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레미야를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번에 예언서 개론을 할 때 예언자들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이 사역했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이사야는 주전 8세기를 배경으로 사역했던 예언자이고 예레미야는 이사야로부터 100년 후에 사역했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비아달의 후손입니다. 아비아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죠? 다윗, 솔로몬입니다. 다윗 때 특이하게도 대제사장을 두 명 세웠습니다. 한 명이 아비아달이고 한 명이 사독입니다. 아비아달이라는 사람은 다윗의 아들 가운데 아도니아라는 사람을 왕으로 밀었습니다. 사독이라는 사람은 솔로몬을 왕으로 밀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솔로몬을 선택하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솔로몬이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솔로몬은 자신의 왕 됨을 거부하고 아도니아를 지지했던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유배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제사장 아비아들은 유배를 떠납니다. 유배를 떠난 곳은 아나돗이라는 땅인데 그 아나돗 땅에서 아비아달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떻게 보면 재야 예언자라고 볼 수 있고 예루살렘과 대립 관계에 있던 아나돗의 제사장입니다. 그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주전 627년에 부르셔서 남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40년 동안 예언 사역을 행하게 하신 겁니다. 우리가 보통 예레미야 하면 눈물의 예언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애가가 붙어있죠. 그래서 눈물의 예언자라 많이 주장하는데 예레미야는 예언자 중에서 가장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예언자의 운명 자체가 죽음으로 초대받는 거거든요.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 받았던 세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왕, 제사장, 예언자입니다. 왕은 기름 부음 받으면 정치 권력을 쥐게 되고 제사장은 종교 권력을 쥡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언자로 기름 부음을 받으면 죽음으로 초대받는 겁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고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메시지를 계속 선포하기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예언자들의 운명 자체가 비참한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세월 감옥에 투옥되고 매를 맞고 사람들에게 미움받은 예언자를 꼽자면 단연코 예레미야입니다. 우리가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라 하는데 그것이 단지 예루살렘, 남유다가 멸망된 것에 대한 눈물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예언 사역을 하면서 끊임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예언자로서의 고통을 처절하게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수술의 무용성을 주장했습니다. 이제는 회개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을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우리를 심판하신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남유다 백성에게는 매국노적인 메시지로 들린 겁니다. 예레미야는 결국 뭘 얘기한 거냐면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공동체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땅 신학에 근거해보면 미쉬파트와 체다카라고 하는 임대료를 성실하게 납부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아서 지금 체납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마음이 없는 겁니다. 이런 공동체가 살 길은 하나님께 심판의 매를 맞고 새롭게 정화되고 갱신되는 길 밖에 없음을 외친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남유다 백성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을 믿은 겁니다. 예레미야 7장을 보시면 예레미야가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선포합니다. 4절입니다. “너희는 이곳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보자면 우리가 주일 예배 드리러 교회에 가는데 교회 앞에 어떤 사람이 서서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지내려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말할 때 얼마나 짜증 났겠습니까? 당시 대부분의 남유다 사람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고 강도의 소굴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이미 떠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메시지였습니다.
7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당시 남유다 백성들이 어떤 식의 잘못된 신앙적 사고를 하였는가, 7장 10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도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던 거짓 확신과 신념이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당신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얻었나이다’가 완료형인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은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너무 유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받았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세례받았으니까, 교회 출석하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는 한국 교인과 너무 유사합니다. 여러분, 구원받았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초대받는 겁니다. 누가 구원받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자가 구원받는 자입니다. 한국교회의 딜레마가 어디 있냐면 구원은 받고 싶어하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는 안 받고 싶은 겁니다. 구원만 받고 싶은 겁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욕망과 뜻대로 이뤄지기를 갈망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겁니다. 누가 진짜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진짜 구원받은 자인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문제를 드러내냐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확신은 강하냐면 “우리는 구원 받았어, 구원은 이미 얻은거야”라는 이 확신이 너무 강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질타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남유다 백성이 예레미야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남유다 백성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 없이 자기들이 만들어 낸 거짓 확신과 거짓 신념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레미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를 공부할 때는 이사야 당대에 제국으로 급부상한 나라가 앗수르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바벨론입니다. 특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중요합니다. 앗수르를 제압하고 바벨론이 고대 근동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을 때 예레미야가 사역을 행합니다. 결국 이 바벨론에 의해서 남유다가 집어삼킴을 당합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당시 시대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가 40년 내내 미움받았다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왜 이렇게 미움을 받았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방금 전에 읽었던 예레미야 7장처럼 당시 남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신성불가침의 대상입니다. 그 누구도 성전을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니까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신성 불가침의 대상인 성전을 공격했습니다. 여기는 더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고요. 그러면서 예레미야 7장 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성전을 도둑의 소굴이라 합니다. 나중에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채찍으로 사람들을 책망하시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야 할 이곳을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죠. 그 이야기가 바로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한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도둑과 강도의 소굴이 된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대상이었던 성전을 공격한 것,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상식을 정면으로 공격한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예레미야는 미움을 받습니다. 그다음에 예레미야 43장 10절을 보시면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이 남유다를 공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저항할 것이 아니라 항복해야 한다,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성찰하고 회개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국가 위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힘을 다해 바벨론과 일사항전을 벌이려고 하는데 예레미야는 항복해야 한다고 하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까 남유다 백성이 볼 때는 매국노인 겁니다. 이것 때문에 미움을 받습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결국 남유다는 예레미야의 말처럼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1~2차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1~2차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심판 받았으니까 금방 하나님에 의해서 회복되겠지 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것이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금방 돌아오지 못한다, 포로들은 최소 70년 동안 바벨론에 머물러야 된다 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장기 유배설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끌려 간 사람들에게 금방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거기 정착할 생각을 해라, 결혼도 하고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거기에 터를 잡아라, 이렇게 얘기 합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주장이 단기 유배설입니다. 