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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목회자 (빌 1:20-24) |목회자세미나

by 【고동엽】 2022. 1. 3.

하나님의 은혜로 존경하는 동역 자들을 모시고 제3회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제는 교회발전을 위한 인격개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목회자의 성숙한 인격이요 이 인격을 통해서만 교회발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라기는 이 짧은 기간에 숭고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는 체험이 있기를 빕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진실로 위대한 사람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그 위대성이 점점 더 크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은 2천년 동안 점점 더 높이 우뚝 세워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이 어느 마을이든 어느 도시든 그 순간부터 그 도시와 그 마을은 바울의 영향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바울이 로마에 끌려서 들어오던 그날 로마의 하늘에는 복음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토인비는 이렇게 계속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사, 이 작은 거인, 바울 만큼 세계 역사의 운명을 바꿔 놓은 사람은 없다."
바울이 그토록 큰 인물이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인생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잠을 자든지, 밥을 먹든지, 감옥에 있든지, 병이 들든지 그의 생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나의 사는 것 전부가 그리스도이다" 라고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예수를 높이고 예수를 영화롭게 하고 예수를 위하는 일이라면 좋다, 더 바랄 것이 없다 하면서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요,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은 사람입니다. 결국 예수만 남기고 살다간 위대한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가이사의 재판을 기다리는 바울은 그 판결이 어찌될 것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는 거기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사는 것이 그리스도 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의 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예수는 생의 계속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살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고 그리스도가 그에게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상급이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의 마지막 코스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시작이 그리스도요, 현재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생의 마지막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를 빼버린다면 그의 생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 프랜시스라 불렸던 이용도 목사는 이런 시를 그의 신앙고백으로 남겼습니다.

사는 것은 오직 예수다. 우리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생시도 예수요 꿈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잠을 자도 예수다.
사나 죽으나 예수, 오직 예수다.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다.
예수를 위하여 살고 예수를 위해 죽자.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길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행할 수 없습니다.

 

첫째, 사나 죽으나 예수를 존귀하게 합시다.
살아도 예수를 위해 살고 죽어도 예수를 위해 죽자. 이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예수에게 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일이라면 내가 어떤 수모를 겪든지 고생하든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요 행복이요 전부이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삶의 가치 기준이 그리스도를 존귀케 함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비판하든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7~9) 하였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내게 구원을 이루었고 우리는 사는 목적이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위하여 살고 위하여 죽는 그 목적을 바로 세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위하여 살 대상이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할 목표가 있고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인생의 높은 목표나 이념이나 가치'를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에 있어 최고의 과제는 사명을 아는 일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의미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사는 것은 주를 위할 수 있지만 죽는 것은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공은 주를 위하는 것으로 알고 실패는 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신앙은 모든 것이 다 성공이요 축복이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공도 실패도 '주를 위하여'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려는 인격을 케리그마적 인격이라고 말합니다. 성서가 보여주는 인격과 세상 사람이 보는 인격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은 윤리적으로 흠이 없어야 훌륭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을 쓰신 것이 아니라, 흠이 있어도 그 허물과 실수까지도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때 그 인격을 위대한 인격자로 인정하십니다.
목회자들이 범하는 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부흥되고 교회당을 크게 짓고 사람이 많이 모여서 성공했다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고 주님께서 크게 들어 쓰시는 사람인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의 사역을 맡은 목회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이 예수 기능인인가 아니면 예수 인격자인가를 성찰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장 22절 ~ 23절)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는 많은 권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선지자는 될 수 있습니다. 잠실 체육관 같은 교회당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평생을 주의 선한 사역에 성공적으로 일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떠나가라"하고 말씀하신 것에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예수의 기능인은 되었으나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인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시고자 했던 최대 인물됨의 목적은 예수를 계시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일생동안 살아서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까? 부자된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시한 곳은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아브라함은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예수 믿고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예수요, 예수 믿고 얻은 것이 예수요, 예수 믿고 남은 것이 예수요."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을 생각하십시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용감한 사람입니다. 골리앗을 물맷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신하의 아내를 취하여 불륜의 관계를 맺어 칠계를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최대의 인격자가 된 것은 죄지은 이후였습니다. 그는 죄를 짓고 난후 의로워졌고, 죄 짓고 그리스도를 더욱 존귀케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시 51장 14절)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바로 알았습니다. 내 의가 아니라 주의 의로 구원을 받고 의로워지는 신비를 바로 알았습니다. 다윗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 오리이다."(시 51장 13절) 하였습니다.
드디어 다윗은 역사상 최대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다윗은 수많은 사람을 주 앞으로 돌아오게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살아서도 주를 위하여, 죽어서도 주를 위하여, 의로울 때에도 주를 위하여, 죄를 짓고서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한 의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삶을 보면 실수도 많고 혈기도 있고 자랑도 많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서서 서두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수제자입니다. 베드로는 장담할 때도 주님을 위했고, 실패해도 실패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과 권능을 나타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이 노저어 갈 때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걸어오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이라 할 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할 때 오라 하시니 베드로는 물 위로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자 베드로는 물속에 빠졌습니다. 베드로가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하소서." 할 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건져 주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께 절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도 예수님이 나타났고 물속에서 빠져도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의 생애는 성공해도 예수요, 실패해도 예수를 나타냈습니다. 내가 실패해도 내 실패 때문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드러나고 있다면 그 실패는 실로 위대한 실패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살고 실패도 성공도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이 사람이 바로 위대한 인격자입니다. 이러한 인격을 케리그마 인격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케리그마 인격을 개발해야 합니다.

