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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예언서 녹취 8

by 【고동엽】 2022. 1. 6.
1장 10절을 보시면 예언자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사명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내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다.” 예언자가 행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겁니다. 죄악으로 구축된 것,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것 이것들은 끊임없이 뽑고 파괴하고 넘어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넘어진 그 터 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을 건설하고 심어야 합니다. 회개가 어려운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동안 죄된 우리 삶을 뽑아내고 넘어뜨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새롭게 건설하고 심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역을 감당한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려고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뽑고 파괴하고 넘어뜨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장 13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두 가지 죄악이 나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것이 이스라엘이 범한 가장 심각한 두 가지 죄악입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겁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나서 자기들이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런데 이 웅덩이는 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강대국과 손을 맞잡았다는 것입니다. 강대국을 의지한 것입니다. 지난 이사야 공부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평상시 얘기했던 사람들이 중요한 순간에는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힘 있는 자들을 의지합니다. 돈 있는 자들을 의지합니다. 이스라엘도 강대국을 의지합니다. 이런 행위를 예레미야는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웅덩이는 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패망할 수밖에 없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5장 30~31절을 보시면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총체적인 타락의 상황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합니다. 맡겨진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할 예언자들이 그렇게 선포하지 않고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그런 것들만 예언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립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지상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을 잘 돌보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 목적을 망각하고 제사장의 권력을 이용해서 부귀영화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백성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고 있는 겁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거짓 예언을 선포하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야죠. 목사들이 이상한 말을 하면 백성들이 일어나야죠. 그런데 자기들에게 평화를 말하고 자기들이 듣고 싶은 메시지를 선포하는 거짓 예언자에 대해서 백성들은 좋게 여기는 겁니다. 한 마디로 총체적인 타락입니다. 어디 하나 희망이 없는 겁니다.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5장 30~31절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8장 19절입니다. “내 딸 내 백성이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했던 찬양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자신만만이 있었냐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겠어, 하나님이 시온을 버리시겠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자신들이 만든 거짓 신념, 거짓 신앙을 붙잡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나님은 여기에 계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아” 이런 고백을 되뇌이면서 심판의 그늘이 드리운 그 순간에도 자신만만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백성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16장 2절입니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한 유일한 예언자가 예레미야입니다. 왜 결혼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남유다가 곧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임하게 되면 온 가족이 전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결혼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물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더 힘들어 집니다. 결혼하지 않는 이런 행위를 통해서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이 25장 1절입니다. 예레미야에서 가장 중요한 해를 꼽으라고 하면 여호야김 4년입니다. 이때가 주전 605년입니다. 이때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등극한 원년입니다. 이때가 예레미야에서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면 605년 이전만 해도 예레미야는 남유다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런데 605년 이후에는 더 이상 회개를 촉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된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605년까지가 회개의 임계점입니다. 회개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런데 605년이 넘어가면서 회개의 임계점이 끝나버렸습니다. 더이상 회개한들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을 온 존재를 다해서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 심판의 매를 맞으면서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각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갱신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때가 주전 605년입니다. 이것은 여호야김 4년, 느부갓네살 원년입니다. 예레미야를 읽다 보면 두 종류의 악인이 나옵니다. 하나가 여호야김이고 또 하나가 시드기야입니다. 둘 다 왕이죠. 재미있는 것은 여호야김 왕은 아예 하나님께 적대적으로 대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를 칼로 잘라내서 불태웁니다. 아예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다고 전면적으로 저항한 왕이 여호야김입니다. 악인이죠. 그런데 여호야김 만큼은 아니지만 또 한 부류의 악인이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불러서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를 불러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시드기야는 현상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있는 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레미야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도 하고 자기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도 요청하는데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게 되면 하나님께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호야김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저항한 악인이라면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열망은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주어질 때 하나님의 뜻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전형적인 무반응의 소유자가 시드기야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여호야김 같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는 아니겠지만 정말 우리가 시드기야 같은 존재는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은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지 않는, 뜻이 주어졌을 때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런 모습은 아닐까, 이런 반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예레미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31장 33절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에 의해서 남유다 백성들에게 은혜가 주어질 것인데 그 은혜 가운데 하나가 새 언약이 체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31장 31절 이하에 잘 나오는데 새 언약은 옛 언약이었던 시내산 언약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잘 보십시오. 33절입니다.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자, 보세요.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과 제일 먼저 맺은 언약은 시내산 언약입니다. 시내산 언약 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돌판에 기록해주셨습니다.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은 누군가가 이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 줄 때만 알 수 있겠죠? 옛 계약에서는 일반 백성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판에 쓰여져 있고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제대로 우리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 알려주지 않았다”,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맺을 때는 돌판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마음 판에 당신의 뜻을 기록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존재 안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새 언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 안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새겨 놓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 안에서부터 말씀으로 충만해진 자들이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백성들의 모습, 그것이 아름답게 구현되어 진 것이 사도행전 2장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보면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누가 시킨 것이 아니지만 땅이 있는 자들은 땅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공동체에 헌금합니다. 각각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발적인 순종을 드러내는 이것이 바로 옛 언약과 차이 있는 새 언약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44장 17절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사야는 므낫세라는 왕 때 통나무 안에 들어가서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예언 사역을 했는데 나중에 애굽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끌고 갑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끌려가서 사람들에게 철퇴에 맞아 죽임을 당합니다. 예레미야가 애굽으로 끌려간 이야기가 예레미야 후반부에 나오는데, 여기 44장 17절에 보면 예레미야를 끌고 간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이스라엘 안에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 존속되었는지 알 수 있죠. 우리가 하던 것, 우리의 왕, 관료, 모든 사람들이 하던 것,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여왕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린 겁니다. 여기 하늘 여왕을 이쉬타르로 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오랜 세월 우상숭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그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고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우상을 숭배할 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겁니다. 지난 모세오경과 역사서 공부할 때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습니까? 조금 가난하게 살더라도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 보다는 우상을 숭배하더라도 부유하게 사는 삶을 선택한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복인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진정한 복인데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복인데 이스라엘은 이런 복을 저버리고 어떤 복을 추구한 겁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내가 원하는 욕망을 성취하는 것, 그 결과 자기에게 그런 것들을 제공해준다고 믿어왔던 온갖 이방 우상을 숭배한 겁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예레미야 44장 17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하늘 여왕에게 분향했을 때 자기들이 잘 살았는데 복 받았는데 요시야가 이방의 우상들을 박살내고 하나님만을 섬기자고 한 순간부터 삶이 어려워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하나님보다 세상의 물질적 맘몬, 세상의 욕망 이런 것들을 추구했던 이스라엘의 현실을 잘 폭로하는 것이 예레미야 44장 17절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한 번 돌아봐야 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부르고 있지만 진짜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진정한 목마름이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과 결단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 나의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주된 관심은 아닌건가, 하나님과 맘몬, 하나님과 권력, 하나님과 욕망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들을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점검하고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것은 반성하고 돌이켜야 할 것은 진정 돌이키는 것이 예언서의 말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고 큰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 백성들이 갖고 있던 거짓된 확신에 도전한 것 때문에 백성들에게 오랜 세월 미움받고 감옥에 투옥되었고 공격받았던 예레미야, 그런데 그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예언자임이 결국은 역사를 통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나를 당장 부담스럽게 만드는 메시지를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죄를 들춰내는 것을 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짜 우리를 살리는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를 다시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기회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하면서 예언서가 말하고 있는 그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삶이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변화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되어지어 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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