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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운 양의 본질! (요 10;14-16)

by 【고동엽】 2022. 1. 4.

양다운 양의 본질! (요 10;14-16)

 

 

서커스 단원들이 사자를 끌고 다니는 것을 중국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사자를 타고 같이 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잔뜩 긴장하였습니다. 저러다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사자 이빨을 다 빼버렸습니다. 발톱을 모조리 수술하여 빼버렸습니다. 발톱, 손톱, 이빨이 빠진 사자는 이미 사자가 아닙니다. 사자의 본질을 잃어 버렸기에 돼지와 똑같습니다. 불쌍한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면 불쌍합니다. 삼손의 본질은 힘이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은 머리칼이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집에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면서 머리를 자르지 말고 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자랐습니다. 장수가 되었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1,000명을 혼자 죽일 정도의 장수였습니다. 사자를 찢어 죽일 정도로 힘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소렉 골짜기에 살고 있는 들릴라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달콤한 사랑에 빠져서 여인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머리칼을 다 잘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머리칼을 잘린 삼손은 더 이상 삼손이 아니었습니다. 본질을 잃어 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두 눈을 빼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방앗간에서 연자 맷돌이나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본질 머리칼이 자랐습니다. 다시 힘이 솟구쳤습니다. 다곤 신당에서 잔치를 할 때 신당을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을 붙들고 쓰러 드렸습니다. 그 큰 건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본질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예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양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철저히 주님의 양입니다. 그러면 양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1. 양의 본질은 온유입니다.

양 하면 첫 번 생각나는 것은 온유입니다. 양은 싸움을 먼저 걸어 본 적이 없는 동물입니다. 싸움을 걸면 같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동물입니다. 한 번도 공격을 하여 본 적이 없는 동물입니다. 무 공격, 무방비의 동물입니다.

그렇기에 양은 손톱도 발톱도 뿔도 공격하는 이빨도 없습니다. 공격 무기도, 방어 기구도 없습니다. 양은 온유합니다. 우리는 온유하여야 합니다.

독일에서 이민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어느 교회 초빙을 받아 부임하였습니다. 교인들을 보니 다 양 같지 않았습니다. 이리같이 공격적이고 거센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호랑이 같이 목회하지 않으면 이 교회에서 견딜 수가 없겠구나!> 그리고 그 다음부터 목회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항상 무섭게 하였습니다. 꼼짝 못 하게 하면서 목회하였습니다. 공격적인 목회를 하였습니다.

1년 지났습니다. 교인들이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철저한 실패였습니다. 그 후 다른 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상처받고 병들은 양 같았습니다. 세상에 찢기고 아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혼자 생각하였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선한 목자처럼 목회하여야 갰구나!> 그리고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온 성도들은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사랑하며 목회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얼마 후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양의 본질은 온유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양의 본질은 온유입니다. 우리는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투고 싸우는 사람은 양이 아닙니다. 늑대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목자요 너희는 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늑대요 나는 사냥꾼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양의 본질은 온유입니다. 그래서 늑대 같은 사람도, 이리 같은 사람도, 사자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기만 하면 온유한 양으로 변하는 법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그렇습니다. 바울이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살인범이요, 살인 미수범이었습니다.

민수기는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처음 성격은 사람을 때려죽일 정도로 다혈질이었습니다.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모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잡족들이 광야에서 항상 문제를 먼저 일으켰습니다. 모세는 잡족을 잘 다스리고 싶어서 잡족 중에 한 여인인 검둥이 구스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미리암이 이방여인과 결혼한다고 비난하자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불치병 문둥병을 고치기 위하여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모세는 80 살에 가시떨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온유하게 되었습니다. 늑대 같았던 모세가 양같이 온유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난하다가 문둥병에 걸린 누나를 위하여 기도할 때 이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온유하게 됩니다. 바울도 사자같이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은 모두 율법을 무시하는 이단이라고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스덴반을 죽이는 데도 앞장섰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이 이런 핍박을 피하여 다메섹으로 멀리 도망쳤습니다.

바울은 거기까지 쫓아가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목자 되신 주님 앞에 양같이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멧돼지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멧돼지는 목표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저돌적인 동물입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단 한 마리도 못 잡는 밤이라고 밤새 포기하지 않고 고기를 못 잡는 새벽까지 그물을 던지는 저돌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을 죽이려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혼자라도 싸우겠다는 막가파 인생이었습니다. 그 때 말고 귀가 잘라져 나갔습니다. 목표를 향하여는 멧돼지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는 양 같은 온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된 이들은 양같이 온유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번제물로 가장 많이 쓰여 지는 동물은 양이었습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여자들도, 아이들도 죽이기 쉬운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역사상 번제물로 드리려는 양이 안 죽으려고 공격적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온순한 동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양은 온유하여야 합니다.