 

둘째, 사나 죽으나 주의 몸(인격)이 됩시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인격자가 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 하나니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요 그의 심장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무엇입니까? 내 몸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주의 전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나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장 19절 ~20)
몸은 마음을 품은 인격입니다. 예수의 인격은 예수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과제는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사나 죽으나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장 5절 ~8절)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몸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장 8절)
예수님의 심장과 그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 이는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장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도 온유도 겸손도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죽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주님을 존귀케 하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귀신 쫓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표적을 보이시며 바다 위를 걷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런 능력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 인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결국 십자가의 길이요 그 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깨뜨렸기에 그 인격이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결국 십자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의 권력이나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에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용서하고 복을 빌어주는 그 사랑의 마음이 그의 인격이요, 승리요, 생명이요, 진리일 것입니다. 이 마음이 들어와야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나 죽으나 예수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스승을 만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위대한 인격자의 한 사람이던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자 성난 사자가 되어 돌을 들어 그를 쳐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하늘을 우러러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저들이 돌로 칠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신학자는 아닙니다. 목사도 아닙니다. 그는 몸으로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나타낸 순교자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에게는 스데반 집사가 위대한 그의 스승이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했던 스데반 집사의 신앙이 바울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위대한 증인들은 몸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낸 분들입니다.

 

셋째, 살아서도 목회자요 죽은 후에도 목회사역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설교로 목회를 하신 분들은 죽으면 그 소리가 그치므로 목회사역도 끝이 납니다. 그러나 몸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냈던 성자나 순교자들은 계속 살아서 지금도 목회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나 죽으나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려 한 것이 그의 사역을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남기는 위대한 인격적 목회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지금 목회를 우리가 합니까? 바울이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목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분들은 부흥사도 아니요 대교회 목회자도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했던 순교자들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하는 목회는 그 인격으로 목회하는 것이요 영원히 남는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길 때도 예수를 위하고 떠날 때도 예수를 위하고 좋을 때도 예수님의 마음이요, 억울하게 쫓겨날 때도 예수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때 성공과 실패를 넘는 위대한 목회자가 됩니다.

지금 이 역사를 보십시오. 살아도 애국이요 죽어도 애국하는 자가 있습니다. 살아서도 정치하고 죽어서도 정치하는 자가 있습니다. 김구, 안창호는 사나 죽으나 애국자요 이승만, 박정희는 살아서는 정치가요 죽어서는 애국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는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성공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이며 상대적이요 사업적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것은 내적이며 질적이며 인격적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추구하면 스스로 실패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성공과 실패의 비율을 본다면 실패자가 많습니다. 자신을 성공한 사람이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는 인격적인 위대한 목회자의 길로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유명한 자로 보았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유명했던 것을 포기하고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명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옛날로 말하자면 유명한 자라.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 이제 나에게는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만이 나의 전부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공한 자입니까? 위대한 자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성공하려다가 너무 지쳤고 피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조용히 하나님과 나 자신이 마주서서 상대적인 나에게서 절대적인 나, 수평적인 나에게서 수직적인 나를, 시간적인 나에게서 영원한 나를, 성공적인 나에게서 위대한 나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유명한 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자랑하고, 신비한 능력을 받아 권능을 행하고, 귀신 쫓아내고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어 유명하게 된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가 된 유창한 설교가들이 있고 교권을 잡고 세속의 권세자들과 함께 앉아 조찬에 기도하는 유명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마 7장 23절) 하였다면 이들이 바로 무명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라면 자신은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유명한 자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외모(사업)를 보지 않습니다. 그 중심(영성의 인격)을 보십니다. 우리는 너무 주의 일에 치중해 왔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으로만 알고 뛰고 달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성이 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사업하려는 목회자들아) 네가 많은 일로 걱정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으로(네 인격이 나와 같이 있는 것으로)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고 말씀 하십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주의 일을 위하여 이 몸을 바치려는 순교적 정신으로 뛰다가 과로로 쓰러지곤 했습니다. 이 종은 병석에 서도 또 주의 일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못하고 누워있는 것에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손에 펴든 성경은 눈을 새롭게 열어 주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장 20절)" 하는 이 말씀이 이 종을 사로잡았습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주의 일을 하려는 것이었고 죽는 것이 슬픈 것은 주의 일을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성공적인 야심이 도사리고 있는 위선을 보았습니다. 나는 병원 침대 위에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수술 후 배에 통증이 올 정도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일 때문에 병들고 일 때문에 죽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쌍한 목회자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자신의 최후를 성령이 탄식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을 하여 유명한 자가 되려는 마음에서 떠나 예수님의 마음과 몸으로 무명한 자가 되어 살고 유명한 자로 죽어 주님을 만나는 목회자가 됩시다.

