 안 돌아왔을까요?.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어떤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첫 출발이 에스겔 1장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신학적 사고가 굉장히 성장하고 건강하게 전환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에스겔 본문을 보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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