 

2. 양의 본질은 공급입니다.

양의 두 번째 본질은 공급입니다. 양은 철저히 주기만하는 동물입니다. 양이 살아 있을 때에는 두 가지를 늘 공급합니다. 하나는 젖이고 다른 것은 털입니다. 양모로 만든 털은 고급 옷감이 됩니다. 양은 계속 하여 주기만 하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양은 죽어서도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줍니다. 하나는 고기이고 다른 것은 가죽입니다. 양 가죽은 양피지로 성경을 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입니다.

옛날 성경은 다 양가죽을 썼습니다. 그리고 양 고기는 최고로 맛있는 고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지낼 때에 저는 아내와 양고기를 사먹지 못 하였습니다.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넉넉하지 못 한 살림에 양고기만 사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까지 와서 양고기 한 번 못 먹으면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아서 양고기를 한번 먹기로 하였습니다. 재래시장으로 내가 들어갔습니다. 정육점에 들어가서 양 고기 두 근을 주문하였습니다. 주인이 나를 불러 말했습니다. <한 근 더 사시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한 근 이라도 더 팔려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양고기를 요리하게 좋게 잘라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잘 드는 칼로 대강 잘라 주면 집에서 요리하기에 쉬울 것 같아서 아내를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자른 양고기를 저울에 올리고 나더니 주인이 말했습니다. <네 근입니다> 나는 한 근은 덜어 놓고 세 근만 사겠다고 주문하였습니다.

주인은 잘라 놓아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잘라 놓았어도 당신이 자른 것이지 나는 세 근만 주문하였으니 세 근만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큰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재래시장이라 주변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나는 혼자였습니다. 점점 겁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경우가 없는 행동이기에 끝까지 조곤조곤 따지기로 하였습sl다. 그러나 언어가 짧았습니다. 그래도 나도 지지 않았습니다.

나도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우리 편을 불렀습니다. 모두 모였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는 경찰을 데리고 와서 판단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항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근을 샀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아까워서 5명이 양 고기 세 근을 가지고 10일간 조금 조금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양 고기는 참으로 고소하고 맛있는 고기입니다.

양은 철저히 주는 동물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양입니다. 우리는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양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결코 나는 받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 <결코 나는 주는 사람이 되리라>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이 방글라데시에 단기 여행을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가장 문제는 선교자금이었습니다. 수십 명의 비행기 표와 체제비가 문제였습니다.

그 때 그 교회 70 넘은 노인이 선교 비를 다 헌금하면서 말했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나도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들은 선교팀원들이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선교는 여행이 아닙니다. 낭만이 아닙니다. 중노동입니다. 체력이 달리면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교회가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선교 자금만 대주시고 동행하지 않기를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나는 기어코 갈 것입니다. 죽어도 하나님께 영광이지 왜 시험입니까? 내가 선교하다가 죽으면 순교자가 됩니다. 그러나 집에서 병들어 죽으면 병사가 됩니다. 나는 영광스러운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살아서 돌아 와도 하나님께 영광이 죽어서 돌아오면 더 큰 영광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늘 주면서 살아오신 할아버지였습니다. 돈을 주고 봉사하고 마지막에서 생명까지 주려는 결단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의 고집을 꺾지 못 하고 결국은 동행하였습니다.

주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양은 아니라 돼지입니다. 늘 주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많이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많이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양의 본질은 주는 것입니다.

 

3. 양의 본질은 추종입니다.

양의 시력은 3 M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넓은 땅에 어느 곳에 풀이 있는 지 물이 있는 지 스스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인도함을 잘 받아야 풀을 뜯어 먹을 수가 있고 물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철저히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 가야 살찐 양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4-16)

한 양치기가 매일 연한 풀을 가지고 양 우리로 들어갔습니다. 한 주민이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들이나 산에서 풀을 뜯기지 않고 풀을 뜯어다 먹이는 것이 이상하였습니다. 가보니 한 마리 양을 안고 그 풀을 먹이는 데 다리가 부러져 있었습니다.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왜 부러졌습니까?” “내가 일부러 부러뜨렸습니다.” 이상한 대답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처럼 양을 사랑하는 목자를 나는 본 적이 없는 데요?” “이 양은 자꾸만 길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가까이 가면 자꾸만 슬슬 도망하곤 합니다. 그래서 다리를 부러뜨려서 다른 곳으로 가지 못 하게 하고 매일 풀을 주면서 쓰다듬어 주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제 목자인 나를 알아 볼 때까지 나는 이렇게 사랑할 것입니다”