 

넷째, 교회에 유익한 목회자가 됩시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것이 내 수고의 열매라면 살고 죽는 것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어, 나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고 있으나 그러나 당신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은 죽는 것을 더욱 좋고 유익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마지막 코스가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살아야 할 욕망도 있으니 그것은 당신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살고 죽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살아야 할 이유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면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하시고 떠나신 후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셨고 죽어도 유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을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서로를 위하고 유익하게 하는 착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사나 죽으나 유익되게 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일 때 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33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짐승들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짐승들의 세계를 보면 소는 사나 죽으나 인간에게 유익을 줍니다. 살아서는 주인을 위해 밭 갈고 짐을 나릅니다. 죽어서는 가죽으로부터 그의 고기까지를 주인에게 줍니다. 그러나 소가 먹는 것은 언제나 부스러기들입니다. 볏짚, 고구마넝쿨, 콩깍지의 여물 등을 먹습니다. 목회자가 소의 정신으로 살 수 있다면 교회에 참으로 유익한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 봅시다 만일 내가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교회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아니면 떠나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됩니까?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할 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설교를 잘 못하고 심방을 잘못한 것에 있습니까? 그것은 아직도 죽지 못한 육의 소욕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만이 교회에 유익이 됩니다. 목회자 가운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령한 목회자가 있고 마음은 원이지만 육의 소욕을 따라 사는 육신에 속한 목회자가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면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이들은 살아 있을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다만 떠나므로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신령한 목회자는 살아도 유익하고 죽어도 유익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살아도 주님 뜻대로 살고 죽어도 주님 뜻대로 죽는 그리스도인이요 주의 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였습니다. 사나 죽으나 일관된 삶의 축복은 오직 예수로 사는 데 있습니다.

 

다섯째, 행복한 목회자가 됩시다.
사도 바울은 사는 것도 행복하고 죽는 것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욱 좋으나"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살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했습니다. 이제 죽어도 주와 연합하는 영원한 삶에 더욱 행복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행복이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바울은 매맞고 옥중에 갇히고 사슬에 매이고 고난을 당해도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깊은 밤을 맞았어도 그 마음에는 행복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 자체가 그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고 누리고 행복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나 죽으나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프랜시스의 한 전설에 의하면 어느날 프랜시스는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즐길 수 있게 되어 매우 행복했습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로 뛰어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노래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길가에 있는 편도나무에게 하나님을 찬양하자 할 때 편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날렸습니다. 프랜시스는 기뻐서 계속 길을 가다가 개울 속에 있는 고기에게 고기 형제여 하나님을 찬양해요 할 때 고기들은 꼬리를 치며 물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기쁨에 넘쳐서 길을 계속 걷다가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새 형제여 하나님을 찬양해요 할 때 새들은 고운 목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새들은 십자가 모양을 이루며 화살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무릎을 꿇고 '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찬양했습니다.

프랜시스는 가난해도 행복했고 사나 죽으나 행복했습니다. 죽을 때 행복하게 잠들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그의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은 인생 전체가 행복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현재에 초연한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는 것일지라도 울면서 죽거나 이를 갈면서 죽는 것은 순교가 아닙니다.
순교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음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하는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평화로웠습니다(행 6장 15절). 성경은 그의 최후를 잠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요한사도의 기록대로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자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계 14장 3절).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바울의 신앙에 이르도록 힘쓰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허탄한 생각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땅만 바라보던 눈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돌려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모든 소망을 삼아야 합니다.
살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고, 죽어도 그 행복으로 잠들 수 있는 경지는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룬 신앙인의 최대 축복일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행복한 목회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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