이것은 2년 내에 돌아온다는 겁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2년 내에 돌아온다는 말과 70년 후에 돌아온다는 말 중에 어떤 말을 더 좋아했을까요? 당연히 단기 유배설이죠. 사람들은 또 여기에 열광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2년이 아니라 70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신성불가침의 대상을 공격하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금방 돌아오지 못하니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삶을 영위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말들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배경을 기억하시면서 예레미야를 보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수술의 무용성을 주장했습니다. 이제는 회개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을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우리를 심판하신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남유다 백성에게는 매국노적인 메시지로 들린 겁니다. 예레미야는 결국 뭘 얘기한 거냐면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공동체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땅 신학에 근거해보면 미쉬파트와 체다카라고 하는 임대료를 성실하게 납부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아서 지금 체납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마음이 없는 겁니다. 이런 공동체가 살 길은 하나님께 심판의 매를 맞고 새롭게 정화되고 갱신되는 길 밖에 없음을 외친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남유다 백성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을 믿은 겁니다. 예레미야 7장을 보시면 예레미야가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선포합니다. 4절입니다. “너희는 이곳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보자면 우리가 주일 예배 드리러 교회에 가는데 교회 앞에 어떤 사람이 서서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지내려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말할 때 얼마나 짜증 났겠습니까? 당시 대부분의 남유다 사람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고 강도의 소굴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이미 떠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메시지였습니다.
7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당시 남유다 백성들이 어떤 식의 잘못된 신앙적 사고를 하였는가, 7장 10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도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던 거짓 확신과 신념이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당신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얻었나이다’가 완료형인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은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너무 유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받았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세례받았으니까, 교회 출석하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는 한국 교인과 너무 유사합니다. 여러분, 구원받았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초대받는 겁니다. 누가 구원받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자가 구원받는 자입니다. 한국교회의 딜레마가 어디 있냐면 구원은 받고 싶어하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는 안 받고 싶은 겁니다. 구원만 받고 싶은 겁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욕망과 뜻대로 이뤄지기를 갈망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겁니다. 누가 진짜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진짜 구원받은 자인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문제를 드러내냐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확신은 강하냐면 “우리는 구원 받았어, 구원은 이미 얻은거야”라는 이 확신이 너무 강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질타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남유다 백성이 예레미야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남유다 백성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 없이 자기들이 만들어 낸 거짓 확신과 거짓 신념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레미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를 공부할 때는 이사야 당대에 제국으로 급부상한 나라가 앗수르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바벨론입니다. 특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중요합니다. 앗수르를 제압하고 바벨론이 고대 근동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을 때 예레미야가 사역을 행합니다. 결국 이 바벨론에 의해서 남유다가 집어삼킴을 당합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당시 시대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가 40년 내내 미움받았다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왜 이렇게 미움을 받았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방금 전에 읽었던 예레미야 7장처럼 당시 남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신성불가침의 대상입니다. 그 누구도 성전을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니까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신성 불가침의 대상인 성전을 공격했습니다. 여기는 더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고요. 그러면서 예레미야 7장 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성전을 도둑의 소굴이라 합니다. 나중에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채찍으로 사람들을 책망하시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야 할 이곳을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죠. 그 이야기가 바로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한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도둑과 강도의 소굴이 된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대상이었던 성전을 공격한 것,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상식을 정면으로 공격한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예레미야는 미움을 받습니다. 그다음에 예레미야 43장 10절을 보시면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이 남유다를 공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저항할 것이 아니라 항복해야 한다,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성찰하고 회개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국가 위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힘을 다해 바벨론과 일사항전을 벌이려고 하는데 예레미야는 항복해야 한다고 하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까 남유다 백성이 볼 때는 매국노인 겁니다. 이것 때문에 미움을 받습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결국 남유다는 예레미야의 말처럼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1~2차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1~2차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심판 받았으니까 금방 하나님에 의해서 회복되겠지 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것이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금방 돌아오지 못한다, 포로들은 최소 70년 동안 바벨론에 머물러야 된다 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장기 유배설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끌려 간 사람들에게 금방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거기 정착할 생각을 해라, 결혼도 하고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거기에 터를 잡아라, 이렇게 얘기 합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주장이 단기 유배설입니다. 이것은 2년 내에 돌아온다는 겁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2년 내에 돌아온다는 말과 70년 후에 돌아온다는 말 중에 어떤 말을 더 좋아했을까요? 당연히 단기 유배설이죠. 사람들은 또 여기에 열광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2년이 아니라 70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신성불가침의 대상을 공격하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금방 돌아오지 못하니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삶을 영위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말들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배경을 기억하시면서 예레미야를 보면 좋겠습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언서 녹취 9 (0) | 2022.01.06 |
---|---|
예언서 녹취 8 (0) | 2022.01.06 |
큰 일 하는 사람의 세 발견! (사 6:1-8) (0) | 2022.01.05 |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들! (벧후 3;8-13) (0) | 2022.01.05 |
세 믿음, 그 보상! (행 16:19~34) (0) | 2022.01.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