양은 목자를 모르면 죽습니다. 그래서 양의 본질은 추종입니다. 추종은 생사를 가름하는 중요한 본질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철저히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만일 주님을 추종하지 않으면 주님은 양 다리를 부러뜨려서라고 사랑하는 양치기처럼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시험을 주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면 때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만 따라가면 목자는 모든 것을 공급하여 줍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잘 곳도 다 마련하여 줍니다.

심지어 병들면 어떻게 하든지 고쳐 주려고 애를 써줍니다. 양이 할 일은 오직 하나 목자를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목자 되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목자된 예수님이 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같이 양의 본질은 추종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에 대전 갈마 교회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전 경마장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계시는 신 현호 장로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은 주택공사에서 20년을 일하고 퇴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경마장 팀장으로 6명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이력서를 냈습니다.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책임자가 물었습니다. “누구 백으로 들어 왔습니까?” “저는 아무 백이 없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이 자리는 보통 청와대 백이 아니면 못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5명이 다 그런 백으로 들어 왔습니다. 정말 아무 백이 없었습니까?” “내게 백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 백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신 장로님은 갈마 교회에서 별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동생>입니다. 생긴 것이 예수님 같고 모든 행동 일거수일투족이 예수님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같이 목자 되신 양만 따라가면 그외 모든 것은 목자되신 예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미국에 구두로 돈을 엄청나게 벌은 브라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구두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브라운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 성공의 비결은 우선순위가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표어를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그리고 셋째는 구두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바로 이 것입니다. 우리는 양이고 예수님은 양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목자이십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우연히 채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기독교 계통 대학에 학점을 따기 위하여 갔다가 채플에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채플시간에 의무적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억지라도 앉아 있어야 학점이 나오는 것을 비아냥거리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채플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열정적으로 설교한 후에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낄낄 웃으면서 그 청년 옆구리를 툭 쳤습니다. “어이. 예수가 자네를 부르는 군. 빨리 나가보라고. 혹시 장학금을 줄 지 알아?”

학생들은 책상을 치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 마음속에는 주님이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 일어나더니 목사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 고 예수님을 영접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스탠리 죤스 박사였습니다. 그는 후에 힌두교 국가인 인도에서 수십만 명에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용병이 되었습니다. 그 동창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목자 되신 주님만 따라간 양은 주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양의 본질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양으로서 온유하여야 합니다.

2. 우리는 양으로서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3. 우리는 양으로서 예수님을 추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2001년 9월11일 미국 무역센터 빌딩을 폭격한 9.11 비행기 테러에서 인도인 수조 존 씨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사무실에서 일했습니다. 그 날 오전 8시 48분 그가 팩스로 문서를 보내는 순간 첫째 비행기가 그의 사무실 위층을 강타했습니다. 건물이 크게 흔들렸고 천장에는 부스러기가 쏟아졌습니다.

그는 급히 직원들과 함께 계단으로 53층까지 내려가 남쪽 빌딩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계속 계단을 내려가다가 남쪽 빌딩에서 나는 폭음도 들었습니다. 무역센터 빌딩을 벗어나는 회전문에 이르자 남쪽 빌딩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는 그와 함께 벽 쪽으로 쏠려있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 예수, 예수”를 외쳤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요란한 굉음이 울리면서 수 톤짜리 건물 파편들이 비 오듯이 쏟아졌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 주님, 저는 이제 하늘나라로 갑니다. 이왕이면 제게 좀 가벼운 파편이 떨어지게 하옵소서.”

잠시 후 정신이 들어서 살펴보니 그의 몸은 쓰레기 속에 파묻혀 있었고 자욱한 먼지 때문에 그는 질식할 지경이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다들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번쩍이는 불빛을 따라 간신히 환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건물 파편에 깔려 찌부러진 앰뷸런스에서 나오는 그 불빛은 주님이 비추시는 등대 같았습니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기에 놀라서 받아보니 아내 목소리였습니다. “여보, 살아 계세요?” 이미 죽은 줄로 알았던 아내도 살아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던 그들도 다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만 따라가는 양에게는 주님의 돌보심과 축복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묻습니다. <당신은 양같이 온유, 주는 삶, 예수님을 추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늑대같이 살고 있습니까?>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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